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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46: 1960년대 교단지 ‘개혁주의’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01|조회수42 목록 댓글 0

고신교회 46:
1960년대 교단지 ‘개혁주의’


고신교회는 1962년 10월 고려신학교가 복교되고 이듬해 고신총회가 환원하면서 손실을 많이 보았는데, 그중 하나가 ‘파수군’을 잃은 일이다. 1963년 제13회 환원총회를 마친 후 고려신학교는 물론 고신교회로서도 독자적인 언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개혁주의’ 창간호를 1963년 10월호에 발간하였다.

‘개혁주의’가 발간되기 전에 제일영도교회에서 정홍권의 봉사로 「고려」라는 프린트물을 3호까지 발행해 교단지와 같은 역할을 했는데, 이를 고려신학교에서 인수, ‘개혁주의’로 태어났다. 편집 대표를 홍반식 교수가, 편집위원을 박손혁, 이근삼, 오병세 교수가 담당하였고, 편집 실무는 양승달 전도사가 유학을 떠나기까지 실무 작업을 담당하였다.

‘개혁주의’가 창간될 때, 별도의 창간사 없이 ‘편집을 마치고’에서 편집 실무자가 발행 동기와 목적을 “21세기는 카오스의 시대입니다. 어디로 가야 참 사는 길이 있는지 내가 설 곳이 어느 땅인지 찾지 못해 방황하는 숱한 사람들에게 걸어가야 할 방향과 서야 할 땅을 알려드리며 비진리가 춤추는 이 시대에 참된 기독교 사상과 생활을 보여주려고 여기 개혁주의를 내어놓습니다.”라 했다.

‘개혁주의’는 매월 30면 정도로 발간하는 잡지였지만, 다양한 신학 논문이 실림으로 독자들의 갈증을 해소하게 되었다. ‘개혁주의’는 초기 박손혁, 홍반식, 이근삼, 오병세 교수가 중요 필진이었다. 이렇게 발표한 글들이 모여 고려신학대학 인가 후 대학출판부를 신설, ‘신학과 신앙’(홍반식), ‘칼빈칼빈주의’(이근삼), ‘소리지르는 돌들’(오병세)이라는 그들의 첫 저서를 출판하였다. 이들을 이어서 임종만, 신현국, 전호진, 심군식 등이 중요한 필진으로 등장하였다.

「개혁주의」는 재정적인 이유로 출간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1968년 3월호에 “개혁주의는 폐간될 것인가?”는 논설을 보내고 종간되었다가, 5개월만에 다시 발행을 시작할 정도였다. ‘개혁주의’는 1973년 9월호를 끝으로 10년 동안 59호를 발행하고 중단되었다. ‘파수군’에서 고신교회의 초기의 신앙을 읽을 수 있다면, ‘개혁주의’에서는 1960년대 초에서 1970년대 초까지 고려신학교 중기의 신학을 만날 수 있다. 1969년 9월호부터 연말까지 4개월 동안 ‘개혁세계’라는 제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개혁주의’가 종간된 후 한명동 목사가 후원회장을 맡아 ‘개혁신앙’ 이름으로 새롭게 편집하여 발간을 시도했지만, 두 번을 넘기지 못하였고, 많은 사람들은 이를 잘 알지 못한다. 고신역사 아카이브는 개혁주의를 대부분과 복사본을 함께 소장하고 있는데, 이는 주로 심군식 목사에게서 받은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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