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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C 51: SFC편지(1972)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3.16|조회수44 목록 댓글 0

SFC 51:
SFC편지(1972)


SFC 전국위원회의록에서 간사 제도 도입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했던 기록을 만난다. SFC가 초기에는 수양회 규모가 작았고, 준비도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으나, 참가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참가하는 학생들도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대학생층이 두터워지면서 사역도 크게 확장되어 학생들 스스로 모든 사역을 준비하고 운영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생층이 두터워지면서 수양회 중심의 학생신앙운동을 탈피해야 할 시점이 되었고, 1970년대에 와서는 전문적인 학생운동으로 나아가야 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짐작하건대 CCC가 김준곤 총재가 중심이 되어 미국의 재정지원 아래 대단한 학생운동을 펼쳤던 것이 크게 자극이 되어 이제 전담간사가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 준비를 거쳐 김만우 강도사가 SFC의 첫 간사로 선임되었고, 이후부터 학생운동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그가 간사가 되었을 때는 학생들이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전국학신’ 신문이 중단되면서 새로운 미디어가 필요했다. 그렇게 하여 다시 시작한 것이 전국SFC 간사와 위원장의 이름으로 ‘SFC편지’였다.

김만우 목사는 ‘SFC편지’에서 인사 말씀, 소식, 학생신앙운동의 방향 제시, 중요한 행사들 소개 등 여러 목적을 위해 편지 형식으로 소식을 기록해 지도위원, 동문, 위원 등에게 보내었다. 적은 경비로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적절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도 목회를 하는 입장에서 시간에 한계가 있었고, 재정도 여의치 않아 한해를 발행하고는 이를 계속하지는 못하였다.

김만우 목사는 SFC 초대간사로서 열정적으로 헌신했는데, 한 해 쪽지 편지를 1,500통씩 보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부산시고교SFC연합회 서기로서 총회를 마치고 선배의 전달을 따라 총회 결과 보고서를 보냈을 때도 지도자 수련회 문서 등을 받은 바 있다.

‘SFC편지’는 1973년 SFC출신 윤종하 선생이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배도선 선교사 등과 함께 큐티를 도입하면서 성서유니온 사역을 시작하였고, 처음 ‘매일성경’을 발행할 때 SFC OEM판을 간행하기 시작하면서, 그리로 흡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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