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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칼럼

강학종 / 구원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4.07.22|조회수26 목록 댓글 0

구원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

강학종 / 하늘교회 목사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를 의사로 알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는 본래 의사가 아니라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루터교 목사였습니다.
또 음악에도 상당히 조예가 깊었습니다.
20대 때부터 파이프 오르가니스트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바흐의 오르간 곡 연주로는 당대 세계 일인자로 꼽혔습니다.

그런 그가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5)”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아프리카에 선교사로 가기로 마음먹었고, 선교 사역을 위해서 의술을 공부했습니다.
의사로 있다가 선교사로 간 것이 아니라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1906년에 프랑스어로 <예수 생애 연구사>를 썼습니다.
그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다가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프랑스어로는 나타낼 수 있는 의미를 독일어로는 나타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번역을 포기하고 독일어로 다시 썼습니다.
프랑스어로 쓴 책은 455페이지였는데 독일어로 쓴 책은 844페이지입니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옮기는 일이 그 정도로 어려운 모양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속한 일을 땅에 속한 언어로 정확히 옮기는 일은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구원에 대한 설명이 복잡한 이유가 그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고 구원을 얻지 못하는 수도 없고, 예수를 믿지 않고 구원을 얻는 수도 없다는 뜻으로는 백번 지당한 얘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얘기를 액면 그대로 생각하면,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을 얻는 것보다 순서적으로 앞선 사건이 됩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자마자 구원이 주어진다고 해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 와보는 장소인데도 언젠가 왔던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혹은 꿈에 본 곳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을 데자뷰 현상이라고 합니다.
전에 어떤 사람이 데자뷰 현상을 전생이 있는 증거로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시신경은 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눈을 통하여 얻은 정보도 뇌로 전달되고 왼쪽 눈을 통하여 얻은 정보도 뇌로 전달됩니다.
뇌는 두 정보를 동시에 받아들입니다만 간혹 순간적으로 회로(?)가 엉켜서 그 차이를 인식하는 수가 있습니다.
오른쪽 눈을 통하여 얻은 정보와 왼쪽 눈을 통하여 얻은 정보가 뇌에 전달되는데 시차가 발생하면, 뇌는 그것을 별개의 정보로 처리합니다.
그러면 “어? 여기는 내가 전에 왔던 곳인데 언제 왔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구원을 얻는 것은 본래 구별이 안 되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구별하면 자기가 예수를 믿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이 주어진 것이 됩니다.
예수를 믿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믿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지고, 믿지 않는 쪽을 선택한 사람에게는 구원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성경은 우리를 가리켜서 하마터면 허물과 죄로 죽을 뻔했다고 하지 않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감각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날까, 말까 고민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살아날까, 말까 고민하다가 살아나기로 결정하면 살아나고, 그냥 죽기로 결정하면 죽는 법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을까, 말까 고민한다는 얘기는 예수에 대한 감각이 있다는 뜻입니다.
감각이 있는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 예수를 믿은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면 하나님은 공정하게 심판만 보면 됩니다.
누가 믿는 사람이고 누가 믿지 않는 사람인지만 잘 분별하면 그만입니다.
믿는 사람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잘못 판정하거나, 믿지 않는 사람을 믿는 사람으로 잘못 판정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탁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판단력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얘기는 ‘예수에 대한 우리의 마음 상태’에 초점이 있는 표현이 아닙니다.
구원에는 아무런 조건도 필요 없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는 표현입니다.
“구원은 은혜로 얻는다”와 같은 뜻입니다.
그런데 왜 믿으면 구원 얻는다고 해서 헛갈리게 하느냐 하면, 행위가 아닌 것을 강조하려고 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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