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포해전과 임진왜란
1. 임진왜란
임진왜란(壬辰倭亂)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년까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을 말한다. 조일전쟁, 또는 정유재란과 구분하여 제1차 조일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 통상적으로 왜란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삼포왜란과 같은 이른바 '일본인들의 소요'가 아니라 '국가 간의 전쟁'이므로 이러한 명칭은 옳지 않다. 일본은 개전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중반에 이르면서 조선군과 의병의 강렬한 저항, 명나라의 조선 지원 등에 의해 7년 만에 패배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사건이었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대체로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를 전기와 중기로 구분한다. 임진왜란은 출동(168일), 전투지역29곳(이순신26,원균3) 참가 전투함(한국1353 척, 일본1944척),전과( 73·1격침, 23척 나포) 일본전과---39척 침몰
2. 이순신의 중요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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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포해전 |
경상우수사 원균이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균요청. 원균과 이순신의 연합함대. 26척 전원 격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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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산도 해전 |
견내량 전투라고도 하며 확익진으로 유명하다. 이순신,이억기,원균 합동함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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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명랑해전 |
13척의 배로 333척을 무찌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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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량해전 |
임진왜란의 마지막전투 146/500척 200척 격침. 이순신 순직 |
3. 임진왜란 시 거제도 주변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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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옥포해전 |
거제시 옥포 2동에 위치한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의 침공에 의해 시작된 임진란 초기에는 왜군의 파죽지세로 진행되나, 5월 7일 전라 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이 경상우수사 원균과 함께 현재 대우조선이 위치한 옥포만에서 침략 행위 중이던 왜선 50여척 중 26척을 격침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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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율포해전 (1592.7.15) |
1592년 7월15일 거j제도 최북단 영등포 앞바다에 진출했다. 이때 율천 앞바다에 큰배5척과 작은 배 2척이 있다는 전갈을 받고 추경에 나셨다. 옥포앞바다까지 끈질기게 추적하여 육지로 도망가는 것을 사로잡았다. 율포해전을 마치고 송진포에서 있다가 7월18일 남해 앞바다에서 연합함대 해산 우리나라 선박이 빠른 이유? 일본은 돛이 한 개인데 비해 우리판옥선은 2개이며, 그리고 우리는 노 한 자루에 4-5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노를 저었으나 일본은 노 하나에 한명이 원칙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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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견내량해전(한산도 해전)1592.7.8 |
임진왜란 때인 1592년(선조 25) 7월 8일 조선군 함대가 한산도에서 일본군 함대를 대파한 전투. 7월 6일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우수사 이억기는 함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끄는 함대와 합류하였다. 통합함대의 전력은 총 72척이었다. 7월 8일 아침 조선군 함대는 당포 앞바다에서 견내량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함대를 유인하여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쳐 일본 함대를 포위하고 격파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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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문포 해전 (1594.8) |
