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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작성자유지경성|작성시간19.12.21|조회수114 목록 댓글 4



주식 시장의 투자자에게 딱 맞는 얘기 같다.

필자는 1990년에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6개월정도 회사를 다니다 바로 사업을 시작했다. 산전수전 겪으면서 서울 충무로에 기업체 제품 광고사진과 연예인(그시절 서00와아이들, 이0우, 영0스클럽, 김0호 등등) 및 유명인들을 촬영하는 Commercial Photo Studio와  Design사무실을 운영하고 이 업계에서 활발한 활동을하는 Pro Photographer였다.
그러나 1997년 IMF가 왔고, 이듬해인 1998년에 본격적인 시련을 겪게 되었다.('영화 국가부도의날' 참고하길...)
그동안 일해주고 받지 못한 돈 약 5억원정도. 그때는 외상, 당좌수표, 어음발행이 일반적인 시대였다.
개인은 야반도주하였고 기업체는 촬영비를 받지 못하여 민사소송을 하였다.
변호사 살돈이 없어 직접 소송을 진행했는데 꼼꼼한 성격이라 증거는 확실해서 승률100%. 하도 많이해서 민사관련 소송 도사가 되었다.
승소판결문만 받으면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민사는 상대가 재산이 없으면 별 볼일 없음을 깨달았다. 재산 빼돌리는 수법도 여러가지였다. 소송으로 세월을 보내는 와중에 돌파구를 찾던 중 밤에는 청담동 프00호텔 비즈니스 룸싸롱에서 대리운전을 하였다. 이유는 거기에 출입하는 이들이 연예인, 재력가들이라 명함을 주면서 일감도 연결하고 싶고 용돈도 벌기 위해서였다.
대리운전(그때는 대리운전이 귀해서 짭짤했다. 강남에서 강남 이동하는데 3만원~10만원 받았다 - 시세의원리)을 하면서 그곳에서 신세계인 주식을 알게 되었고, 드나드는 펀드매니저와 회사관계자의 대리운전을 하면서 작전주 정보를 듣게 되었고 청ㅇ디지털 주식을 매수(그때는 증권사에 전광판이 있었고 전화로 주문을 하고 공중전화로 시세를 확인했다.)해서 수익을 낼수 있었다. 초보자의 행운이었던 것이다. 주식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대다수 개미들과 마찬가지로 서점에 있는 책 몇권 ('나는주식투자로 16억을벌었다' 단타로 매일 40만원을 번다는 내용의책. 지은이 최0식)읽고 힘들이지 않고 주식으로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환상에 사기충천 자신감에 넘쳐서, 웃기는 얘기지만 삼성노트북 윈도우95로 초단타 데이트레이딩을 하기 시작했다가 깡통을 찼다.
다시 돈을 구해와 작전주, 급등주, 상폐직전 관리종목 따라 다니다가 또 깡통.
다시 돈을 빌려서 원금회복을 빨리하고자 급한마음에 마지막으로 파생상품인 선물,옵션까지 투자하게 되었고 선물투자하다 증거금이 모자라 옵션에 손댔다.
2001년 911테러 때는 풋옵션에서하루만에 500배 수익이 났다는 기사를 보고 더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기억은 가물가물한데 2002년 쯤 삼성전자가 상한가 치던 날이 있는데 1주일 사이에 옵션에 200만원 투자하여 10배정도 먹고 그맛을 잊지못해 콜.풋옵션 매수에 매달리다가 깡통을 찼다. 2000년 부터 2002년까지 가족 및 대출받아서 잃어버린 돈은 약 1억5천만원 정도.
기업의 재무제표는 살펴보지도 않고 오로지 주가의 등락만 보고 단타만 쳤다. 정신은 피폐해지고 점점 컴퓨터의 좀비가 되어갔다. 그리고 다시 계좌는 10원 한푼 없는 깡통이 되었다.
허무했다. 그러나 자살등 극단적인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후 애 엄마한테 뭔가를 보여줘야 했기에 인력사무소를 찾아가서 매일 새로운 노동현장(전문용어로 노가다)을 철새처럼 다니다가 강남 역삼동 충현교회 근처 고려대 교수님집 신축공사장에서 일당 받으면서 고정으로 일하게 되었다. 내 집 짓는 것 같이  열심히 노가다 하다 보니 집주인이 잘 봤는지 공사가 마무리된 후 시공사에는 잔금을 치루지 않으면서도 필자를 역삼동 고급 한정식으로 부부가 불러 식사대접을 해 주고 "고맙다"면서 빳빳한 현금 100만원(단언컨데 노동현장에서 이런 일은 희박하리라 본다) 봉투를 건네 주었다.
