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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불망비 칼럼

[스크랩] 임실 설보 碑

작성자양월|작성시간26.06.05|조회수44 목록 댓글 2

 

()라는 것은 하늘에서 내리기에 언제 내리는지, 얼만 큼 내리는지 대한 것을 알 수 없었다.

여름에는 홍수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고, 갈수기에는 가뭄으로 농사를 짓는 백성들에게는 악몽과 마찬가지기에,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가 꼭 필요하였다. 또 한 제방공사도 필요한 것이 그 당시의 생활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기술로는 많은 양의 물을 저장 하는 것이 어려운데다가, 물이 모자람으로 인하여 많은 폐단이 발생 하였다.

()이라는 것은 잘 관리하면 이득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큰 재앙이기에, 많은 기록들이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치산치수라는 말이 있듯이 왕조의 운명이 좌우되는 아주 중요한 것이 물이었다.

이번에 책은 한반도에 남아 있는 저수지와 제방에 관련된 를 정리하여 본다.

전국에 많은 저수지가 남아 있으며, 신라시대부터 만든 것부터 현대의 이르기 까지 많은 물을 저장하는 시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저수지는 백성의 힘만으로 제방이 축조 되지 않기에, 그 당시의 관리나,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와 노력의 결과가 기록으로 남아 있다.

김제와 익산, 그리고 임실을 답사 하면서 여러 가지를 보았는데 그 중에 임실에 있는 설보(雪洑) 비를 보았다. 비석은 3좌 이었으나  그 중에 조평의 기록이 있는 설보니는 많은 기록과 전설을 새긴 비  이었다.

명문은 길고 한문 실력은 짤고하니 겨우 몇 자만 풀이하여 집에 와서 자료를 정리하 였다.

한사람의 노력이 많은 사람을 살리고 그 기록을 남겨 놓았기에 깊은 생각을 하게 하였다.

설보 비의 명문을 풀이 하여 내 놓는다.

 

雪洑碑銘 幷序

 

단락 구분 ]

洑在任實縣德峙村前大野之要 食於是洑者不知有甲戌與丙子 丙子越四年己卯 居民咸曰吾儕之得全活於大無 厥惟誰賜 被其澤而不知其所由可乎 謀伐石顯其蹟 洑盖雲壑趙先生平之刱也 昔是之未洑也 大野可千頃 艱於灌漑 久不食 公曰奏庶食 厥惟功 謀興水 而開渠爲不易 頗猶豫 適己卯春分之夜 雪痕從崖石間 可尋爲功 乃謀諸役遂事 豈天公會事耶 民曰公之誠之感也 因名雪洑 民到于今受-생략----

公字衡仲 系出咸安 始祖諱鼎 高麗元尹 世奕葉 至諱元鰲 擧經明行修 官參奉 公之祖考諱舜歲贈掌令 公性忠孝 早師沙翁 得性命之學 以遺逸累除洗馬,持平皆不就 丁卯丙子擧義旅 退而居回文山 山乃仁廟賜牌也 欲由是而詳公之世與德者 盍於其狀而考諸

 

銘曰

澤于斯民 惟公之心 惟心不如 退藏于深 有地不食 于山之野 民失其利 田高水下

惟公相地 有眷于天 因雪而渠 有水漣漣 衆皆利己 公利于民 非今斯今 永世惟均

舍曰康年 矧玆大無 衆皆溝壑 我民無虞 同我婦子 口有豐碑 石以爲誌 以告來斯

刱洑後四回己卯十月下弦 幸州 奇宇萬 撰

 

나. 번역

洑在任實縣德峙村前大野之要 食於是洑者不知有甲戌與丙子

보(洑)는 임실현 덕치 마을 앞 넓은 들판의 요충지에 있는데, 이 보의 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갑술년(1874, 고종 11)과 병자년(1879년)이 어떤 해였는지를 알지 못한다.

丙子越四年己卯 居民咸曰吾儕之得全活於大無 厥惟誰賜 被其澤而不知其所由可乎 謀伐石顯其蹟

병자년으로부터 4년이 지난 기묘년(1879)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가 큰 흉년 속에서도 온전히 살아남은 것은 대체 누가 내려 준 덕택인가. 그 혜택을 입고서도 그 까닭을 모른다면 되겠는가.”라고 하여, 돌을 다듬어 그 자취를 드러내기로 도모하였다.

洑盖雲壑趙先生平之刱也 昔是之未洑也 大野可千頃 艱於灌漑 久不食

이 보는 대개 운학(雲壑) 조 선생 평(趙先生平)께서 처음 만드신 것이다. 옛날 이 보가 없었을 때, 넓은 들판이 거의 천 이랑 쯤 되었으나 물을 대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였다.

公曰奏庶食 厥惟功 謀興水 而開渠爲不易 頗猶豫 適己卯春分之夜 雪痕從崖石間 可尋爲功 乃謀諸役遂事 豈天公會事耶 民曰公之誠之感也 因名雪洑

공께서 말씀하시기를, “백성을 먹이는 것이 공(功)이다.”라 하시고, 물을 일으킬 것을 도모하셨으나, 수로를 뚫는 일이 쉽지 않아 자못 망설이셨다.

