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바키(つばき)’는 동백의 일본어지만, 원래는 ‘치 받기’란 우리 옛말에서 빚어진 낱말이다. ‘치’는 남자·남근을 가리켰다. 뭉뚝하게 치솟은 꽃심을 다섯 개의 꽃잎으로 떠 받치듯 하고 있는 동백꽃송이의 모양새가, 마치 남근을 다섯손가락으로 떠받들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치(남근) 받기’라 불렀던 것이다. 동백이 흔히 남녀의 sex를 상징하는 꽃으로 삼아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는 옛말로 남근도 뜻했다. 일본의 고대 性관련 낙서에는 길 道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남근을 뜻하는 '지'의 은유이다. 즉 ‘길’의 옛말은 ‘질’, 요즘도 쓰이고 있는 남도쪽 사투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말이 일본어가 되면서 받침은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자음 없이 표기하는 이두식 가나의 구조적 제약때문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
그래서 ‘질’은 ‘지’가 되었다. 일본사람들은 요즘도 ‘길’을 ‘지’라 부른다. ‘산길’은 ‘やまじ(야마지=山路)’로 이두식 표기를 한다, ‘집으로 가는 길’은 ‘いえじ(이에지=가로)’다. 그래서, ‘지’라고 읽힌 한자 ‘道’로 남근 ‘지’를 나타내곤 했던 것이다. 야한 낙서에 으레껏 길道자가 등장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어에도 남근을 의미하는 어근 '지'가 남아있지만 현대 일본어에도 이 흔적이 남아, 현대 일본어로도 "ちんこ(성기를 뜻하는)'지'로부터<(탁음화)치(ち)+ん(뒤에 오는 '코' 발음을 촉진하기 위한 촉음 N )+작은 것을 뜻하는 접미사 '코(こ)'<친코((ちんこ)가 된다, 그밖에, ちんぽ,ちんちん(성기를 뜻하는 치에 촉음을 붙여 병렬로 늘어 놓은 유아어)등으로 그 어원적 배경을 분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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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Ja(작다는 의미의 접두어)-+ji(성기의 어근)=Jaji 또는 jamj(자의 원래 음가인 '잔-작은-'과 근사)
한국어로부터의 분화과정-한국어의 어근 'Ji'로부터<(탁음화)치(ち)+ん(뒤에 오는 '코' 발음을 촉진하기 위한 촉음 N)+작은 것을 뜻하는 접미사 코(こ) <친코(ちんこ=남성의 성기)
"일본어-Ji<chi(ち=ㅈ음이 ㅊ음으로 탁음화)+ N(촉음ん)+ko(こ=작은 것을 의미하는 접미사 한국어의 'Ja-ji'에서 'Ja'의 역할)
축약-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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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치 받기
한국어로부터 분화과정- 치받기로부터<ㅊ+(모음변화)으+바+(자음 ㄷ 탈락)+키(ㄱ음의 탁음화)<츠바키(つばき)
일본어-'츠바키'(つばき=동백=椿=倭고어-sex의 은유)
일본어-츠바키+치(つばき+·うち(집)<つばき+ち[う(u)탈락]<つばきち(아래의 '팔십'으로 적나라하게 한국어 그대로 일본서기에 표현되는 '매춘(츠바키)집(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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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매춘장소겸 술집역할을 한 유곽을 ‘치 받기’라 부른 것도, 남자·남근을 받는 데가 유곽이었던 탓이다. 유곽은 교통의 요충지에 세워졌다. 남자들의 내왕이 잦은 곳, 사통팔달, 각지로 연결되는 로터리에 자리했다. 이같이 여덟 갈래 십자로에 있는 ‘八十(성기를 파는)집’이라 하여, 유곽은 ‘八十가’라 불리기도 했었다. 우리 한국어가 그대로 남아있는한자의 음을 차용한 적나라한 용어로 이글을 접한 분들도 깜짝 놀랄것이다. 하지만 일본서기에도 기록된 사실이다.
지금도 이 어근의 흔적은 일본어에 남아 있다. 요즘은 단순이 꽃의 암술을 의미하는 말로 한정되어 쓰이지만 일본어에는 'しべ(sibe)'라는 말이 있다. 이말은 한국어 'ssib'이 경음화되기 이전의 형태인 'sib'이 개음절화하여 모음 e를 붙여 음운변화된 말이지만 위의 일본서기 기록에 보이듯이 '八十'이라는 적나라한 한국어 음운으로 한자를 빌어 아스카시대인 7세기에 쓰여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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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ssib(여성의 성기)
倭고어-sib(한국 고어 sib과 같다=여성의 성기)
일본현대어-sib
아스카시대의 倭語=八十家(한국어 그대로 한자음을 차용한 '십을 파는 곳' 즉 매춘하는 곳을 의미한다=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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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일본어 어원추적 11편'에서 세자빈 '경왕녀'가 정략으로 결혼되어져 간 '후지와라 가마타리'라는 대신의 집부근인, 당시 아스카 근처의 번화가 츠바키치(요즘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부근)엔 ‘팔십가'’라고 불린 유곽 동네가 있었다. '팔십'가란, 성기를 파는 거리 또는 성기를 파는 집을 의미했다. 아스카 사람들은, 경왕녀의 남편 가마타리가 경영하는 제철소 근교의 유곽 동네 이름으로, 그녀의 집 별명을 삼은 것이다. 농을 담은 욕이었다.
