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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칼럼

고지론에 대한 황병구의 의견

작성자경아네|작성시간12.05.09|조회수173 목록 댓글 0

 

고지론에 대한 황병구의 의견

 

ByungGoo Hwang 님이, 김동호 목사님께 귀엽게(?) 쓰는 '고지론' 반론입니다. 제 인생에 그냥 믿어도 되는 몇 사람 중 한분입니다. 제 모토가 "황병구는 언제나 옿다"입니다.

여하간, 이리 할 말 다하면서도, 예의 바르게 언행하는 능력은 황병구가 탁월하다. 난, 멀었다.

-양희송

 

최근 김동호 목사님의 페북글을 몇편 공유했다. 소명으로서 모든 직업은 성직이라는 지론을 밝히신 글(목회자 납세와도 관련된다)과 국민일보 노조파업을 지지하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 등등. 나역시 적극 찬동하는 바였기에 즐거웠다.

 

김목사님과는 가까이서 오래 사역을 함께한 적도 없고 목회관에는 다소 차이점도 있지만, 그분의 건강한 상식과 간결한 논지는 여전히 설득력과 매력을 지녔다. 개인적으로도 친한 편이다. ^^ 대학시절 노래운동 할 때 밥도 많이 사주셨고, 최근 내가 지은 "관계중심 시간경영" 추천사도 써주셨다. 이끌고 계신 바른교회아카데미 세미나에도 늘 초청해 주셔서 맛난 밥도 먹으며 발제도 하고 토론도 했다.

 

한편, 고지론과 미답지론(결코 저지론이 아님)으로 오랜 논쟁의 상대편이기도 하다. 물론 내가 적시한 것은 고지론을 오독하여 왜곡해서 적용하는 이기적인 우중이었고, 그런 태생적 위험성(인간의 본성인 상승욕구)을 가진 고지론의 보완 필요성이었다. 유학생들에게 섬김의 삶을 강조하며 주로 설파된 고지론의 선의를 부러 무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최근(3/25자를 함 보시라.) 김목사님 페북에서 한편으론 반갑고 한편으론 섭섭한 글을 보았다. 어라… 고지론과 미답지론 논쟁을 재점화하신 글이었다.

 

먼저 반가왔던 것은 고지론의 적극적인 보완이었다. 그간 말씀하신 고지란 효과적인 Tool 일뿐 Goal 이 아니니, 그런 관점으로 비판받는 것은 억울하고 부당하다시며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섬기는 것이 당신의 주장이니 그 틀에서 평가해달라는 것.

 

그리고 섭섭했던 것은 나를 소재로 일종의 반어적(역설적?) 칭찬을 하신 부분이었다. 미답지론을 설파한 황본부장은 서울대 학력에 미국 MBA까지 마치고 나름 섬김을 삶을 살고 있으니, 당신이 주창하신 고지론의 전형이 아니냐는 해설… 윽. 이건 페어플레이가 아니죠, 목사님 ㅠㅠ

 

낯간지럽지만 굳이 변명성 고백을 하자면, 내가 서울대 공학석사 학력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올라간 적은 결코 없다. 만약 그런 예를 들으라면 에티오피아에 가계신 이장규 총장님이 더 적절하다. 그리고 MBA 학력으로도 고액연봉을 받으며 간지나는 관리자 역할을 한 적도 없다. 졸업 동기들이야 대기업 임원급으로 일하지만 나는 첨부터 그걸 목표로 공부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기독운동하는 후배들이 날 향해서 '선배는 번듯한 학력이라도 가졌으니 그나마 서바이벌이 가능하지 않냐'고 따질 때는 미안하고 또 야속하다. 내게 학력은 왕왕 세속적 그룹에서는 힘이 되지만, 종종 진실한 공동체에서는 짐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실 송인수 선생님과 뜻을 같이하며 첨부터 페북 프로필에서 학력사항을 없앴다.

 

앞서 말했지만 오래전(1997년) 내가 말한 미답지도 통상 상상하는 저지대가 아니고 '남들이 가기 꺼려하는 곳'이다. 풀어 말하면 '내 본성, 또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반복적 선택'이다. 저지대도 그 중 하나일 수 있고… 내가 고지에 진출하려 했다면 동네 아주머니들과 별로 생산적이니 않는 수다를 떨며 초등학교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기보단 구의원 시다바리가 더 낫고, 가끔 '보험과사망'으로 잘못 읽히는 월간지의 자봉 편집위원장으로 뛰는 것보단 프로듀서 친구들 꼬드겨 지방 방송국 진행자로 일하는 것이 더 나으리라. 생판 모르던 경영학을 다시 공부한 것도, 안정된 직장을 접고 다시 귀국한 것도, 사춘기 딸의 동의를 얻어 수도권을 벗어나 위험한 뒤서가기 실험(?)을 하는 것도 고지론적 프레임은 아니다.

 

나름 재정돈하자면 저지대든 미답지든 그 자체가 Goal 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Goal 은 하나님의 영광 또는 그 분의 명예이다. 난 미답지를 선택하는 삶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낸다고 본 것이고, 고지에서는 그 수명이 상대적으로 짧다고 주장했었다. 고지를 경유해서 가는 과정은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단기적으로 크게 드높일 확률도 있지만 실추시킬 위험성도 크다. 굳이 저축은행 사태가 불거진 요즘 금융언어를 빌자면 High Risk, High Return 이다

 

난 김목사님이 고지론 설교를 하실 때 늘 예로 드시는 요한복음 13장의 세족식 장면을 잊지 않는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 예수님께서 주와 선생이 되신 것은 세상의 고지로 진출하셔서 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인격과 생애 자체가 그러했다. 그분은 주와 선생의 자리를 어떤 전략적인 도구로 삼으신 것이 아니고, 그저 생애 자체가 아버지의 영광에 맞추어져 있었다.

 

제발 탁월함과 고지를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가능하면 탁월함에서 멈추고 고지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고지와 부는 김목사님이 이미 정리하신 바, 신앙의 결과가 아니고 은사일 수 있기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이고 우리가 의지적으로 추구할 바가 아니다. 더욱이 누림의 길이 아니고 가시밭 길이다. 어떤 이에겐 고지가 미답지이다. 혹 내게 허락하신다면, 김목사님의 원래 본의는 '고지'가 아니고 '탁월함'이라고 다듬어드리고 싶다.

 

그리고,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하나님나라의 모형인 교회에서는 더욱) 모든 이들에게 퍼포먼스로서 탁월함을 일괄적으로 요구(받는 분위기를 조장)해선 안된다. 다만 그 이가 서있는 자리에서 (되도록 자신의 본성을 죽인 곳에서) 진정성과 신실함을 요청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은 이 진정성과 신실함을 더 높은 차원의 탁월함으로 여기실 거라 믿는다.

 

짧게 쓰려했는데 길어져 버렸다. 짧게 쓰는 능력은 김목사님이 탁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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