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키 드 생팔(Niki de Saint Phalle) 〉
1930 ~ 2002, 프랑스-미국
니키드 생팔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 설치미술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출판업자 등 다재다능한 만능 엔터테이너이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보다 많은 이들과 함께 소통하고자 조형언어로서 행복을 주는 공간을 설치한 미술가이다.
프랑스에서 1930년에 프랑스 귀족 출신의 은행가 아버지와 부유한 미국계 어머니사이에서 태어난 생팔은 미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성장하였고 미술대학을 나오지 않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회화와 조각, 드로잉, 판화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다채롭고 풍부한 작품세계를 다루었다. 그녀의 작품은 자유롭고 기쁨의 에너지와 현실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을 동시에 담고 있다.
니키 드 생팔, 1969
작품이 탄생된 배경은 자신의 삶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고비를 넘기면서 탄생하는 작품들은 고통스러웠던 삶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대공황의 여파로 집안 형편이 갑작스럽게 어려워져 미국으로 이사를 한다.
어린 생팔은 외갓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가족과 함께 뉴욕의 아파트로 이사한다. 이때부터 니키라는 불리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11세 무렵 아버지에게 성폭행을 당해 평생 동안 끔직한 정신적 상처로 남는다.
니키 드 생팔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성적 학대 등의 경험으로 우울증을 겪었다.
13살 때 학교 운동장의 그리스 조각상의 음부에 붉은 무화과 잎사귀를 칠한 사건도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엄격한 미션 스쿨에서 두 번의 퇴학 끝에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족들로부터 떠난다. 작가는 보그, 라이프, 엘르 등에서 사진 모델을 할 만큼 매력적인 외모였다. 18세에 동갑내기와 결혼하여 21세에 딸을 낳았다. 하지만 니키의 우울증은 평범한 아내와 엄마로서 적응하지 못하고, 자해를 일삼을 정도로 심각했다. 우울증을 겪다가 1952년 파리로 이사하여 이듬해에 신경쇠약으로 입원하게 된다. 이 때 정신치료의 일환으로 선택한 그림이 평생의 직업이 된다.
개인적이고 비밀적인 이야기를 통하여 자신을 옭아맨 기억과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형상화 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려 노력하였다.
Motorcycle Heart (study for King Kong), 1963
그녀의 작품은 상처를 예술로 승화시켜 희망과 아름다움을 표현하였다.
니스의 정신병원에서도 그림을 멈추지 않았고, 아들을 낳은 이듬해에 스위스에서 첫 전시회를 연다.
1956년 바르셀로나에서 니키는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의 색깔이 있는 세라믹 건축에 매료되어 그 형과 색을 마음에 새겼다. 하지만 꿈을 이루기까지 20년이나 걸렸다.
그녀는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이 느꼈던 정신적 억압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 예술적 힘을 대중들과 나누고 싶었다.
아카데믹한 교육을 받지 않은 니키는 1961년 〈사격회화(Shooting painting)〉를 통해서 유명해진다.
사격회화는 관객에게 총을 주고, 석고로 감싼 오브제를 그림화면에 붙인 후, 매달아 놓은 물감봉지를 터트려 작품을 완성한다. 자연스럽게 미국과 프랑스 추상회화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현대미술에서 누보레알리즘(Nouveau Réalisme)의 유일한 여성작가로 인정받으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하였다.
1961년 10월에는 니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뉴욕현대 미술관에서 전시할 기회를 갖는다.
그동안 10여 년간 해왔던 아상블라주(Assemblage) 작업에서 화면의 페인트를 숨기고 석고를 덧발라 총을 쏘아 페인트를 터뜨림으로서 우연성의 요소를 표현한 것이다. 슈팅 페인팅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루었다. 아상블라주 연작은 폭력적인 이미지를 띠는 총, 칼, 부러진 쇠꼬챙이, 녹슨 못, 가위, 깨진 파편과 도끼 등의 도구를 석고 패널에 붙여 만든 부조작품이다. 이는 폭력적인 잠재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동시에 공격적 성향을 과감하게 표현하고 있다.
생성과 성장의 이미지, 파괴와 죽음과 몰락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니키를 몰아갔다.
생팔은 명확한 구성에 따라 합판 위에 다양한 오브제를 고정시킨 다음, 사격행위를 통하여 순결의 상징은 살해당하며 시신은 순교자로 박제된다. 그것은 자신과 시대의 폭력적인 감정을 쏟아냄으로써 카타르시스적인 장치가 되었다.
여성에 대한 물리적 폭력과 남성 중심의 권위적 사회에 의한 정신적 폭력을 고발한 퍼포먼스 형식의 작품이다.
이 신선한 시도는 현대 도시인들의 삶을 접목시킨 누보 레알리즘의 창시자 피에르 레스타니로부터 극찬을 받게 된다.
