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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거제시조選-326] 옥나원 '달빛 아빠'

작성자옥건수|작성시간26.06.15|조회수47 목록 댓글 0

 

[금요거제시조選-326] 옥나원 '달빛 아빠'

 왜, 올렸냐구요?

옥씨 종친이라 올렸습니다.

옛날에는 옥씨가 거제에서 대세였는데 지금은 희성이 되고 말았네요.

모두들 고향을 떠나 출새하려고 하다보니 이렇게 되었네요.

저의 고향에도 10여 가구가 오손도손 살았는데
이제는 한집안 거유 명멱을 유지하고 있네요.

옥나원 화이팅!

금요거제시조選-326

옥나원

달빛 아빠                -                옥 나 원

눈꺼풀 어둠 내려
무겁게 감길세라
산 건너 바다 건너
집으로 먼 길 돌아
새벽 빛 한아름 안고
잠든 집을 밝히네.

방방이 네 아이들
추울까 이불 만져
머리맡 잠든 아기
내 아가 쓰담쓰담
까치발 아버지 미소
이불속에 번지네.

해 되어 나가서는
달 되어 들어오신
지친 몸 누일 때면
창문 끝 별도 누워
아버지 잠든 뒤에야
우리 새벽 밝아오네.


옥나원
-문예창작학 전공
-OKSUSU_FOREST 대표
-숲해설 지도사
-능곡시조교실 수강
-거제시조문학회 회원

감상
시조 작품 <달빛 아빠>는 해뜰 때 나가서는 새벽녘에 귀가 하시는 아버지의 고단한 일상을 3수 연작으로 읊은 옥나원 시인의 思父曲이다.

감상에 앞서 시인의 ‘시작노트’를 옮겨 본다.

“저의 아버지는 30년 무사고의 택시드라이버셨어요. 항상 아주 늦은 새벽에 집으로 들어오셔서 저희들 깰까봐 조심조심 씻으시고 피곤이 몰려올 텐데도 네 아이, 엄마까지 얼굴을 쓰다듬고는 잠드셨습니다. 어려서는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하루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실눈을 뜨고 잠이들다 아버지 손길이 느껴지면 그제야 깊은 잠에 들었던 기억을 시조로 썼습니다. 따뜻했던 저의 아버지는 우리 집을 환히 비추는 해였고 따뜻한 달이기도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한 가정의 역사다. 참으로 고단하고 외로운 길이다. 세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자식을 위하는 일이라면 섶을 지고 불구덩이라도 뛰어드는 사람이 아버지다.

가족을 위해, 아이들을 위해 눈썹을 휘날리며 꼭두새벽부터 일터로 달려가는 아버지다.

아버지, 소리내어 울 수도 없고, 울고 있어도 눈물을 보일 수 없는 이 땅의 아버지들이다.

진종일 차를 몰다 보면 / 눈꺼풀이 어둠 내려 무겁게 잠길새라 / 안간힘을 쓰고 / 새벽 빛 한아름 안고 잠든 집을 밝히신다. /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고단함에도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 방방에 네 아이들 추울까 이불 만져 / 다독거리신다. 행여 잠이라도 깨울세라 / 까치발 아버지 미소 이불속에 번진다. / 까치발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 스담쓰담은 정겨운 아버지의 손길이었다.

아버진 / 해 되어 나가서는 달 되어 들어오셨다. / 그리곤 / 지친 몸을 누일 때면 창문 끝 별도 누워 / 일과를 마무리했다.

아버지께서 잠든 뒤에야 비로소 동녘 하늘이 밝아온다.

문득 시인의 아버지가 부러워졌다. 딸이 없어서다.
- 능곡시조교실 제공

◎ 인연

이성보

3월 중순에 앞 화단에다 두 줄로 씨를 뿌린 백일홍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빨간색을 비롯하여 몇 가지 화색이 화려함을 뽐내어 눈길이 자주 간다.

