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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과연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2. (뷰티풀랜딩 7)

작성자스티그마|작성시간23.04.02|조회수35 목록 댓글 0

믿음이 과연 죽음을 이길 수 있을까? 2. (뷰티풀랜딩 7)

1.
수술을 받고 항암을 할 때 몸도 많이 힘들었지만 몸보다 더 힘든 것은 마음이었다. 어떻게 마음을 다 잡을 수가 없었다. 우울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화나고...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불안하니 몸도 더 약해질 수 밖에 없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는 날 요양을 하고 있던 남양주 한옥집 거실 소파에 앉아 비가 내리는 창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실 큰 창으로 보이는 앞 산 풍경에 비가 내리는 모습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서 한 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찬송가 하나가 떠 올랐다.
412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라는 찬송이었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그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평화를 주세요.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 주세요.
기도하며 계속해서 고장난 레코드처럼 그 찬송을 작은 소리로 불렀다.
정말 평화가 비처럼 하늘에서 내려와 내 영혼을 덮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느낄 수 있었다.

2.
그 날은 내가 절대로 평안할 수 없는 날이었다.
수술을 받고 첫 ct를 찍었다.
수술로 암을 다 제거하였기 때문에 첫 ct에 문제가 발견될 확률은 높지 않았는데
그 첫 ct가 깨끗하지 못했었다. 수술한 부분에 다시 또 작은 동전만한 뭔가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다시 ct를 찍고 그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었다.

우리 암환자들이 가장 불안하고 심란한 날이 바로 이 날이다. ct 찍고 일 주일 후 그 결과 들으러 병원 가는 날. 그냥 가도 무섭고 심란한 날인데 나는 ct 상에 이상이 발견되어 재촬영을 하고 그 결과를 들으러 가는 날이니 그 날 마음의 평화를 느낀다는 것은 정말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3.
병원엘 가기 전 날기새를 촬영하였다. 그 때는 설교 후에 찬송가를 한 장씩 골라 부를 때였었다. 자꾸 저작권 시비가 걸려서(찬송가는 저작권 문제가 없는데도) 그것을 처리하느라 신경과 시간을 많이 뺏기게 되어 요즘은 찬송을 부르지 않는데 얼마나 억울한지 모른다. 반주도 없이 힘도 없는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에 은혜를 받는 분들도 꽤 있었고 누구보다 내가 좋았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속상하기 짝이 없다.

그 때 촬영하면서 골라 부른 찬송은 440장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이라는 찬송이었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함께 가려네
예수 함께 아니가면 낙없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겁없네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늘 부르던 찬송인데 그 날 따라 새삼스런 깨달음으로 은혜가 되었다.

병원엘 가면 ct의 결과는 둘 중에 하나다.
재발입니다.
재발 아닙니다.

재발입니다 길로 가면 겁나는 것이다.
재발이 아닙니다로 가야만 겁 없는 것이다.
그런데 찬송을 작사한 분은 어디를 가든지 겁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디를 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가느냐 안 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발이 아니라 하여도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낙 없는 것이고
설령 재발이라고 하여도 예수님과 동행하면 겁낼 것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찬송을 부르는데 마음으로 동의가 되었다.
정말 예수님과 함께 동행한다면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다는 마음이 내게도 생겼다.
얼마나 큰 은혜가 되었는지 모른다.

신이 나서
어디를 가든지 겁낼 것 없네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윤동주의 시 중에 초 한 대라는 시가 있다.
예수님을 초 한 대로 비유해서 쓴 시이다.

초한대
내방에 품긴 향내를 맛는다.
光明(광명)의 祭壇(제단)이 문허지기전
나는 깨끗한 祭物(제물)을 보앗다.

염소의 갈비뼈같은 그의 몸
그의 生命(생명)인 心志(심지)까지
白玉(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려 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ㅅ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드시
暗黑(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품긴

祭物(제물)의 偉大(위대)한 香(향)내를 맛보노라.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초 한대처럼 약해 보이고
생명이라는 것이 실오라기 심지에 불과해 보이지만
자기 몸을 불살라 태워 빛을 발하니
어둠이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 창구멍으로 도망해 버렸다는 표현이 참 기막혀서 내가 참 좋아하는 시이다.

그 시가 문득 생각났다.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이라는 찬송을 부르면 부를수록
근심, 걱정, 불안, 두려움, 공포가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철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병원엘 갔다.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4.
다행이 재발이 아니었다.
염증이 생겼다가 가라 앉은 것이라고 하였다.

걱정이 되어 내 곁에 있었던 우리 교회 집사님(그 병원의 위암 전문의)가 너무 다행이라며 기뻐해 주었다. 재발된 것이었으면 많이 어려워지는 상황이었다며 나에게 물었다.

‘병원에 오실 때 많이 불안하셨지요?’
‘아니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우리 집사님 말이 맞는 것이다.
아무리 목사라도 그날 불안도 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날 나는 정말 불안하지 않았다.
불안 한 줄 몰랐다.
나도 그게 신기하다.

믿음이 나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주었는데
그 평안이 죽음을 직면하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정면돌파할 수 있는 힘이 되었고 능력이 되었다.

믿음이 정말 죽음을 이길 수 있느냐?
누가 묻는다면 나는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내가 증인이라고 당당하게 말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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