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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작가론

유영교

작성자희망|작성시간11.11.17|조회수803 목록 댓글 0

대전시 유성구 도룡동 397-10

유 영 교 (1946~2006)

 

1946 충북 제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조소과 졸업

로마 미술아카데미 졸업

1999 ~ 현재 목원대학교겸임교수

1997 ~ 1999 목원대학교대학원강사

1989 ~ 1991 충남대학교대학원조소과강사

1987 ~ 1989 홍익대학교조소과강사

1983 서울교육대학미술과강사

1983 목원대학교대학원조소전공 강사

1977 ~ 1981 국전추천작가

1972 ~ 1977 서울,명지중.고등학교교사

1969 서울,동구여자중.고등학교교사

1976. . 국전특선

1975. . 국전특선

1974. . 제23회 국전국회의장상 문공부

1974. . 목우회공모전최고상

1973. . 제22회 국전국무총리상 문공부

1973. . 목우회공모전문공부장관상

1972. . 목우회공모전동아일보사장상

1968. . 국전입선

1967. . 국전입선

1966. . 국전입선

 

 

유영교 선생님은 충북 제천 출신의 대학선배님으로 지난 2006년 담도암으로 별세하셨다.

늘 돌에 일관하셨던 분이 돌아가시기 7여년 전부터 작품이 급격하게 변모하였고, 다양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50대 후반의 유영교 선생님의 얼굴이 눈에 선한데 벌써 5년이나 지났다.

 

 

 

 

 

 

 

 

 

 

 

 

 

 

 

 

 

 

 

 

 

 

 

 

 

 

 

 

 

 

 

 

 

 

 

 

 

 

 

 

 

 

 

 

 

 

 

 

 

 

 

 

 

 

 

 

 

 

 

 

 

 

유영교 선생님의 열정적인 작업들이 후학들에게 미친영향을 생각하면, 힘든일을 하기 싫어하는 현대 조각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겼다.

선생님은 이태리 유학파 조각 1세대로 이후 많은 작가들이 현재까지 이태리에서 많은 조각연구를 하게 되었다.

 

 

 

 

 

 

 

 

 

 

 

 

 

 

 

 

 

 

 


유영교의 조각

(1946~2006, 충북 제천)

 

유영교는 충북 제천 출신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구상 조각가이.

충북 제천시 청풍면에서 어머니 정효옥과 아버지 유상종의 2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이면 굵고 둥근 돌이 강변에 펼쳐진 강가에서 하루 종일 놀았다.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강아지를 부르면 보리밭을 가르면서 달려오는 강아지의 기억을 훗날 자주 말한다.

충주고교에 다닐 때 미술반이 없어서 석고를 사다놓고 독학으로 데생 공부를 하였다.

1964년 홍대 건축과에 응시하였으나 두 번의 도전 끝에 제2지망으로 선택한 조각과에 합격하였다. 학교에 입학하여 전뢰진의 석조수업을 좋아하였으며 이후로 꾸준히 석조에 전념하였다.

1976년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원 동기 이은기와 결혼하였으며, 2년 뒤에 이탈리아 로마 국립미술대학에 입학하였다.

1981년에는 이탈리아 북서쪽의 카라라 지역이 석조하기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그 곳으로 이사를 간다. 그곳에서 석고 모형을 돌로 옮겨 제작하는 뿐다 기법과 모형을 확대하는 컴퍼스 기법을 익혀 사용하였다.

 

평생을 오랫동안 돌 작업에 일관하다가 2006년 초여름에 60세를 일기로 일찍 생을 마감하였다. 원인은 담도 암이었다.

 

홍대 조소과를 나와 이탈리아 국립로마미술아카데미와 세계적인 채석장들이 모여 있는 카라라 지방으로 맨 처음 유학을 하였고 작가로 활동하였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 유영교는 우선 새로운 재료와의 만남을 경험했는데,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세계의 아름다운 돌과의 만남이 그것이다.