그리고 건설현장 소장과 인연이 되어 종합건설 및 하자유지보수업체 이사로 가면서 건설의 건자도 모르는 필자를 추천하여 1군건설회사(삼성, 현대, 대림, 롯데건설...)의 협력업체  하자유지보수 팀장으로 발탁되어 회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사 견적서 작성시 꼭 필요한 엑셀프로그램도 몰라 여직원에게 물어 보기를 수십차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밤새가며 독학으로 터득하였다. 회사 사장은 못마당 해 했다. 팀장이라는 자가 수염은 길렀지 도면 볼 줄도 모르지 , 견적서를 작성 할줄도 모르지, 하자유지보수관련 지식과 기술도 없지...
눈치를 보면서 쉽게 설명되어 있는 고등학교 건축 관련 책자 및 기술서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사장실에 불려가 직원들 앞에서 "0실장 식사했나?" 라고 묻기에 "네" 라고 하니까 "밥이 목구멍에 넘어 가던가?" 라는 말로 돌아왔다.
한마디로 그만 두라는 말이다. 비참하고 굴욕적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나는 내 자신을 잘 알기에.
성격은 낙천적이고 행동은 느리나 어떤일이든 하면 끝까지 해보는 끈기가 있고, 모든 일에 있어 처음은 남들보다 느리지만 일정시간이 지나면 남보다 앞서가 느린게 빠르다는 것을 잘 알기에.
새로운 분야라 다른직원 퇴근후 회사에서스스로 밤새며 공부하기를 6개월.
일당백의 전사로 거듭났다.
혼자서 밑에 직원 한명 없었다.
직원이라고는 신축 아파트건설 현장 파견소장 10명 정도에 각 소장 1명에 딸린 노동자 각 15명 정도를 관리하면서 기성금(공사 중간에 공사가 이루어진 만큼 계산하여 주는 돈)을 월 10억~15억 정도 받는 일을 혼자서 척척 해냈다. 혼자 하다보니 허구한 날 밤새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월급을 더주는 것도 아니었지만 즐거웠다. 견적서작성, 입찰현장설명회 참석, 현장방문 관리, 공무,공사과장 면담. 공사도면에 기성고조서작성. 하루가 금방갔다.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권위를 내려놓고 현장 말단 일꾼과 허심 탄회하게 식사를 하다가 결핵에 걸리기도 하는 등 노력을 한결과 다른부서에서 해결하지 못하는건설현장의 민원들을 매끄럽게 해결해 나갔다.
영업이익 마진은 50% ~ 70% 남의 가려운데 긁어주는 하자 보수라 마진이 좋았다. 종합건설 부서에는 1급 건축사 직원이 많았지만 적자를 보기 일쑤였다.
언제부터인지 경리부서도 사장도 필자의 기성금 받아 내는 것에 목메기 시작했고 드디어 인정을 받았지만, 사장의 욕심으로 건축시행 한답시고 알짜회사를 필자가 입사한 2년 후 부도를 냈다.
퇴사 후  오토바이 탈줄도 몰랐었는데 B00치킨 배달하다 다치고, 이혼하면서 역삼동에 있는 집 전세보증금 전처에게 몽땅 주고 다시 무일푼 빈털털이로...
장사를 하려면 1000만원이 필요했고 남이 꺼려하는 일을 하면 일자리를 구할수 있을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고 방배동 코00마트에서 김장철에 자리가 났기에(후에 알았지만 김장철에는 배달원이 힘들어서 그만 둔다) 배추배달, 생수배달을 하였다. 방배역 근처 주택가는 그 당시에는 낙후되어 5층 건물도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연탄배달(학창시절 부모님이 연탄가게를 했을 때 방과후에 도와 드렸다.)과 노가다 현장의 언땅 곡궹이로 파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오토바이를 타면서 눈뜨고 졸면서 운전하고 다닐 정도였다. 윌급은 많이 줬다. 12시간 일하고 밥주고 210만원. 오토바이 배달해서 종자돈 1000만원 만들어 2010년부터 길바닥 노점에서, 생활용품(일명 천냥 - 다0소에서 파는 천원짜리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비록 길바닥 장사지만 남들은 1000원짜리 위주로 팔지만 필자는 10만원이 넘는 전자제품(효도라디오, 블루투스 스피커)까지 팔았다.
