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영 (金鐘鍈, 1915~82) /
김종영은 김복진의 뒤를 잇는 선구적 조각가 중 한 사람으로 추상조각을 한국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1930년대 김경승, 윤승욱, 윤효중 등과 더불어 일본 동경미술학교에서 근대조각을 공부하였으나 동료 작가들과는 달리 조선미술전람회나 일본 문무성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지 않고 홀로 작품제작에만 몰두하였다. 해방 후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현실에 동요치 않는 선비적 체취와 과묵하고 성실한 예술가적 기질로 제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작가의 개성이나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동양의 관조적 사유체계를 바탕으로 자연이나 사물의 질서에 대한 관찰과 이해를 토대로 하여 생명의 내재율을 단순하게 형상화하였다. 그는 1950년대 후반부터 구조주의적 경향의 추상조각을 시도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몇 안되는 구상적 인물조각으로 재료 역시 드물게 사용한 브론즈이다. 한 손을 머리 뒤로 올린 채 서 있는 나부의 모습을 최소의 표현으로 만든 이 작품은 미완성된 듯한 소박한 형태에서 원시적인 생명감이 느껴지며, 잔잔한 터치의 표면처리로 포근한 느낌을 주고 있다.
호는 우성(又誠).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 시·서예·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1930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이쾌대·윤승욱 등과 함께 미술교사 장발(張勃)의 지도를 받았다. 1932년 전국서예실기대회에서 1등을 했다. 1936년 도쿄 미술학교에 다닐때 장발의 권유로 조각을 전공하였다. 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 다테하타 다이무[建畠大夢]에게서 배웠으나 이들보다는 화집을 통해 접한 콜베, 부르델, 마이욜, 브랑쿠시의 조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41년 도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까지 연구과(대학원 과정)에서 배우며 작품창작에 몰두하다가 1943년 귀국했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1915∼1982)은 경남 창원 소답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2005년 등록문화재 제200호로 등록된 그의 생가는 당시 창원에서 가장 큰 기와집이었다. 아동문학가 이원수(1911∼1981)의 '고향의 봄'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이 바로 그의 집이다.
1926년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하초등학교)에 다니던 열다섯 살의 이원수가 발표한 '고향의 봄'은 이듬해 홍난파 작곡의 노래로 태어났다. 이원수가 이 동시를 지을 무렵 선친 밑에서 한학과 서도를 배운 김종영은 36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현대조각을 공부한 뒤 49년 서울대에서 한국 최초의 조각 전공 교수로 후학들을 가르쳤다.
해방직후까지 고향에 머무르다가 1948년 서울대학교에 미술과가 생기자 장발·장우성 등과 함께 교수가 되어 1980년까지 있었다. 1953~80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을 지냈고 한국미술협회 대표위원, 한국디자인센터 이사장을 거쳐 1976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3년 3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조각전람회에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를 출품, 입상하면서부터 조각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목조·석조·철조 등의 재료로 구상에서 추상에 이르는 다양한 양식의 작품들을 제작했다. 기념조각물 제작에도 참여했는데, 1958년 포항의 〈전몰학생위령탑〉과 1963년 파고다공원의 〈3·1운동 기념탑〉 등을 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