백일홍 꽃씨를 봉지 가득 보내준 이는 같은 아파트에 살다 작년 봄에 군산으로 이사 간 이인수씨이다. 그와는 아파트 경로당에서 만났다. 애주가인 그는 경로당 분위기 메이커였다. 동갑내기 김씨와 죽이 맞아 경로당을 활기 넘치게 하였는데 김씨가 뇌졸증으로 쓰러져 미루어 왔던 고향 군산으로의 이사를 진행했다. 떠나기가 아쉬워 몇 차례나 이사를 망설였는데, 그의 빈자리는 컸다.

백일홍을 볼 때마다 미소 띤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인생의 황혼기에 만난 그와의 인연을 살리리라 다짐한다. 이는 누군가 한 말이 생각나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인연인 줄 모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아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린다.’

5월 13일에 EBS 한국기행에 '어른들의 딴짓'이 방영되었다. 여기에 거제자연예술랜드와 우리 내외가 딴짓하는 어른으로 나왔다. 그 주말에 이곳을 찾은 일행 4명 중 한 분이 다정하게 인사를 했다. 과천 능곡재 난아카데미 수강생이었다고 자기소개를 했다. 능곡재 난아카데미는 40여년전 내가 개설했던 과천시 능곡재에서의 무료 난 강의를 말한다.

EBS 한국기행 TV 화면에서 나를 바로 알아보았다고 하면서 천안에서 이웃집 부부와 함께 아침 일찍 출발하였단다. 당시 지급 받았던 난아카데미 교재를 아직 소장하고 있다며 과일이며 음료수 등 가지고 온 선물을 건네주었다. 그때 삼, 사십대였던 사람들이 백발의 노인이 되어 만났으니,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나는 잊고 있었지만 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 만감에 젖었다.

옷깃만 스치어도 인연이라 안하던가
그 인연 팽개치고 남녁 끝에 숨었는데
팔십령 넘는 나그네 따라나선 지팡이.

拙詩, ‘외로운 동행’, 전문

두어 달 전에 지독한 감기로 자리보전하고 있었는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화면에 ‘부시장’이란 문자가 떠, 반가운 마음에 얼른 전화를 받고선 안부를 물었다. 부시장은 16년 전 거제시부시장이었던 한동환씨를 말함이다.

그간의 안부를 묻던 차에 그는 병실이라며 주치의께서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한다고 하여 마지막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고 담담했다. 순간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기만 하다 전화를 끊었다.

세상에, 생을 마감하면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 충격에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그와의 연은 그가 2009년 7월 1일자로 거제시 부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나를 알고 있었다.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선물로 받은 동양란을 관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난을 관리부실로 죽이는 시행착오를 겪고, 난을 기르는 요령을 체득하면서 나를 알게 되었다고 했다. 처음엔 그를 피했다. 그를 피한 사연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 사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외환위기며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사업체의 타처이설을 고심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나를 설득 했다. 그렇게 하여 ‘거제자연생태테마파크’를 조성키로 합의했다. 테마파크의 테마는 '미니장가계'였다. 타당성조사용역, 중장기 투융자심사 요청까지를 마무리하고 2010년 6월 말일자로 그는 퇴임했다. 년간 수십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거제식물원(거제자연생태테마파크 후신)'은 그로해서 생겨났다. 퇴임 후 그와의 교류는 이어졌다.

그가 퇴임한지 10년이 지난 뒤 '감사의 일기'를 쓴다며 초고를 보내왔다.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내용이 좋으니 이를 수필로 고쳐 보기를 권했다. 그 권유는 적중했고 「한 일흔 즈음에」라 題한 수필집을 상재했다. 그의 청으로 ‘跋文'을 내가 썼다.

개인적 삶의 양상 중 특유의 개성을 보여주는 이도 있다. 나는 그의 빈틈없는 일처리를 특유의 개성으로 보았다. 정년을 앞둔 사람이 해낸 엄청난 일처리를 보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 그날 밤 그는 눈을 감았다.

모르긴 하나 나도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그와의 인연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이후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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