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비전칼럼

강학종 /우리는 어디에 목마른 사람들일까?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09.17|조회수39 목록 댓글 0

우리는 어디에 목마른 사람들일까?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예전에 <귀향>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든 영화다.
투자자가 없어서 시민 후원자 75,270명이 12억 원을 조달했다고 한다.
고등학교 동창이 SNS에 그 영화 얘기를 올렸다.
댓글 중에는 친일파를 성토하는 얘기도 있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호의호식하고 그 후손까지 잘사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한 친구가 그 사람들은 언제 벌을 받느냐고 하면서, 나한테 신학적으로 답을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답을 해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혼자 생각했다.
“그럼 신앙은 실제 상황과 관계없는 것인가?”

어쨌든 그 친구 생각으로는 그렇다.
죄니 구원이니 영생이니 영벌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것은 교회에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불신자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상관없다.
혹시 신자들한테도 그런 생각이 있지는 않을까?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현실이라는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하나님이 정말로 계시면 신앙이야말로 우리의 가장 큰 현실 문제라는 엄청난 사실을 간과한다.

기도할 때 죄인이라는 표현을 쓰기는 한다.
그런데 그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세상을 살려면 그런 것에 신경 쓸 틈이 없다.
그러면 신앙은 자기한테 익숙한 한두 가지 종교 행위로 때우게 된다.
신앙생활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못 산다고 반박한다.
그런 식으로는 예수를 못 믿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을 못 산다는 말과 그런 식으로는 예수를 못 믿는다는 말 중에 어느 말이 더 무서울까?

우리의 관심이 정말로 어디에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께 목마른 사람들일까, 세상에 목마른 사람들일까?
우리가 세상에 목마른 사람이면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 수단이 되고, 예수님께 목마른 사람이면 세상은 신앙을 나타내는 무대가 될 것이다.
예수님을 딛고 서서 세상을 우러르는 사람과 세상을 딛고 서서 예수님을 우러르는 사람은 절대 같은 사람일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아무런 자극도 주어지지 않았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그 사람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한다.
집안일 다 해놓고 거실에서 느긋하게 커피 향을 즐기는데 불현듯 돈 생각이 난다면 그 사람의 가장 큰 관심은 돈이다.
연애 중인 사람은 아무런 자극이 없어도 혼자 애인을 생각하는 법이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가득하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생각날 것이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우리의 전부로 고백하는 사람들이다.
고백이 고백으로 끝나면 의미가 없다.
인생을 통해서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 인생이 곧 우리 신앙고백에 대한 설명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