〈밀로의 비너스〉 연극에서 사용된 거대한 조각으로 비너스에 총을 쏘아 남성적 시각의 관념을 조롱하며 일격을 가했다.
이러한 파괴적인 방법으로 인해 자신 안에 잠재된 분노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으로 사용하였다.
남성을 배척하거나 여성성에 관하여 과격할 만큼의 시점이 녹아있다는 관점에 따라 페미니즘 예술가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재현된 여성성을 남성성에 대한 기존 관념을 강화하거나 남성문화와 여성문화를 이분법적으로 차별화하지 않았으며, 생팔 자신의 작업을 동일한 영역에서 이해하길 바라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작품을 보면서 나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머릿속에 순백의 그림이 피를 흘리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 방식으로 그림도 상처 입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니키는 팅겔리와 함께 뒤샹, 살바도르 달리 등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작품을 발표하며 그들의 일원이 된다.
1963년 엄청난 노고 끝에〈괴물〉연작에는 킹콩의 괴물이 폭력의 주체인 동시에 폭력의 희생자가 된다. 작품에서는 하얀 부조 위로 검은 물감이 흘러내리며 분노의 느낌을 발한다. 그녀가 재현하는 괴물은 예외 없이 처음부터 우리들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모순적 존재로 나타난다. 가로 2m 세로 3m가 넘는 크기의 패널화는 현재 스톡홀롬의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신랑 신부의 얼굴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둘 다 경직되어 있으며, 불길한 예감을 준다. 깡마른 몸에서는 풍만함도 밝음도 느낄 수 없다. 바로 옆에 서있는 엄청난 괴물은 발톱을 드러내며 탐욕스러운 입을 벌리고 고층 건물이 가득한 뉴욕시를 위협하고 있다. 그녀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차용하기 위해 영화 ‘킹콩’ 시리즈를 차용한 것이다.
니키는 어느 덧 총을 쏘는 자신이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느껴졌으며, 무언가에 종속되는 기분이 들어 갑자기 사격 퍼포먼스를 중단하였다.
여성 해방 운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슈팅 페인팅으로 계속해서 꾸준히 화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녀를 유령처럼 따라다녔던 여성의 역할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인지 총을 쏘는 것을 멈추고 직물 작품에 몰두한다. 사실 작업이 방식이 바뀌었지만 그 의미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이 예견한 대로 직물 작업에서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낭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 작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 다음 작업으로 이어갔다.
〈Hon〉1966. 4-7월, 스톡홀름 현대미술관, 6×23
생팔의 작품의 전반기는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특징을 띄고 있으며,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 후반부로 가면서 생을 찬미하는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드디어 새로운 작업방식으로 인체의 조형들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모습, 또는 웅크리고 앉아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몸의 자세나 움직임은 철사나 판지로 표현해 낸 것은, 예술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그녀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니키는 점차 불면증과 신경쇠약증이 호전되면서 자신감이 들었고 행복한 여성상을 만들기 위해 임산부들과 함께 지내며 〈나나〉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조각은 욕망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육체 이미지에서 벗어나 부풀린 풍선처럼 거대한 볼륨과 곡선을 지닌 형태로 창조하였다. 〈나나〉로 대표되는 여성적 작품은 이 사회의 상징적 질서 안에서 여자의 위치를 유희적 방식으로 표현한다. 삶의 환희를 상징하는 연작은 20세기 여성에 대한 서구 남성들의 기존관념을 조롱하고 여성 정체성을 탐구한 그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작은 나나 보아, 1983-84
〈나나〉연작으로는 〈물구나무선 검은 나나〉, 〈검은 비너스〉, 〈에리카〉, 〈나나와 보아뱀〉, 〈얼굴없는 나나〉, 〈건강한 나나〉, 〈달리고 있는 나나〉, 〈캘리포니아 나나〉, 〈두 여인〉, 〈검은 로지〉등이 있다.
나나는 이목구비가 없다. 거추장한 옷을 벗어던지고 화려한 꽃무늬와 줄무늬가 있는 건강하고 풍만한 육체만 보여준다.
기쁨의 여신을 통해 생명력 넘치는 건강함과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나타낸다.
초기의 〈나나〉는 실 뭉치로 만들었지만 점차적으로 반짝이는 밝은 색채의 몸을 가진 〈나나〉로 바뀌게 된다.
그녀는 분명 직물 작업에서 형태와 균형에 대한 감각을 깨우쳤을 것이다.
그 형상은 매력적인 소녀도, 귀여운 아이도, 지적인 여자도 아니었지만 거기에는 한 결 같이 유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에 대한 얌전하고 우하고 날씬한 고정관념을 부수고 과장되게 부풀어 오른 가슴과 엉덩이를 화려하게 치장한 그로테스크한 조각상이다.