1594년 8월경 왜군들의 움직임이 전보다 조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장문포 일대를 중심으로 연안 각 포구마다 집을 짓고 장기간 머무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아군은 권율이 이순신에게 비밀문건을 보내 군사를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11우 9일 견내량에서 곽재우, 김덕룡 등 육군을 싣고 장목으로 향했다. 일본은 배2척을 남겨둔채 산으로 도망갔다. 다음날 2차 침략 때에는 육지까지 공격하였으나 “일본은 지금 명나라와 화친을 논의 중이니 싸울 수 없다.”는 팻말을 꽂아두고 도주 하고 없었다. 이순신장군은 군사를 왜군의 소굴에 상륙시키는 것은 위험하고 지상군 병력이 절대 n부족한 점을 감안하여 11월18일 수륙군을 해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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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영등포 해전 (1594.10.1) |
1594년 10월1일 장문포 해전이 있기 직전에 영등포 전투가 있었다. 이곳에는 왜적이 200여채의 집을 짓고, 뒷산에는 나무를베고 땅을 깎아 토성을 쌓았으며, 선창에서 가리포까지 도진의홍 등 6,000여명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있었다. 10월1일 아침에 출항하여 항전을 요구했으나 모두 묻으로 도망가고 한놈도 항정하지 않았다. 해전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그래도 작전을 벌리고 군사를 동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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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칠천량 해전(가덕포 해전) |
1597년(선조 30)에 발생한 정유재란중 원균(元均)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에게 패한 해전. 일본은 명나라와의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 1월에 조선을 재침입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무고로 하옥되고, 대신 원균이 전라좌수사 겸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7월 8일 일본 전선 600여 척이 부산앞바다에 정박했으며, 일본수장인 도도[藤堂高虎]·가토[加藤嘉明]·와키자키[協坂安治] 등이 가덕도를 향해 웅천으로 가고 있었다. 이때 통제사 원균은 한산도 본영에서 경상우수사 배설(裵楔)에게 웅천을 급습하도록 했으나, 패하여 군량미 약 200석과 배 10척을 불태워 잃었다. 이에 도원수(都元帥) 권율은 원균을 불러 곤장으로 벌한 뒤 급히 한산도 본영으로 돌려보냈다. 본영에 돌아온 원균은 7월 14일 부산의 일본 전선을 급습하기 위해 3도수군의 전선 160여 척을 다 출동시켰다. 그런데 부산진포구의 일본 수군은 미리 조선 수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란작전을 유도했다. 게다가 갑자기 풍랑이 일어남에 따라 조선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공격목표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간신히 가덕도로 돌아왔는데, 여기에서도 일본 병선 500여 척의 추적을 받고 거제도의 영등포로 후퇴했다. 조선군은 밤에 보급품을 구하려고 영등포에 상륙했다가 잠복해 있던 일본 복병에게 급습을 당하여 약 400명을 잃고, 배를 타고 칠천량으로 후퇴하여 포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15일 밤에 도도·와키자키·가토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의 수륙양면기습작전에 말려들었다. 원균은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접전했으며, 경상우병사 배설은 전세를 보고 있다가 배 12척을 이끌고 도망갔다. 원균은 끝까지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여 결국 여러 장수들과 함께 도망쳤고, 일본군의 추격을 받아 죽은 조선 수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해전으로 3도수군통제사인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 충청수사 최호(崔湖)가 전사했다. 이로써 조선의 3도수군은 일시에 무너지고, 일본함대는 서쪽 해상을 향해 쳐들어가 일본군의 남원 및 진주로의 공격을 용이하게 했다. 조정에서는 이 패보를 듣고 크게 놀라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에게 흩어진 병력과 배를 수집·점검할 것을 명했다. 같은 달 22일에는 이순신을 다시 전라좌수군절도사 겸 3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충청수사로 권준(權俊)을 기용했으며 뒤이어 전라우수사에 김억추(金億秋)를 임명했다. 원균은 포위망을 뚫고 도망가다 고성군 춘원포라는데 상륙하는바람에 작살나고 목잘렸고 , 배설은 기냥 냅다 견내량을 지나서 충무까지 토끼는 바람에 12척의 배를 건진것입니다. 상륙하면 조선군은 육박전에 취약하기에 박살나거든요.배설은 결국 명량해전이 벌어지기 전에 또 토껴서 전란이 끝나 후 구미인가 선산 고향에서 붙잡혀 참형을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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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진왜란과 옥포대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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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균의 원병요청 |
• 195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그 다음날 부산진과 동래부과 함략되자 위협을 느낀 경상우수사 원균은 율포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원병을 요청한다. 4월18일 원병요청을 유보하였으나 4월26일 선조왕의 유서(諭書)를 이순신은 4월29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협의하여 출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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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원균의 합류와 |