어제 포스팅된 '일본어 어원추적 11편' 아스카의 낙서의 배경(우측 하단의 그림 97년 출토 목편
관련글- 97년 일본 아스카에서 출토된 7세기 야한 낙서 木片 에 각인된 고대한국어의 비밀-倭語는 한국어의 ...[2] 07.04.29 )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면 서기 659년 현직의 세자빈에서 당시의 유력한 호족(그러나 왕족급이 아니라 제일 가느다란 연꽃으로 그려졌던)'후지와라 가마타리'에게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정략으로 팔려 가다시피한 결혼을 두고 당시 아스카의 민심은 그 문제의 세자빈이던 백제 무왕의 딸 '경왕녀'를 동정했다.(-일본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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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너무 글의 분량이 방대해지면서 배경의 부분을 생략했지만 바로 아스카 낙서에서 가장 큰 연꽃이 은유한 사람인 왜의세자는 백제 무왕의 아들로 서기 641년 의자왕과 왕위승계 내전에서 패해서 백제의 담로이던 倭열도로 유배되었던 무왕의 아들 '부여교기 왕자'인 것이다(이 사실 하나만 봐도 倭란 백제의 유배장소의 기능도 했다는 것이 명백하다.)-일본서기-
'교기'는 제1 대신인 '사택지적(삼국사기에는 죽은 것으로 되었지만 일본서기에는 살아서 유배된 것으로 기록)'및 내무장관급인 내좌평 '기미'및 수많은 대신등 유력인사만 40여명에 달하는 교기지지세력과 함께 倭열도에 유배된다. 다시 말해서 세자빈 '경왕녀'는 같이 유배된 4명의 공주중 한명인 동복의 친남매지간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는 근친혼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당연시 되었다는 것은 여러 기록에서 보인다.
그리고 중간 크기의 연꽃으로 은유된 경왕녀가 내통한 당사자는 후일의 천무일왕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세자빈과 내통할 당시의 이름은 '大海人'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교기는 그 후 나카노오오에(中大兄)로 이름을 바꾸고 '다이카개신'을 일으켜 당시 왜왕이나 마찬가지인 소가(蘇我)씨를 타도하고 무왕의 후비인 그의 어머니 '사이메이'여왕에 이어 '텐지일왕'이되고 그후 백촌강전투에서 당과 신라 연합군에 패하는 주역이 된다.
그리고 '아스카 낙서'상 교기의 연적인, 중간 연꽃'라이벌'로 회자되는 '대해인(훗날의 천무일왕)'은 텐지일왕이 죽은 후 '임신의 란'을 일으켜 친신라계 정권을 수립하고 '천무일왕'이 된다. 천무에 대해서는 그 출신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여하튼 신라계 인물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도 일본서기상 교기와 같이 황태자로 기록되어있지만 실제 텐지일왕(교기=중대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남이며 나이도 4살 년상이다.
일본서기의 표면적인 기록만으로는 그 배후의 난마같이 얽힌 배경을 모두 알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아스카의 가십'에서처럼 일방적으로 '경왕녀'의 내통으로만 처리될 사안은 아니고 복잡한 정략적 고려가 배치된 기록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일반적으로 경왕녀 재가사건의 가장 유력한 해석은 당시 倭의 실질적 지배자인 '소아'씨가 당시 급변하는 정세속에서 본국인 백제에 어느정도 소원한 정책을 펼치자 그것을 제지하기 위해 교기왕자가(후의 텐지일왕)신라계 세력을 끌어들여 다이카개신을 일으킨다 .
이 과정에서 신라계 수장인 '대해인'에게 倭의 왕자에 준하는 작위를 내리고 자신의 부인이던 세자빈 즉 친동생 '경왕녀'를 '대해인'에게 관계시킨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녀가 임신하자 자신의 가장 심복인 '후지와라'에 시집보내어 세간의 이목을 분산시키려 했다고 한다. 이를 알리 없는 서민들의 눈에에는 다만 재미있는 가십으로 회자됐고 그 증거가 '아스카의 낙서'인 것이다.
사족이지만 이후 소아씨를 타도하고 교기가 왜의 정권을 잡자 신라계의 수장인 '대해인'을 홀대하고 그에게 약속을 이행하지 않으며 그를 압박하자 그는 요시노산으로 은거하며 때를 노리다가 결국 '텐지일왕'인 교기가 죽자 '임신의 난'을 일으켜 직접 '천무일왕'이 된다. 그러나 천무가 죽자 다시 정권은 '텐지'의 딸인 천무의 부인 '지통일왕'에게 계승되어 결국 신라계 일왕은 1대에서 끝나고 만다. 이렇게 '아스카 낙서'의 당사자들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