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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50: 전국학신 신문(1971)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06|조회수49 목록 댓글 0

SFC 50:
전국학신 신문(1971)


SFC에서 1970년대 초 대학생 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그 정점은 ‘전국학신’ 신문의 발간이 아닌가 싶다. 증간호를 내면서 발행인 이홍우, 주간은 강용원이 두 번 맡았다가 황현조가 담당했고, 편집국장 성재훈이었다. 김성호 취재부장, 박성만 조사부장, 우창록 문화부장 이난식, 성경수, 배영희, 최영애 최계호, 우신고, 박준선, 이형민이 기재로 임명되었다. 공덕동 성원교회에 본부를 두었다.

제20호 증간호에는 ‘새로운 학생신앙운동의 모색’이라는 증간사를 발표하였는데, 개혁주의 신앙과 학생신앙운동의 이념 제시, 학생신앙운동의 운동원간 유일한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여 신앙운동의 유대 강화, 문화적 사명에 주역하는 등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뉴스로 학원 SFC 연합 창립발기회를 1971년 3월 22일 서울중앙교회에서 모였다는 기사를 전국에 메아리치는 학원 복음화하는 톱 기사를 올렸고, 이날 발표된 역사적인 ‘학원복음화운동 선언문’을 함께 실었다. 제23회 정기대회에서 전라지방이 가입되었다는 총회 소식도 포함되었다. 2면에 SFC본질을 논하는 논문이 실렸고, 3면에는 위원회 촬요, 지방 소식에 4면은 문예면으로 할애했다.

‘문제점을 파헤친다’ 시리즈에서는 ‘요청되는 교단의 지도이념’(22호, 김만우), ‘주일학교 교육의 개선점’(23호, 윤종하), ‘학신운동의 새방향’(24호, 이만열) 등 교단적으로 신진인사들의 발언이 교단과 학생신앙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 이근삼 교수의 ‘칼빈주의 국가관(23호)’도 주목할만한 논문이다. 중견언론이었던 경향신문 사업국장 김경래는 ‘복음을 상실한 교계신문’(20호), ‘선거와 기독교회’(21호) 등의 시론을 싣기도 했다.

전국학신은 이전에 회보 형식으로 발간과 중단을 계속하여 오다가 본격적인 신문 크기 4면으로 월 1회 발간했는데 아카이브가 보관하고 있는 신문은 4월 15일자로 발간한 20호부터 11월 20일자로 발간한 24호까지 모두 다섯 종을 보관하고 있다. 전국학신사는 학생논문 현상 모집 사업도 있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한 것 같다. 그해 11월호에 ‘학신신문은 지금’이라는 논설과 ‘학원SFC 운동은 여기서 머물러야 하나?’는 사설을 낸 것으로 보아 이것이 마지막호였던 것 같다.

1970년대는 한국의 경제적인 발전으로 고등교육이 강화되어 대학생층이 크게 증가하였고, 시월 유신 직전이었는데,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때에 SFC는 학생운동보다는 학생신앙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이 시기에 헌신한 이들이 각계에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고, SFC 동문의 큰 축을 형성하고 있다.

SFC에서 신문을 발간하는 것이 SFC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고, 전국위원회 기록을 보면 약대 가장 회의록 가운데 가장 자주 등장하는 의제이기도 했다. 오랜 논의의 결실이 전국학신 신문 발간으로 나타났지만, 전임자 한 사람도 없던 시절에 이런 재정과 헌신이 필요한 큰 사업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대학의 재정지원 아래 같은 공간에서 작업할 수 있는 대학신문 편집국과는 달리 전국에 흩어진 기자들이 지방 기사를 보내오고, 신문이 발간되면 전국교회로, 또 운동원들에게 발송해야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국학신 신문 4종은 1976년 전국SFC 서기 때에 휴간된 지 5년이 된 신문을 강용원 선배와 함께 전국학신 본부로 사용했던 서울 성원교회 창고에서 찾아내었던 것인데, 어디에 조금씩 남아 있는지 사뭇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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