• 5월6일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선 1척을 몰고와 당포에서 이순신과 합류. 그 당시 거제진장의 참여는 남해현령 기효근, 옥포만호 이운룡, 율포만호 이영남, 영등포만호 우치적, 지세포만호 한백록들이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을 타고와 합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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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라좌수영의 선단과 경상우수영의 산단 |
•1952 그 당시 왜적의 침략코스인 부산지역의 수군배치현황은 경상좌수사 박홍 판옥선45척(또는75척), 경상우수사 원균 판옥선45척(또는75척), 전라좌수사 이순신 판옥선25척, 전라우수사 이억기 판옥선25척정도로서 경상도에 판옥선을 집중배치 했다. 그러나 직접 공격받은 경상좌수사 박홍은 판옥선45척을 없애고 도망쳤으며 원균도 판옥선과 군사 다 없애고 1척으로 이순신에게 왔고 그 후에 숨어있던3척이 합류하여 4척이 된 것이고 병사들도 도망하여 전투인원도 아주 적은상태였다. 그리고 경상우수영의 전선이 6척만 참여한 것은 경상우수영 관하 18개 진영의 자체방어를 위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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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침투항로 |
•5월4일 전라좌수영의 진지 여수에서85척의 선단을 편성하여 출전 •5월5일 통영사랑도를 지나 고성 당포에 정박 •5월6일 원균의 경상우수영 한산도에서 합류(전선6척). 거제 송미포에서 1박. 여기서 송미포라는 지명은 현재 多大임. *다대의 지명: 부산 다대포진의 옛 진터인 거제도 남단 古多大浦임. (현재의 지명은 多大임) •5월7일 정오경 이순신이 이끄는 91척의 함대가 안개 낀 옥포만으로 진격하여 왜선 26척을 불사르고 왜군을 많이 사살함. •5워7일 오후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오다 합포에서 b5척, 적진포에서 11척을 격침시켰다. •5월9일 이순신과 이억기는 여수로 돌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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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승리 요인 |
•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군사작전 (확익진) • 해전 경험이 있는 장병을 돌격대로 선정( 1555년 을묘왜란 때 참전용사 130명 승선) • 지리에 밝은 수군이 선봉장: 합동함대 선봉장 옥포만호 이운룡, 좌측 경상우수사 원균은 중앙에서, 영등포만호 우치적은 우측에서 돌격함, • 첫째 우리 전함은 육중한 소나무로 만들어져 속도는 느리나 매우 견고했다. 반면 일본 전함은 삼나무로 만들어져 속도는 빠르나 선체가 약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해군은 주로 상대편 배를 들이 받았다(撞破戰術) •둘째 우리의 무기는 불화살과 대포(천지형황)를 이용했으나 일본은 조총으로 대항했으나 사정거리과 불과 50m 정도로 육지와 달리 효과적이지 못했다. (조총 50m, 대포 600~1200m) •셋째 정신적으로 해이한 일본 해군, 우리 해군이 힘을 못쓰자 일본해군은 자만심에 빠져 마을 점거하고 분탕질을 하고 있었다. 그 앞 엔 날 5월6일엔 율천성을 점령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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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오포대첩의 성과 |
•옥포대첩으로 병선은 모두 침몰시켰으나 일부 패잔병들이 국사봉 쪽으로 도망치므로 용감한 射夫를 선발하여 추적했으나 산림이 울창하고 험난하여 추격을 중지하고 장목면 영등포 앞으로 항진하니 그 때가 오후 3시경 이였다. 어느 듯 석양이 지는 오후5시경 척후선으로 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멀지 않는 바다에 왜적 5척이 지나갑니다.> 보고를 받고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니 마산 합포 앞바다에서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갔다. 다시 병선을 이끌고 은밀히 남포(의창군 구산면 남포리) 이동하여 밤을 지냈다. 8일 아침 수색을 하고 있던 중 저도를 지나 적진포(통영군 광도면 적진) 도착하여 빈배 11척을 불태워 버렸다. 다음날(9월1일) 이순신은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수영 여수로 돌아갔다.
이렇게 4월4일부터 8일까지 3일간 옥초, 합포, 적진포의 3해전을 합쳐 옥해전이라고 한다. (옥포해전의 성과) -적선 42선 격파(옥포 26척, 합포 5척, 적진포 11척) -노획물:정미 300여석, 노힉물자 5간 창고에 가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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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옥포대첩의 교훈 |
•나라의 흥망이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임진왜란의 첫 옥포대첩은 거제의 지명에 따라 크게 구제한 구국의 섬으로 만들었고 전승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남겼다. 1)왜수군의 선봉대 도오또오(藤堂)의 적선 26척을 박살내어 서쪽 전라도를 못 가게 만들었다. 2)왜 수군이 패전 하였으니 상륙하여 북진하는 왜 육군과의 통신 및 보급이 차단되었다. 3)우리 수군이 바다의 제해권을 잡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4)우리 수군과육상군 그리고 의병장령에 이르기까지 사기를 크게 높여 항전의 힘을 주었다. 5) 특히 옥포대첩 이후의 계속된 해전에서 연전연승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 일본의 대륙침략 야욕을 무산시킨 전투로 패전의 한 원인이 되었다 |
♣ 참고자료
(임진왜란 전 일본 수군과 싸여 전공을 세운 장군)
♣이성계: 활을 잘 쏘는 ‘신궁’ 이성계는 1380년 황산별 전투에서 적장 이지란을 활을 쏘아 목을 관통하여 적장을 죽이고 승리로 이근 장군.