유영교가 처음으로 이태리 유학한 이후로 한국의 많은 작가들이 현재까지 이태리에서 유학이나 작품 활동을 하면서 조각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1978년 이탈리아 로마국립미술아카데미에서 에밀리오 그레코 교수 밑에서 조각을 배우면서 이탈리아 조각가들의 뛰어난 작품들을 직접보고 연구하면서 자신의 작품세계를 가다듬었다. 이후로 80년 초반에 잠시 귀국하여 서울교대와 목원대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8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왕래면서 작업을 하였고, 이 기간에 이탈리아 국립로마미술학교 조소 과정을 마쳤다. . 그 뒤로 귀국하여 1988년부터 3년간 홍익대학교에서 석조를 가르쳤으며, 이후로 충남대와 목원대 강의를 오랫동안 이어갔다.

 

그의 열정적인 작업들이 후학들에게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기 싫어하는 현대 조각가들에게 많은 교훈을 남긴다.

그의 조각은 인간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탈리아에 머무는 동안에 세계의 아름다운 돌에 빠졌던 유영교는 다음 해에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은 19795월에 로마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개인전을 아스트롤라비오 아르테 화랑에서, 현지 미술 평론가와 미술애호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호평을 불러일으켰다. 이 전시에서 로마의 미술평론가 산드라 지아나타시오는 유영교를 보기 드물게 세련된 조각가라고 평가하였으며, 그의 작품에는 명상과 깊은 신비의 세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였다.

 

로마의 유학생활은 그의 시야를 한국에서 세계로 확대시킨 계기가 되었으며 그러한 변화를 볼 수 있다. 영교는 온갖 양식이 범람하는 속에서도 자신의 작품들을 어떤 작가들보다 자기 체질에 알맞게 다루었다.

 

유영교가 다루는 인간의 이야기들은 역사, 진리, 종교의 세계에서 찾아진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를 보여 준다는 것이며, 지난날의 가치와 규범과 역사 속에서 특히 그것들을 재해석함으로써 가능하기에 지난날의 텍스트를 통해서 현재를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또 그러할 때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는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여 최소의 표현으로 최대의 효과에 도달하였다.

특히 그의 돌조각은 감각적인 질감의 표현에서 양감의 효율적인 효과에 이르기 까지 깊은 인간애로 표현하였다.

 

가족시리즈는 부드럽고 풍만한 인체의 볼륨과 곡선으로 표현하였고, 대중적인 포근하고 모나지 않은 내면의 평온상태를 나타낸다. 모자상의 연장선에서 서정적이고 단순화된 조형을 추구한 ()시리즈를 20년간 선보인다. 그가 추상조각과 전위적인 미술이 유행하던 시대에도 구상성을 버리지 않았던 이유는 의미 없는 형태 추구가 아닌 일상의 삶과 그 주변에서 파생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들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정다운 감정을 전달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은 형태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관람자와의 내적인 교류를 의미하는 것이다.

 

1986년에 모처럼 한국에 돌아와 조각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이 전시는 그의 조각의 특징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시가 되는데, 특징을 세 가지로 언급하자면, 첫 번째는 조각이 하나의 덩어리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몇 개의 그룹으로 만들어서 집단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이 집단화된 표현은 주로 가족을 대상으로 만든 입상·좌상과·와상 같은 인체의 여러 가지 다양한 자세의 표현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극화된 집단적인 분위기는 또 다른 조각예술의 흥미를 갖게 한다.

두 번째는 두 개 이상의 주제를 하나의 덩어리로 집약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전체와 부분, 부분과 전체로 잘 조화되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단일조각으로서 그의 체질인 내적인 힘의 결집이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그의 접근방법은 특히 역사적 의의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데 특징이 있다. 그의 태도와 방법은 우리의 전통적 도상학에 기인한 철저하게 회고주의를 작품에 근접시키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탑파와 불상, 민예품과 신상, 망부석과 전설을 그린 민화의 제 양식을 모범으로 삼아 이것들에 의해 삶의 이야기를 번안하고자 한다. 번안에 의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갖는 원형이 재검토되고 재창조될 뿐만 아니라 유영교의 독창성이 이 과정 중에서 드러나기에 이른다.’

