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애들아 잘들 있지?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2.01.09|조회수48 목록 댓글 0

애들아 잘들 있지?

1.
22살에 교육전도사가 되었다.
내가 자라난 모 교회 청량리중앙교회에서.
학생 수도 300명이 넘고 교사만도 50명이 넘었던 유년부 교육전도사가 되었었다.
초등학교
그 땐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가 다 유년부였는데
그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한다는 게 미션임파서블이었다.

2.
평생에 그렇게 애타고 간절하게 기도를 한 적은 없었다.
설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아이들도 은혜 받게 해 달라고
아이들이 설교를 듣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이 정말 설교에 은혜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보면 설교하다가도 온 몸에 전율이 흐르곤 했었다.
마치 고압전류에 감전 된 것 같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3.
난 아이들이 좋았다.
82년도에 영락교회 교구 담당 부목사가 되었는데
83년도에 고등부 담당 목사가 사임하면서 나를 고등부를 겸임하게 해서 1년 반 정도 고등부 예배 설교를 하게 되었다.
청량리 중앙교회 때 애타는 기도는 그 때까지도 효력을 발휘?)하여 아이들이 감사하게도 내 설교를 잘 들어 주었다. 설교하다가 감동이 되어 참 울기도 많이 울었었다. 내가 울면 아이들도 울고...
84년도 6월 승동교회 담임목사 청빙을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승동교회 부임하여 목회를 하는데 영락교회 고등부 아이들이 자꾸 생각이 났었다.
담임목사 그만두고 다시 영락교회 고등부 목사가 되고 싶었다. 평생 고등부 설교만 하다 죽어도 좋겠다 싶었다.

4.
88년도에 영락교회에서 협동목회를 하자며 나를 교육부 전체를 책임지는 자리로 불러주었다. 담임목사급 대우를 해주는 파격적인 자리였었다. 영락교회 교육담당 협동목사로 부임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은 교구목사가 교육부를 겸임하던 일을 폐지한 일이었다. 모든 교육부서에 교육만 전담하는 목사를 청빙하게 하였다. 교육은 이일 저일 겸임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요청한 것을 감사하게도 당회가 받아 준 것이었다. 그것은 막대한 예산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모든 부서의 목사를 청빙하였는데 일부러 고등부 목사는 청빙하지 않았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서 다시 꿈과 같이 영락교회 고등부 예배에서 설교를 할 수 있었다. 참 행복한 시간이었다. 고등부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에 실패하여 재수하는 아이들 수 십명이 계속와서 내 설교를 듣곤 하였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위한 반을 만들어 주었다. 이름만 들어서는 무슨 반인지 알지 못하도록 베드로반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 때 열심히 베드로반에 와서 설교를 듣던 아이 중에 바보 의사로 유명한 고 안수현 의사도 있었다.

5.
91년 12월 동안교회 담임목사가 되어 영락교회를 떠났다.
동안교회에 왔을 때 하나님이 주신 소명은 뿌리는 목회였다.
나는 뿌리는 목회가 교육목회라고 생각하였다.
아이들에 포커스를 맞춘 목회를 하려고 노력하였다.
은행 빚 얻어 아이들 방에 에어컨도 달아주고
50명 도 안 되는 청년들을 위해 청년부만 전담하는 부목사도 청빙하고
청년들만을 위한 주일예배도 신설하였다.

6.
어느 날 포니테일을 한 청년이 교회에 왔다.
사내자식이 여자아이처럼 머리를 묶고 온 것이 난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속으로 머리 얌전히 깍고 교회 안 다니는 놈보다 머리 묶고 교회 나온 놈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으로 그 아이를 받아 주었다.
한 달 쯤 지나니 머리 묶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익숙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아내에게 ‘머리 똥그란 자식이 머리 묶고 다니는 것 어울리더라’고 이야기했더니 아내가 ‘당신도 똥그란데 한 번 묶어 보시지?’해서 웃었다.

그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한 후 머리 묶은 자식들이 거짓말 조금 보태서 떼거리로 교회로 오기 시작하였다. 그 놈들도 동안교회가 자기들을 이상한 놈 취급하지 않고 받아 준다는 것을 냄새 맡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더니 머리 묶은 놈들만 아니라 머리 염색한 놈들도 오기 시작하였다.
청년 예배에 오는 아이들이 약 1,600명 정도 될 때였는데 최소한 절반 이상은 머리에 염색하고 오는 놈들이었다.
염색을 하면 복장이 엉망이 된다. 찢어진 바지, 반 바지, 맨 발에 운동화 꺽어 신는 것 다반사고 조리까지 신고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당에 들어오신다.

어느 날 당회 때 장로님 한 분이 나에게 ‘목사님 아이들 야단 좀 치세요. 그 머리 꼴 하고 옷 입고 다니는 꼴 좀 보세요’ 내가 그 장로님에게 웃으며 이렇게 댓구하였다. ‘장로님 흰 머리 까맣게 염색하는 건 되는데 아이들 까만 머리 희게 하는 건 왜 안 된데요?’ 내 기막힌 댓구에 장로님들 모두가 웃고 말았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저러고 교회를 온다고 걱정을 하였지만
난 저러거도 교회를 나와주는 게 어디냐 생각하니 아이들이 기특하고 예쁘기만 하였었다.

7.
높은 뜻 숭의교회 목회할 때도 우리 교회에는 청년들이 많았다.
초창기 때 분석을 해 보았더니 20대와 30대 청년이 출석교인의 67% 였었다.
청년 예배에만 2,000석 예배당이 꽉차서 예배를 드리곤 했었다.
청년들이 작지도 않은 예배당을 꽉 채워서 열정적으로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배가 불렀다.
하루에 설교를 네 번 다섯 번을 해야했는데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청년들 예배가 끝나고 떼지어 내려가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게 내 오락이었다. 장관이었다.

8.
처음 교육전도사 할 때 가르쳤던 아이들은 벌써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되었다.
같이 늙어가는 나이가 되었지만
난 아직도 그 아이들을 만나면 이름을 부른다.
죽기 전에
다는 모이기 어렵겠지만
홈커밍데이처럼 한 번 집회를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9.
애들아 지금 다 어디들 있니?
너희도 나처럼 날 기억하고 있니?
청량리중앙교회, 인천제일교회, 영락교회, 동안교회, 높은 뜻 숭의교회를 다녔던 아이들과 청년들 생각만해도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난다.
잘들 지내지?
예수 잘 믿고 있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