경남도원수 박위: 1389년 창왕1년 경상도원수 박위는 전선 100여척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왜선 300여척을 불태우고, 고려인 100여명을 구해옴.
고려말 문신 정지: 1347-1391 공양왕 때 문신으로 육지와 바다에서 왜군을 무찌른 장수. 1382년 해도원수로서 진포(鎭浦)로 침입한 왜적의 배 50척을 격퇴했다. 1383년에도 남해의 관음포(觀音浦)에서 화포를 발사하여 왜선 17척을 불사르는 등 왜적을 크게 격파했다.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고려 말부터 조선초기가지 500여 차례 왜군이 노락질을 하자 세종은 상장군 이종무를 3군도체찰사로 임명하고 1419년 6월20일 전선 227척 병력 17,285명을 이끌고 대마도를 침략하여 왜선 129척을 소각하고, 120여명을 사살하고 가옥 2천 여 채를 불사르고 포로로 잡혀있던 131명을 구해왔다. 이 전투로 대마도 영주 ‘소다’는 조선관직을 받았으며 상당기간 조선의 섭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전투로 인해 거제도는 1271년 왜구의 침입으로 거창군 가조현으로 이동한 후 151년만인 1422년(세종4년)에 환군하였다.
☛. 일본 관련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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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고려) |
우왕(禑, 1364~1389) |
1374~1388 |
공민왕의 아들. 10세에 즉위하나 1388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에게 폐위됨. (이성계,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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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고려 |
창왕(昌, ?) |
1388~1389 |
이성계 등이 우왕을 내 좆은 후, 창왕을 내세웠으나 1년 만에 강화도로 좃겨나 10세 때 시해됨. (박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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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고려 |
공양왕(恭讓, 1345~1394) |
1389~1392 |
휘는 요.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위에 올랐으나 실권을 빼앗기고, 정몽주가 살해당한 후 폐위 당하고 고려는 멸망함. (정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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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
태조(太祖, 877~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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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8~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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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왕건(王建). 신라 궁예의 부하로, 부하에게 옹립되어 송도에 도읍을 정하고 왕위에 오름. 935년 신라와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함. (이성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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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조선) |
세종(世宗, 1397~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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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8~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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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는 도. 태종의 셋째아들. 집현전을 두어 학문을 장려하고,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해시계 등의 과학기구를 창제케함. 외치에도 힘을 써 북쪽에 사군과 육진, 남쪽에 삼포를 두었음. (이종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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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선) |
선조(宣祖, 1552~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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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7~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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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16세에 즉위. 이이, 이황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으나 당쟁과 임진왜란으로 시련을 격음. (이순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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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조선) |
순종(純宗, 1874~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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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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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척(拓). 고종의 둘째 아들.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겨 35년간 치욕의 일제시대를 보내게 됨. 이왕(李王)으로 불림. (우리나라 마지막 임금) |
이순신 장군 영정
옥포대첩 기념관 전경
언덕위에 세워진 옥포정
이순신의 영정이 모셔진곳
옥포대첩 기념탑
이순신 장군이 옥포출전기에 앞서 군인들에게 최초로 한 말
임진왜란 시 거제도에서 활동한 분들의 공신 (신,반,김,윤씨 그리고 옥씨도 한명이 있네요)
거제.통영 주변에서 주로 전투가 일어남
임진왜란 시 사용된 화기 ( 만약 최무선이 없었드라면---?
총통에 사용된 탄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