 

옛날의 불상이나 선승상 혹은 고려청자의 형태감에서 맛볼 수 있는 감정 세계를 현대적으로 다시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 점에서 그는 전통 가치가 무엇인가 분명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재료에서 다듬기 어려운 화강암이나 주변에서 얻기 쉬운 잡석까지 활용하고 있어, 옛날 석공들의 연마과정을 습득하려고 애쓰는 성실함이 나타난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종교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는데, 불교의 형상과 우리나라의 전통 소재를 서양의 기독교 미술과 신전, 우상 등을 접목시켜 다분히 종교적인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청동반가사유상, 연화문 등 일련의 불교적 텍스트들이 등장한다. 여기에는 따뜻하고 푸근한 감정 뿐 아니라 욕망의 갈등과 수행의 과정을 통해 해탈한 인간 모습도 담겨 있다. 그의 작품에서 동자나 구도자, 베드로, 욥 등의 인물은 평범함 속에서 삶과 자연에 순응하는 것으로 그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적절히 추상적 기법을 구사하면서, 서양적 양감이나 운동감의 관심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곡선미가 빚어내는 은은한 내면적 생명의 발산에로 모여진 형상화이다. 그는 이처럼 기독교, 불교 등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에서 얻은 모티브를 바탕으로 제작했으며, 그러한 작품들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정신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작품에 따라 불교적 관점으로 보면 불교 분위기가, 그리고 기독교적 관점으로 보면 기독교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있다.

이것은 특정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예술세계의 범주를 제한시키지 않으려는 배려라고 판단된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항구적인 역사적 절대치로서의 조각적 진리이며 따라서 실험과 모험에 의한 새로움의 탐구보다는 역사적 진실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성실성이 중요시된다.

 

단순하고 원만한 형태의 모자상여인상등의 가족시리즈와 베드로,구도자와 같은 종교 주제의 구상적인 돌조각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 준다는 측면에서 그의 조각사를 동질적으로 규정짓는다. 지난날의 역사 속에서 그것들을 재해석함으로서 현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 주제의 단순한 그의 조각은 최태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영교의 작품은 부드럽고 풍만한 인체의 볼륨과 곡선을 통해 삶의 궁극적인 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유미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또 그 속에서 삶의 기쁨을 찾는 다는 의미에서 낙천주의자임에 분명하다.’

 

그의 예술세계는 부르델적인 외부로 확산되는 약동감이 아니라 마이욜적인 내부로 침투하는 집착력이 강하다.

유영교의 조형언어가 형성된 60년 말부터 '움직이는 조각'으로 변화되기까지, 30여 년간 계속된 그의 작업은 내용과 형식면에서 최종태의 인체조각과 같은 단순미와 자기의 삶의 태도가 반영된 구상조각의 맥을 이어왔으며, 재료 면에서는 국내 석조각의 개척자인 전뢰진의 영향으로 서정적인 구상세계를 돌로 표현하는 작가로 자리 잡았다.

자연석과 화강암, 대리석 등 각기 다른 다양한 돌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조각하는 뛰어난 기술로 만든 작품은 미술계와 대중들 사이에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의 작업에서는 변함없는 단순한 형태 속에서 은은한 내재율을 느끼게 한다.

가능한 한 생략하며 간략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그의 조형성은 단순미가 돋보인다.

 

단순화된 형태는 물질과 정신을 극복한 조각가 유영교의 조각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렇게 생략된 조형언어는 처음부터 인물을 단순화시키며 따뜻한 느낌의 모자상과 여인상, 부부, 자매 등의 가족시리즈를 꾸준히 다루어 왔다.