이 형상들을 〈나나〉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나나는 어린 시절 니키가 무의식적으로 상상했던 여성성을 바탕으로 창조한 유쾌한 형상이었다. 새로운 형상들은 새로운 재료로 제작되었다. 그것은 자동차 가공용 액체 폴리에스터였다.
액체 폴리에스터를 바르자 조형물은 더욱 매끄럽게 빛났다. 색상이 아름답게 반짝였고 방수 효과도 뛰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인체 건강에 좋지 않은 폴리에스테르를 칠해서 반짝이게 한 것이다. 폴리에스테르는 38살부터 시작된 폐 질환과 말년의 폐기종과 천식에 영향을 준다.
1965년 〈나나〉연작에는 이전에 행해졌던 도발적 공격성이 수면 아래로 들어가면서 괴물은 풍만한 여성의 몸으로 바뀐다. 전통적인 여성의 날씬한 몸매에 철저하게 역행하여 우스꽝스러운 풍만함으로 바뀐다. 나나는 관객의 기대에 당당히 건재함으로써 관객의 공정관념이 공격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흥미로운 변화는 점점 공공적인 영역으로 옮겨감으로서 스스로의 내면에 잠재된 정신적 치유와 함께 특유의 친근하고 따뜻하게 광장으로 나오게 된다.
시인과 그의 여신, 1974
아름다운 신부는 니키 드 생팔의 모든 작품을 사로잡았던 주제이다. 화려한 의상으로 치장한 신부는 희생의 제물로 바쳐지기 때문에 슬프고 고통스러운 표정이 고달파 보인다. 때로 밖으로 드러낸 심장은 사격하기가 용이하다.
자신이 점점 성숙해지고 안정을 찾아감에 따라 여성의 이미지도 훨씬 편한 쪽으로 변한다.
〈물구나무를 선 나나〉(1965)(도판 □)를 포함해 누워 있는 만삭의 임산부를 묘사한 〈혼〉(1966) 등 각양각색의 모습을 취하고 있는 ‘나나’시리즈는 동시대 생팔 이미지를 대신하는 작품이라 해도 무방하다.
뚱뚱하고 자유분방한 다채로운 여성의 모습을 한 〈나나〉는 남성들이 가진 관념적인 미의식을 뒤집고 여성의 존재의 위대함과 자연스러움을 대중들에게 알렸다.
이시기에 제작된 〈비너스〉 연작에서는 비너스의 풍만한 몸과 작은 발로 껑충
껑충 뛰며 모든 방향으로 회전한다. 폴리에스테르 위에 화려한 색채가 입혀진 비너스는 통통하고 풍만한 형태에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연상시킨다.
활력 넘치는 화려한 색채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나나(Nana)〉시리즈의 작품들은 전 세계 곳곳에 설치되어 모성애와 여성성을 드러내며 사랑받고 있다.
하노버에 설치된 나나, 폴리에스터, 1973
니키는 고양이 시리즈를 만들어 새로 완성한 집 앞에 세워두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으며 사람들은 담장 옆에 서서 니키의 작품을 구경하였다.
남편 장은 집 밖에 작업실을 차리고 매일 일을 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오브제들은 수명이 다해 녹슬어가는 고철의 농기계들이었다.
니키는 성별을 떠나 모든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어떤 힘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 힘은 타인을 억압하는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나는 즐거움과 활동성, 초연함을 향해 자유롭게 열려 있었다.
나나의 여성성은 강조되어 보였고, 몸의 굴곡은 과장되어 드러났다. 피부색은 국제적으로 흰색, 노란색, 검은색, 붉은색 등 다양한 인종을 표현하여 알록달록한 색을 칠했다.
많은 사람들은 나나를 통해 아름다움과 우아함, 춤, 음악을 생각하기도 하고 풍부함과 부드러움, 색채, 감성과 직감, 원초적인 대지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1966년에 제작된 스톡홀롬 현대미술관에 설치된 28m의 대형 작품 〈혼〉는 관람자들이 누워있는 여성의 질을 통해 몸속으로 줄지어 들어가서 비밀스런 육체의 곳곳을 감상할 수 있게 하였다. 특히 남성 관객들로 하여금 다리를 벌리고 누워있는 거대한 여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여체의 구석구석을 감상하도록 배려하였으며,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과 모성애를 찾도록 유도하였다.
그녀는 자궁이라는 모성 안에서 남과 여가 서로 교감하고 이해하는 화해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움직이는 사람들은 마치 장난감처럼 작아 보였다. 안에는 여러 가지 음향들이 울려 퍼졌다. 방문객들은 동굴 속에서 보호받는 원시인과도 같은 아늑한 기분을 느꼈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였다.
