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고신역사아카이브

특별기획 1: ‘조선천주교공교회 약사’(1931)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4.16|조회수37 목록 댓글 0

특별기획 1:
‘조선천주교공교회 약사’(1931)


2021년 부활절로 고신 역사 아카이브 개설 1주년을 맞이한다. 아카이브는 ‘특별기획’ 부문을 신설해 아카이브 기념일 혹은 한국교회에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때에 특별한 애장품으로 이를 기념하고자 한다. 특별기획 첫 회는 아카이브 설치 1주년을 맞이하여, 천주교가 조선교구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발행한 ‘조선천주공교회 약사’를 내보낸다.

한국천주교회는 매년 중국으로 가던 사신의 수행원으로 함께했던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마태오 리치가 쓴 천주교 교리서인 ‘천주실의’를 가져와 천주교의 도리를 스스로 배움으로 시작되었다. 이승훈,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 형제와 권철신 권일신 형제등이 그 일원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관심은 1783년 이승훈이 북경에 사신단의 일원으로 갔을 때 세례를 받고 귀국하였는데, 한국천주교는 이를 그 시작으로 본다. 이승훈의 귀국 후 명례방(현재 명동성당 부근) 김범우의 집에서 첫 신앙공동체가 시작되었고, 훗날 명동성당으로 발전했다. 초기는 33년 동안 목자없이 신덕을 보존하였던 기록을 하고 있다.

이후 천주교의 신해교난(1791), 신유교난(1801), 기해교난(1839), 병오교난(1846), 병인교난(1866) 등의 큰 박해로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이들은 1925년 복자가 되었고, 1983년 한국천주교 200주년(1983) 때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을 때 성인에 추존되었다. 이러한 박해는 한미수교조약 이후 자유로운 신앙생활과 포교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한국 기독교는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했지만, 천주교회와 같은 극심한 박해는 없었고, 역사적으로 한국기독교의 박해는 105인사건, 삼일운동, 신사참배 반대운동, 한국전쟁기의 수난, 군사정권하에서의 수난이 있었다.

당시 한국천주교는 전래초기, 군난시대(박해기), 신교의 자유와 광양시대, 발전기로 나누었는데, 오늘날은 1876년까지 교회의 창설과 박해시대, 1876년부터 해방까지 70년을 제2기로 신앙의 자유와 일제 침략기, 민족분단기의 천주교회로 구분하고 있다.

이 책은 당시 천주교회의 교세와 각 교구별로 교육시설, 수도회, 사회사업, 출판사업, 구료사업 등의 목록도 제시하여 당시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을 알게 해 준다. 당시는 경성교구, 대구교구, 원산교구, 평양교구, 연길교구를 두고 있었다. 1931년을 기준으로 경성교구(경기충청, 황해, 강원도)는 7,451,765명 인구에 52,949명, 대구교구(경상남북도와 전라남북도)는 인구 6,388,429명에 38,799명, 원산교구(함경남북도)는 2,323,615명의 인구에 4,245명, 평양교구(평안남북도)는 2,894,496명의 인구에 8,142명으로, 조선 전체에서 21,058,305명 인구에 104,236명의 신자로 집계하고 있어, 국민의 0.5%가 채 되지 못하는 상태였다.

한국천주교회는 한미수교조약에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이래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는데, 1884년부터 지난 46년 동안 소아영세자를 포함하여 모두 319,870명이 영세를 받아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의 기초를 닦았다.

이 책자는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으로 발행된 것인데, 경성구천주교청년회연합회가 편집하고 총장 원형근이 발행인이 되었다. 46판 세로쓰기 114면으로 편집되었고, 활판 인쇄로 되었고, 사진은 옵셋으로 처리해 가독성을 높였다. 정가는 20전. 각 장마다 수십장의 정교한 사진이 천주교의 역사를 생생히 재현해주고 있다. 1931년은 한국천주교회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이 되었던 해로 100주년 축하연을 갖고, 처음으로 ‘전선(조선 전체라는 의미) 주교회의’를 소집하기도 했다.

책의 부록에는 조선 내 공교회 역사일람표, 주교 명단, 조선내 공교신자 증가표, 과거 47년간 영세자 총수, 조선천주교 현세 일반, 조선 79위 복자 방명록, 조선 내 천주교성당 소재지 등 초기 조선천주교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복자로 봉해졌던 이들의 순교 기록도 남겼는데 새남터 5인, 서대문 사거리 41명, 당고개 9인, 경성감옥 24인에서 순교했다. 이 시기에 각 지역에 있던 성당의 사진도 남았다. 경상남도 지역은 진주 문산, 마산 완월동, 진주 옥봉동, 울산 언양, 함양, 통영 이운면, 부산진, 통영 읍내, 밀양 삼랑진 등에 최초의 성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