 

이탈리아 평론가 루이지 탈라리코는 유영교 조각전을 보고 유영교의 독자적인 조형능력에 대하여 핵심적인 형태상의 순수함을 위해서 대상의 외관형태 기준도 무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단순화된 형태 안에서 신비스런 상징성을 자신의 작품에 펼치고 있는 이 전시회에 대해서 우리는 이 작품들이 보여주고 있는 놀랍고도 핵심적인 변형은 하나의 빛난 업적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한편 산드라 지아나타시오는 유영교의 이러한 단순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모뉴멘탈한 특성과 풍부한 감정을 주는 생명력 있고 단순화된 힘찬 표현 등에서 볼 때 그의 집요한 작품세계에서는 아르카이즘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을 매우 명상적이며 깊은 신비의 세계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다.

 

유영교는 부단히 노력하는 집념의 작가다. 평생 전업 작가로 살았던 그는 매일 아침 작업장에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오는 성실함을 보여주었고, 그 차가운 돌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60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살았음에도 수많은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그의 작품에서 형상화된 구도자의 삶을 몸소 실천한 결과라 여겨진다.

유영교의 작업은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모형에서 돌로 옮겨지기까지의 작업은 과학적이며 참으로 정교하다. 그러면서 그는 프로정신에 입각한 엄청난 노동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업장에서 지게차나 할석기 같은 엄청난 규모의 돌 공장처럼 설비를 갖추고 돌을 조각하였다.

고운 여인상은 이탈리아 대리석으로 곱게 갈아 만들고, 풋풋한 모자상은 옅은 대리석을 쪼고 갈아 다듬었다.

유영교가 전통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었음은 그의 석사학위논문이 조선시대 왕릉의 석인석수조각 연구였다는 사실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전통에 대한 애정은 그의 작품 곳곳에 현대적으로 구현되어 있다.

전통미술에 대한 유영교의 관심은 우리의 것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국보다 이탈리아 유학을 선택한 사실에서도 전통에 대한 그의 선호가 드러나는데, 그는 이탈리아 전통 중에서도 선별적으로 수용했다. 이탈리아 조각의 전통이라면 흔히 미켈란젤로와 베르니니가 떠오르지만, 유영교는 이 대가들의 인물상의 특징이 되는 근육적인 인체표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조각 전반에서 감지되는 고졸한 분위기는 오히려 중세 말의 조각을 연상시킨다.

그는 유학 중 실제로 세계적인 구상조각가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그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도전과제에 직면했다. 그의 지도교수였던 홧찌니는 그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구상에 기반해 있다고 지적하였다. 추상적인 작업을 하더라도 구체적인 형태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형태를 단순화시킨 것은 사물이나 사건을 서사적이 아니라 시적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며, 궁극적으로 형태상의 유희가 아닌 정신적인 울림을 줄 수 있는 언어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시대와 장소를 넘어선 내적인 울림과 정신적인 소통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내적인 의미추구는 유영교가 끊임없이 천착한 문제로 주로 종교적인 테마를 다룬 작품에서 두드러진다. 그가 종교적인 테마에서 다룬 주제는 인간 내면의 갈등과 그 갈등을 넘어서려는 투쟁과 명상의 모습들이다. 천사와 싸움 끝에 결국 약속의 땅에 진입할 수 있었던 야곱을 나타낸 천신과 싸우는 야곱(도판 ), 갖은 고초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매달린 (도판 )은 작가 개인의 간절한 매달림을 대변한다. 또한 그가 즐겨 다룬 구도자(도판 )는 겉으로는 평정해 보이지만 실은 갈등의 연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극복하고자 한 것은 바로 갈등의 근원인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

그의 욕망과 갈등은 투쟁이나 고행의 이미지로 때로는 그것을 넘어선 해탈의 이미지로 표현되어 내적인 의미추구와 정신적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의 돌조각은 감각적인 질감의 표출에서부터 볼륨의 효율적인 효과에 이르기 까지 인간애로 충만하고 있다. 따라서 유영교의 작품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의 인간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휴머니즘이고 그러한 휴머니즘을 돌이라는 본질을 통해서 정착시키고 있다.’