비싼제품은 안팔린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예를들면 가위를 파는 박스에는 1000원짜리 부터 만원이 넘는 도루0까지 팔았다. 그리고 연관 제품을 한박스에 진열하여 예를 들어 찜기를 팔때 찜기 펼친 위에 삼베보자기를 올려놓고 주위에 나무목기를 진열하였다. 플라스틱 네모난 박스에는 여러 물건이 겹치지않고 한눈에 보이게 진열하였다. 그리고 남들은 먼지 묻는다고 비닐봉투 있는 채로 팔지만 확인하고 만지고자하는 인간의 심리를 알기에 제품 포장을 과감히 개봉해서 팔았다.
그랬더니 오신 손님들이 천원짜리 사러왔다가 갸우뚱하면서도 만원을 넘게 사서 들고갔다. 남들은 길 바닥에서 파는데 얼마나 팔겠어 하겠지만 하루 적게는 50만원에서 150만원을 팔았다.
구청 단속도 당해가면서 6년여 장사를 하였다. 노방이라 얼굴은 새까맣고 갑자기 소나기가 오면 생쥐신세가 되고 인터넷 상거래로 매출이 하락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다시 2015년 하반기부터 현재까지 업종을 변경하여 아파트 알뜰장에서 매일 이동하면서 항아리에 숙성시킨 돼지갈비, 닭갈비를 현장에서 판매하고  있다.
물론 맛나니까 한번 먹어본 단골들이 꾸준히 애용한다. 알뜰시장에서는 경기를 제일먼저 피부로 느낀다. 지금 현재 경기는 최고 바닥이다. 가게들도 대부분 장사들이 안된다. 서민들이 정치, 경제가 불안해서 돈을 쓰지 않는다.
깡통을 찬 이후 뼈저리게 느끼고, 주식은 관심만 갖고 책읽고 경제 공부하고 일을 해서 번돈으로 적금넣고, 보험회사에 변액연금 넣고, 증권사 권유 펀드넣고 다했는데 결과는 10년을 30만원씩 넣은 보험회사는 잔고가 원금의 95%로 -5%, 증권사는 그나마 직접 체크하고 주가 빠질때 위주로 적립금 넣어서 수익을 3년간 30% 정도 냈는데 중개수수료, 펀드매니져 수수료로 연2.5% 차감해 갔다.
장사를 하여 10년 이상 아끼고 절약하여 종자돈 1억을 모았고, 기회를 보던 중 어느날 우연히 MBC라디오에서 '이진우의 손에잡히는경제' 에서 존리대표님의 강의를 듣게 되었고 유튜브에서 가치투자를 관심을 갖고 보던중 부자아빠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귀가 번쩍!! 15년 내에 동네 100억동네부자 되자는 꿈을 갖게 되었다.
부자아빠님은 너무 양심적(회원 1년씩 끊지말고 1개월만 검증해 봐라)이고 진솔하고 모든 말씀이 너무 와 닿아 필자는 멘토 및 롤모델로 인생2막을 설계하고 있다.
지금은 매일 장사해서 번돈을 조금씩 투입하면서 투자하고 있다.
미수, 몰빵의 무서움을 뼈져리게 겪고 알기에 여러종목에 분산하여  비중 지켜서씨 뿌린다고 다짐했는데 아직도 공부가 안되어서 비중 조절도 안되고 기타 등등 모자람의 투성이다.
한가지 VIP회원(2019년 12월18일 가입)되기 전에 부자아빠님께 배운것은 폭락시에 골파진 곳에 씨 뿌려라, 급락은 금락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018년 10월 미중무역전쟁으로 폭락시, 한일경제전쟁으로 2019년 7월, 8월 폭락시에도 수익실현 한것 빼고 한주도 매도하지 않고 매수를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산전, 수전, 공중전을 경험하신 멘토(부자아빠님)로부터 간접 경험을 배우고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 들의 책을 읽으면서 본받으려고 노력중입니다.
주식시장은 멘토의 말을 안듣고 자기의 고집대로 하면 절대로 돈을벌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이곳에서 부자아빠님과 고수선배님들을 따르면서 둥지를 틀고자 합니다.

실패의 경험은 큰 지혜를 주고 깨달음을 주었기에 회개하는 마음으로 두서없이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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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이선 | 작성시간 19.12.22 희망을 안고 부자아빠 말씀에 귀 쫑긋 하면서 공부 하면 좋은 날이 오겠죠.
  • 작성자김금산 | 작성시간 19.12.22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고 계시니 곧 좋은 날이 올것 같습니다
  • 작성자김인석 | 작성시간 19.12.22 화이팅
  • 작성자행복한부자~J | 작성시간 19.12.29 모래밭에 굴러도 쌀알을 찾아 내실 분이네요. 응원합니다. 행복한 부자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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