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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칼럼

강학종 / 십일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 기준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11.17|조회수43 목록 댓글 0

십일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 기준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청년들과 성경 공부를 하는 중에 십일조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십일조 얘기를 할 때마다 말 3:10 말씀이 단골로 인용되곤 한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나하나 보라(말 3:10)

한 청년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난 하늘 문 안 열어줘도 돼요. 그냥 1/10을 내가 쓸래요.”
그 얘기에 같이 있던 청년들 모두 웃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과연 웃을 얘기일까?
혹시 가슴 철렁할 얘기는 아닐까?
농담 형식을 빌리기는 했지만 “아무리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나는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습니다.”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하느냐, 마느냐?”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가치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가 단적으로 나타나는 얘기다.

예전에 “왜 치사하게 신앙을 돈으로 따집니까?”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간단하다.
사람은 돈이 걸렸을 때 가장 치사해지기 때문이다.
형제 사이에 소송을 한다면 보나마나 돈 때문이다.
돈을 빼고는 치사해질 이유가 없다.
간혹 “성의만 있으면 됐지, 액수가 무슨 상관이냐?”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성의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희생을 받으시는 분이고, 우리의 인생을 받으시는 분이다.
어쩌면 우리가 하는 헌금에는 성의 대신 무성의가 들어 있을 수도 있다.
말로는 ‘성의 표시’라고 하지만 실상 ‘무성의의 표시’인 경우가 세상에서도 왕왕 있다.

어떤 대학생이 있다.
기왕이면 군대도 갔다 왔다고 하자.
휴일에 이모가 놀러왔다.
용돈 준다면서 지갑을 꺼낸다.
밖에 안 나가고 집에 있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표정 관리를 하는데, 이모가 달랑 만 원짜리 한 장을 내민다.
그러면 정말 표정 관리를 해야 한다.
누구를 어린애로 아나?
요즘 만 원으로는 친구하고 둘이 커피 한 잔씩 마시기도 빠듯하다.
아마 한 사람은 아메리카노를 마셔야 할 것이다.

만 원이 생겼다고 해서 횡재했다고 생각할 대학생은 없다.
그러면 그 만 원을 헌금으로 내보자.
용돈으로 받을 때는 분명히 ‘껌 값’이었는데 헌금을 하려면 갑자기 ‘거금’이 된다.
무슨 뜻일까?
우리는 하나님께 ‘껌 값’도 아까워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말했다.
“헌금이든 뭐든 저는 부담되는 건 싫어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이미 부담 없이 신앙생활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면 알아듣겠는가?
하지만 진지하게 따져보자.
신앙생활은 부담되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부담이 안 되면 안 되는 것 아닐까?

한사코 부담 없이 예수를 믿으려는 분께 꼭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다.
그런 사람의 자녀가 고등학생이 되면 공부에 전혀 부담을 안 가졌으면 좋겠다.
혹시 그런 청년이 있다면, 이다음에 애인이 생겼을 때 그 애인이 둘 사이에 아무런 부담도 안 가지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이 사업을 해서 사원을 고용한다면, 그 사원이 아무 부담 없이 직장 생활을 하기를 바란다.
혹시 결혼을 한다면 그 배우자가 가정에 아무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가 악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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