 

그가 구상을 고집하는 이유는 그의 조각이 인간에 관한 이야기이며 삶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석조 조각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그가 표현하는 인물들은 강한 볼륨감 보다는 납작한 얼굴의 형태로 대체로 평평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물의 머리에서나 반추상적인 작품에서 구나 늘려진 구 형태가 자주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가능한 한 군더더기로서의 설명을 생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미가 돋보이며, 그러한 단순성으로 내면에 차분한 울림을 갖게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의 형태는 담백하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도식화된 단순한 형태의 조각은 그의 작업방식과도 관련성이 있어 보인다.

그는 전동공구나 에어공구를 주로 사용하여 많은 양의 인물상을 기하학적인 양식으로 제작한다. 그렇지만 마지막 공정은 건식 연마석을 이용하여 부드러운 볼륨감을 표현하고 있다.

초기의 그의 작품에서 인체들은 쓰다듬고 만지고 싶은 충동을 주었다면, 이후의 작품에서는 종교적 색채의 작품이 드러난다.

 

종교적 도상들을 통해 정갈한 영혼의 이미지를 형상화해온 그는 종교적 도상들을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조형화하고 있다. 통일신라 반가사유상이라는 정통 도상학을 차용했으나 형태의 간결미와 단순미로 전통미감을 독자적인 기법으로 구현해 종교적이되 한국적인 이미지를 창출했다.

동양의 선사상이나 서양의 기독교, 동양의 불교 사상들이 맑은 동심과 함께 종교심과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그에게 종교는 내면의 평정에 대한 갈망이나 삶의 본연적 세계를 회복한 휴머니티, 세계에 참여하는 주인공으로서 인간 확립의 필요성 등을 표현한다.

 

그는 인간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보다 영원한 보편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주변에서 일시적으로 논의되는 주제나 한계를 언제나 극복하고 있다. 유영교는 이러한 고민을 하며 내용과 감정을 자신의 작품 속에 담아왔다.’

 

즐겨 사용하는 대리석은 이탈리아의 흰색 대리석과 핑크색의 대리석을 많이 사용하였고, 붉은색이나 검은색의 돌도 사용하였다.

불교적 형상이나 문무인석 과 같은 한국 고유의 석물 조각에서 소재를 차용하기도 하였으며, 서양 미술에서 기독교 소재나 도상을 유기적 환원적 형태와 접목시켜 보편적 정서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1990년 후반부터는 철판을 용접하여 움직이는 거대한 공공미술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식물을 형상화한 하기도 하고 채색을 입혀 새로운 작품에 도전하기도 한다.

작품의 급격한 변화에 대하여 그의 부인은 다음과 같이 회고 한다.

 

새로운 것을 하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다. 수많은 국제전을 보고 다니고, 현대조각의 역사를 열심히 읽어댔다. 옆에 있는 내가 보기엔 자신을 벼랑에 몰아 놓은 듯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익숙한 돌 작업을 옆에 밀어놓고 철을 용접하여 움직이는 조각을 시도하였다. 형태 또한 기하학적이어서 이전의 구상조각과는 전혀 다른 작품들이었다.

 

작가 스스로도 당황스럽게 느끼고 있고, 중년의 모험으로 칭한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한 작가가 하나의 경향을 가지고 한 가지 범주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게 무의미하다고 주장하려는 지도 모른다.’

 

이러한 작업들은 전에 하였던 촉각적인 돌 작업에 비하면, 조형상의 불연속성이 현저하다. 형태 또한 기하학적이어서 그 전에 추구하였던 구상작업들과는 완연히 다른 작품들이다. 이러한 변화에 작가는 스스로 조각의 영역을 확장해 가고자 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인체 형상의 돌 조각에서는 관람자가 보고 즐기는 편안하고 쉬운 형태를 추구하였으며, 생활 속에 살아있는 작품을 하고 싶어 하였다.

