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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5: 총노회의 총회 개편, 그 무렵의 고신교회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5.18|조회수50 목록 댓글 0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 25:
총노회의 총회 개편, 그 무렵의 고신교회


1952년 총노회를 발회하였던 고신교회는 제6회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하였다. 경남(법통)노회 한 노회와 대구, 경주, 전라지방회가 자라서 경남, 부산, 진주, 경북, 경기, 전라 등 여섯 노회에, 그 산하 568교회가 되었다. 그 무렵의 고신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다큐 ‘고신교회 70년 역사 산책’(25) 총노회의 총회 개편, 그 무렵의 고신교회

글_ 나삼진 목사(미국 Evangelia University 교수, 오렌지카운티 샬롬교회)
고신역사기획

개교 10주년에 마련한 고려신학교 교사(1956)

총회 개편 후 첫 회장 이약신 목사, 부회장 한상동 목사(1956)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6회 속회 총회(1951, 부산 중앙교회)에서 쫒겨난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4월 29일 제37회 총회(대구 서문교회)에도 총대를 파송했지만 다시 거절되었고, 독자적인 길을 갈 수밖에 없어 1952년 9월 경남(법통)노회 제57회 정기노회 결의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를 발회하였다. 고신교회가 창립 70주년을 기산하는 것은 1952년 9월 총노회 발회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총노회는 “전통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정신을 지지하는 전국교회를 규합하여 통할하며 개혁주의 신앙운동을 하여 (법통)총회를 장차 계승하기로” 하였는데, 경남(법통)노회가 중심이 되었고, 대구지방회, 경주지방회, 전라지방회를 두어 노회에 준하는 역할을 하게 했다. 1953년 5월 경북노회, 1954년에 경기노회와 전라노회가 조직되었다.

제5회 총노회에서는 경남노회장 한상동 목사의 청원에 따라 개혁운동 1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 행사를 갖기로 하고, 경남노회 임원, 고려신학교 교수 전원, 송상석 목사, 경북노회와 경기노회장으로 위원회를 구성하였고, 경남(법통)노회를 삼분하기로 하여 6월 한 달 동안 분립노회가 조직되었다. 1956년 9월에 있은 총노회에서는 규칙을 개정하고 총회로 개편하였다.

1956년 9월 20일 부산남교회에서 모인 제6회 총회는 경남, 부산, 진주, 경북, 전라, 경기 노회 등 여섯 노회 총대 목사 52명, 장로 43명의 출석으로 개회되었다. 장로교 총회 행정원리와 달리 목사와 장로가 동일하지 못한 것은 신설교회가 많아 장로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임원 선거에서 총로회 발회 후 첫 3차에 걸쳐 회장과 부회장이었던 이약신 목사, 한상동 목사가 선출되었다.

이약신 목사는 평안도 정주 출신으로 오산학교에서 주기철을 만나 평생 친구가 되었고, 부모를 일찍 여의었던 관계로 주기철의 추천으로 학교 교사로 부임해, 문창교회 이상소 장로의 사위가 되면서 경남지역에 정착하였다. 그는 1, 2, 3, 6회 총회 회장을 지냈고, 한상동 목사는 4, 5, 7, 10, 11, 18회 총회장을 지내며 고신교회의 기초를 놓았다.

고신교회가 꾸준히 성장하여 총회로 승격되었을 때 교회 수 568교회, 목사 수 111명, 장로 157명이었고, 이를 노회 단위로 분류하면 부산노회 97, 경남노회 140, 진주노회 152, 경북노회 108, 경기노회 47, 전라노회 24 교회 등이었다(제6회 총회록).

당시는 고신교회를 칭했던 법통파와 총회파의 갈등이 심했는데, 이영헌 교수(장신대)는 “그들은 전력을 다하여 교인쟁탈전을 벌였다…고신측 교회에 가입만 하면 성자 취급의 문호가 열려졌다”고 했고, 교회 분쟁을 ‘교세 확장과 교권의 아귀다툼’이라고 했다.

그러나 한상동 목사는 총회의 요구 받고, 90% 이상의 성도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믿지 않는 이웃에게 덕을 세우기 위해 역사와 전통과 돌로 지은 번듯한 건물을 두고 나와 삼일교회를 설립했고, 서문로교회와 성동교회는 모교회의 징계를 받아 쫓겨난 성도들이 교회를 설립한 것이었다. 지방의 많은 교회들도 비슷하였다. 당시 국가 경제와 약한 교세에서 볼 때 성도들이 모교회를 떠나 개척교회를 한다는 것은 큰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총노회를 총회로 개편한 제6회 총회(1956) 무렵의 고신교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먼저, 고려신학교 초기에 박윤선 교수와 한부선 선교사가 많은 수고를 하였는데, 그동안 함일돈, 이상근 등 교수들이 충원이 되어 신학교의 규모를 갖추었다.

1954년 송도 부지를 확보하고 빈손으로 3동 단층 594평을 건축하여 1956년 9월 신학기에 맞추어 이전하였다. 신학교육은 10회 졸업생까지 178명의 졸업생을 배출해, 그들은 대부분 교회를 개척하여 625전후의 어려움을 딛고 알차게 성장하고 있었다.

둘째, 복음병원도 전쟁기에 자선병원으로 운영되면서 투자할 겨를이 없었다가 고려신학교와 협력하여 송도부지를 마련하였다. 1955년에 30베드 규모의 병원을 건축하고, 간호원 기숙사 등을 건축, 설립 6년 만에 1957년 6월 송도에 정착했다. 열악한 재정이었지만 미국 개혁교회(CRC)의 지원과 고신교회 성도들이 몸으로 건축에 참여해 큰일을 이루었다.

셋째, 1955년 9월 새 학년도에 한명동 목사는 감천 바닷가 인근에 제2차 세계대전 후 영국군이 주둔하여 사용하던 건물을 인수하여 기독교 인문교육을 위한 비전으로 기독교대학 칼빈학원을 시작하였다. 한명동 목사가 교장, 김진홍, 장석인이 교수로, 조용석, 김도환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1956년도에 신학과, 철학과, 영문과가 설치되었다.

넷째, 송상석 목사는 제4회 총노회에 제안해 출판위원을 신설하였고, 위원장으로서 출판위원회 사업계획을 제출해 1955년 6월 8일 ‘기독교보’ 창간을 주도하였고, 계속해 찬송가 편찬사업을 이끌었는데, 그러나 ‘기독교보’는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정간되었다.

다섯째, 1948년에 고려고등성경학교를 개교하였고, 1956년 1월에 평화고등학교, 2월에 평화중학교가 설립되어 교단 내 성경학교와 중등교육이 시작되었다. 전국적으로 고신교회 인사들이 운영하는 30여 개의 자선사업 기관이 있었다.

제6회 총회에서 김영진 목사를 대만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의, 제7회 총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려 고신교회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다. 1956년 무렵에 고신교회는 이렇게 기존의 신학교육과 복음병원 운영, 대학교육, 성경학교와 중등교육, 신문 발간, 자선사업 등 교단 규모를 넘어서는 다양한 사역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고신교회는 소송문제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지 못하고 개교회의 처사에 맡겨졌고, 교단적으로 여러 새로운 사역으로 신학교 재정 지원이 여의치 않아 박윤선 교장의 큰 불만이 누적되었다.

이에 총회 개편 때 신학교 교장으로서 총대권 탈퇴와 함께 공개적으로 4대 과제 해결을 제안한 것이다. 경기노회 보류파의 집단행동도 이즈음에 시작되어, 안타깝게도 고신교회 교회쇄신운동은 이 시기에 내적으로 균열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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