마침 기묘년 춘분 무렵의 밤에, 눈 녹은 흔적이 벼랑 바위 사이를 따라 흘러, 공사를 할 만한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역부들과 도모하여 마침내 일을 이루었으니, 어찌 하늘이 일을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 백성들은 말하기를, “공의 정성이 감응한 것이다.”라 하여, 이로 인해 ‘설보(雪洑)’라 이름하였다.

民到于今受其利 而在康年猶不知受賜之大 知公之功 惟甲戌與丙子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이로움을 누리고 있으나, 풍년이 드는 해에는 오히려 받은 혜택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한다. 공의 공덕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은 오직 갑술년과 병자년 같은 흉년뿐이다.

衆皆臭載 一船獨全 於是乎舟師之神功著矣 此竪碑之久未遑 而始於今 以其實 徵不佞銘 不佞曰此公之一事 烏足以槩公

뭇 배들이 모두 짐이 썩어 침몰하는데 오직 한 척만이 온전하였으니, 이에 뱃사공의 신묘한 공이 드러나는 법이다.

이처럼 비석을 세우는 일이 오래도록 겨를이 없다가 이제야 비로소 시작하게 되었다. 그 실상을 들어 불녕(不佞, 나 자신을 낮춘 표현)에게 명문(銘文) 짓기를 청하였다. 불녕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의 한 가지 일일 뿐이니, 어찌 공의 전체를 개괄하기에 족하겠는가.”라고 하였다.

公字衡仲 系出咸安 始祖諱鼎 高麗元尹 世奕葉 至諱元鰲 擧經明行修 官參奉 公之祖考諱舜歲贈掌令

공의 자(字)는 형중(衡仲)이니, 가계는 함안(咸安)에서 나왔으며, 시조(始祖)의 휘(諱)는 정(鼎)으로 고려의 원윤(元尹)이었다. 대대로 가문이 번성하여 내려왔다. 휘 원오(元鰲)에 이르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인 분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을 지냈다. 공의 조부의 휘는 순세(舜歲)로 장령(掌令)에 추증(追贈)되었다.

公性忠孝 早師沙翁 得性命之學 以遺逸累除洗馬‧持平皆不就

공은 성품이 충효하였다. 일찍이 사옹(沙翁,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섬겨 성명(性命)의 학문을 얻었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마(洗馬)와 지평(持平)을 여러 차례 제수(除授)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丁卯丙子擧義旅。退而居回文山。山乃仁廟賜牌也。欲由是而詳公之世與德者。盍於其狀而考諸。

정묘(丁卯, 1627년)·병자(丙子, 1636년) 양란(兩亂)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물러나 회문산(回文山)에 거처하였으니, 그 산은 인묘(仁廟, 인조(仁祖))께서 사패(賜牌)로 내리신 곳이다. 이로 말미암아 공의 세계(世系)와 덕행을 자세히 알고자 하는 사람은 어찌 그 행장(行狀)에서 상고하지 않겠는가.

명(銘)은 아래와 같다.

澤于斯民 惟公之心 이 백성들에게 혜택을 베풂이 오직 공의 마음이었네.

---생략---

因雪而渠 有水漣漣 눈을 따라 수로를 열었더니 물이 넘실넘실 흘러왔네.

衆皆利己 公利于民 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이롭게 하지만 공은 백성을 이롭게 하셨네.

非今斯今 永世惟均 지금만의 일이 아니라 영세토록 고르게 미치리라.

舍曰康年 矧玆大無 풍년은 말할 것도 없고 하물며 이 큰 흉년에

衆皆溝壑 我民無虞 뭇 백성이 다 굶어 죽을 때 우리 백성만 근심이 없었네.

同我婦子 口有豐碑 우리 부녀자와 함께 입에 커다란 비석이 있었네.

石以爲誌 以告來斯 돌로써 기록을 삼아 후세에 오는 이들에게 고하노라.

刱洑後四回己卯十月下弦 幸州 奇宇萬 撰

 

보를 처음 만든 지 네 번째 돌아온 기묘년(1879년) 10월 하현(下弦)에 행주(幸州) 기우만(奇宇萬)이 지음.

 

 

설보비(雪洑碑)’는 1879년에 조성된 것으로 임실군 덕치면 사무소에 위치한 비석으로 높이는 88㎝이며, 비문은 송사(松沙) 기우만(寄宇萬, 1846년~1916년) 선생이 지은 것으로 내용은 병자호란 전후로 대가뭄에 1639년 춘분날 밤에‘애석(崖石) 사이로 눈자취(雪㾗])’를 따라 보를 쌓고 수로를 내어 회문리 일대에 관개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운학(雲壑) 조평(趙平) 선생의 공이라는 것이다.

1879년 그 후손 청경 조병용 선생이 다시 설보를 수리한 후에 세운 비석이 이 설보비이다.

 

조평선생은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형중(衡仲), 호는 운학(雲壑). 함안 출생. 아버지는 장령의 증직을 받은 조순세(趙舜歲)이며, 어머니는 창녕조씨(昌寧曺氏)로 조이천(曺以天)의 딸이다. 정구(鄭逑)·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광해군의 실정으로 벼슬을 단념하였다. 최명룡(崔命龍)과 교우를 맺고 성리학과 예학(禮學)에 주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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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양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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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양월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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