그는 30년간 인체 형상의 돌조각에 대한 노력의 결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정적 구상조각가로 자리를 잡았다.

신체의 재현은 그 예술가의 창의성을 떠나 전통적 표현방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고민 끝에 유영교의 조각 작품들은 움직임으로써 그동안 고수해 오던 형상성의 조각에서 벗어나 그 모습이 변한다.

이 변화는 촉각적인 돌조각과는 달리 시각적이다. 또한 이전의 작품들에서는 불변하는 영원한 가치, 즉 관념을 형상화한 반면, 철조에서는 변화하는 현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작과 자연석 조형물 은 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에 구멍을 뚫고 모터를 설치하여 실제로 샘처럼 물이 솟아오르게 만든 것이다. 돌의 물성을 살리면서 돌의 표면만 깎아 같은 돌에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리즈에 사용된 청오석들은 연구자의 부친이 개발하였던 해남 옥천의 채석장 석산에 노출된 호박돌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조각한 것이다.

 

2000년 갤러리 현대의 전시회에서는 시리즈에 무용을 결합하여 조각과 무용이 함께 어우러지는 종합적인 예술을 시도하였으며, 200510월에는 복원된 청계천 물 위에 100개의 고추잠자리의 움직임을 형상화하여 만든 작품 에어 조이(Air Joy)를 통해 공공미술에서 키네틱아트(kinetic Art)를 실현시켜 움직이는 조각을 설치한 바 있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작고한 2006년까지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구상 돌조각은 급격한 전환을 하며 움직이는 대규모 추상 철재조각과 자연석에 흐르는 물로 구성된 으로 이어졌다. 바람에 의해 움직이는 철재조각과 기계 메커니즘에 의해 순환하는 물은 단단한 돌에 생명력을 불어 넣었으며, 인공과 자연의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유영교의 조각을 살펴봄으로서 보편적인 인간이 지닌 유연하고 풍만한 인체의 양감을 통해 받을 수 있는 느낌은 관용과 달관의 정신이며, 세상과 인간에게로 향한 넉넉함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창조적 세계는 전통적 방법으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지 혹은 얼마나 새로운 방법을 창안하였는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정직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계의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가에 의해 가늠된다고 하겠다.

 

 

 

 

 

 

 

 

 

 

 

 

 

 

 

 

 

 

劉永敎, 1946~2006612

 

학력

1969년 홍익대학교 조소 학사

1976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

1978-1984년 이탈리아 국립로마미술학교 조소 디플로마

 

기관 경력

1969년 동구여자중고등학교 교사

1972-1977년 명지중고등학교 교사

1977-1981년 전 추천작가

1978-1984년 이탈리아 국립로마미술아카데미 에밀리오 그레코, 펠리클레 홧찌니에게 사사

1983년 서울교육대학 미술과 강사

1983년 목원대학교 대학원 조소전공 강사

1987-1989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강사

1989-1991년 충남대학교 대학원 조소과 강사

1996-1998년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아미치회 회원

한국전업미술가협회 회원

한국미술협회 회원

가톨릭미술가회

1997-1999년 목원대학교 대학원 강사

1999-2006년 목원대학교 겸임교수

정부 제3청사, 대전 신시청사 조형물 작가선정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동아미술대전, MBC 한국구상조소대전 심사위원

강원도전, 충남도전, 충북도전, 전북도전, 전남도전 심사위원

대전시전 심사위원

 