몸 안에는 쉴 수 있는 공간이 있고 영화관이나 가판대가 있으며, 수족과, 천문대, 전시시설 등의 공간을 갖추고 있다.
상징적 봉헌물이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몸 전체로 방문객을 환영한다. 생팔은 이렇게 공공 작품을 통하여 상호 이해와 화해의 장을 마련한다.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은 4개월간 전시를 마치고 해체되어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사람들의 기억과 환상 속에 살아있다.
이어진 많은 공공 프로젝트는 광장을 향한 그녀의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공연적 특성과 우연의 요소는 당시 유행하였던 누보레알리즘, 플럭서스, 네오다다 등이 공유하던 보편적 특성이었다.
〈나나〉와 〈혼〉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파괴적이고 공격적인 세계에서 밝고 쾌활한 생명의 세계로 승화된 감정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허물없이 대중들에게 다가가고 취향에 영합하지 않으며 다양한 차원에서 소통을 시도하는 진정한 작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 하버드대를 졸업한 남편과 이혼한 생팔은 아이들도 버리고 파리로 올라와 예술계에 입문하고, 1971년 니키는 평생의 연인이자 ‘예술동지’인 장 팅겔리를 만나 재혼한다. 장 팅겔리는 아내 니키에게 많은 영감을 제공했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혼한 두 번째의 남편 조각가 장 팅겔리이다.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애인에게 눈을 돌려 마음을 아프게도 하지만, 끝까지 예술적 동지로 남아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며 예술가로 길을 함께 간다.
그녀가 놀이 조형물 설치미술가로 이름을 떨친 것도, 퐁피두센터 옆에 분수를 설치한 것도 20년에 걸쳐 타로 공원을 완성한 것도 팅겔리의 도움이 있었다.
타로 조각공원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카발비오(capalbio))
‘타로공원’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카발비오(capalbio)에 조성되어 그녀의 작품을 다양하게 볼 수 있는 곳이다. 니키는 가우디의 구엘 공원에서 영감을 받아 20여년의 기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했다. 1988년 개장한 ‘타로공원’을 빛, 판타지, 환희가 넘치는 공원으로 만들기 위해서 거울, 유리, 도기 등을 모자이크로 형상화하여 장식했다. 그것은 가우디의 ‘구엘공원’에서 영감을 받아 구상되었으며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카팔비오에 조성되었다. 니키에게 공원은 삶의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난 뒤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하였다.
니키는 「아빠」라는 영화 제작에까지 하게 된다.
일생의 꿈이었던 ‘타로공원’이라는 기념비적인 조각공원을 남겼다. 신화와 전설을 혼합한 상상력으로 만든 타로 공원은 환상적인 문화공간으로 대중들에게 치유와 기쁨을 제공하고 있다. 고통의 삶을 예술로 바꾼 니키는 공원이 정식 개관한 1998년 이후 5년 동안 플라스틱의 독성으로 고생하다가 72세에 사망한다.
2001년 니키 드 생팔은 니스 시와 근현대미술관에 190점의 작품을 기증한다.
그녀는 관습의 규칙에 길들여지는 것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오직 자유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창조하고, 생각하고, 사랑했다.
풍요롭지만 때로는 끔직한 그녀의 세계는 경험이라는 자양분을 흡수하여 40여 동안 작품의 세계를 풍부하게 묘사하였다.
그녀의 삶은 드라마틱하고, 때론 고통스럽거나 행복하기도 했지만, 늘 열정적이었다.
아픈 과거에 짓눌러 평생 정신적인 우울을 겪었던 니키는 미술치료로 고통과 절망을 극복하고서 또 다른 이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예술가로 자유롭고 재기 발랄한 조각 시리즈 ‘나나’를 만든 니키 드 생팔은 언제나 새로운 방법과 표현으로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유희적 환희가 배어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사회가 요구하고 강요하는 여성의 모습에 커다란 염증과 억압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못지않게 상처를 입은 그의 일생을 아름다운 힘을 통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녀가 겪었던 분노와 슬픔, 억압과 무기력 등이 녹아든 작품이다.
팅겔리와 함께했던 오랜 기억들은 니키의 머리에 새겨져 있었다. 팅겔리는 남성우월주의에 젖었고 난봉꾼 기질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니키의 애정을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예술을 사랑했고 서로의 작업에 관심을 잃어 본 적이 없었다. 장이 철을 사랑했다면 니키는 색색의 깃털을 사랑했다.
요코 마즈다는 1980년부터 니키와 친구가 되어 20여 년 동안 니키의 작품을 사들여
일본 도치기 현에 세계 최초로 니키미술관을 열었다. 그녀가 소장한 작품은 2018년에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성공적인 전시회를 가졌다.
Niki de Saint Phalle, Madeleine or Nana Patchwork, 19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