전시

1972, 홍익조소회전, 신문회관

1972-1974, 목우회 공모전, 국립현대미술관

1974, 개관기념 초대전, 미술회관

1974, 한국현대 조소 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74-현재, 홍익조소회전

1975, 1회 전국 조각가 초대전, 미술회관

1976, 한국구상조소회전

1976, 목우회 초대전, 미술회관

1977, 현대 조소 초대전, 국립중앙극장

1977-1988, 한국구상조소회전, 모인 화랑

1977-1981, 국전 초대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1977713-19, 1회 개인전, 미술회관

197877-14, 2회 개인전, 진화랑

1979, 평론가 10인이 추천한 신예작가 초대전

1980, 한국 구상조소회 로마전, 로마라고티니아나 화랑

1980, 현대 조소 야외전, 신라호텔

198058-22, 3회 개인전, 로마Astrolabio d`Arte

1980102-9, 4회 개인전, 진 화랑

1981, 국제 청년작가 야외 조소전, 밀라노Fondazione Pagani

1982, 재외작가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2, 베르실리아의 조소, Pietrasanta Villa Versiliana

198232-20, 5회 개인전, Galleria Pagani

19831018-27, 6회 개인전, 현대 화랑

1984, 한국 인체 조소전, 호암 미술관

1984, 在伊 한국 조각가전, Galleria S. Marco

1984, ·불 조각가 교류전, Camaiore

1984, 한국 조각가 13인전, Pietrasanta Chiostro Di S.Agostino

1984-현재,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 토스카넬로의 조소전, Pontassiare

1985, 국제 청년 조각가전, Massa Castello-Malaspina

1985, 在伊 한국 조각가 15인전, 선 화랑

1986, MASSA 국제 조소전, Massa Castello-Malaspina

198621-12, 7회 개인전, 현대 화랑

19861022-31, 8회 개인전 현대 화랑, 한국 미술관

1987, 한국조각가협회전, 미술회관

1987, 재불 한국조각가전, Pietrasabta Cebtri Culturale Luigi Russo

1987, 재불 한국조각가 초대전, 현대 갤러리

1987, 개원기념초대전, 이태리 문화원

1987, 원로 중진 조소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8, 한국현대미술전, 국립현대미술관

1988, 현대 조소 초대전, 춘천 MBC

1988106-17, 9회 개인전, 현대 화랑

1989, 한국 조소 미술대전, 한국무역센터

1990-현재, MBC 구상 조소 대전

1991115-14, 10회 개인전, 현대 화랑

1992, 11회 개인전, 신현대 갤러리

1992, 서울미술대전, 서울시립미술관

1993, 엑스포 촉각 조소전, 대전 엑스포

1994, 서울 국제현대미술제, 국립현대미술관

1994517-28, 12회 개인전, 현대 화랑

1996114-14, 13회 개인전, 동아 갤러리

1998, 200인 조각가 소형 작품전, 선 화랑

1998, 대전 공간 확산전, 대전 시립미술관

1998, MANIF 4! 서울 국제 아트페어 특별전

1998, 김포 국제조소심포지움, 김포시

1999, 부여 국제조소심포지움, 부여시

1999101-17, 움직이는 조소전, 가나 아트센터

2000316-28, , 현대 갤러리

20028, 파리 Fontaine Galerie Gana-Beaubourg

20031, 프린스 엔드 프린세스전, 현대 화랑

20034, 봄이 오는 소리, 가나 아트센터

20035, 17회 개인전, 수가 화랑

20035, 가족오락전, 가나 아트센터

20035, 나비의 연가 무용공연 설치작품, 가나 아트센터

20036, 조각가, 평화를 말하다, 연세대 박물관

2004615-715, 움직이는 조소-Air Joy : 한국 최초의 미술+무용+음악의 만남전, 광화문, 시민열린마당

 

수상

1966, 1968,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선

1972, 목우회 공모전 동아일보사장상

1973, 목우회 공모전 최고상

1973, 대한민국미술대전 국무총리상

목우회 공모전 문교부장관상

1974, 대한민국미술대전, 국회의장상

1975- 1976, 대한민국미술대전 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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