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제물론」을 읽고
주변을 둘러보면 네 편 내 편을 가르고 서로 자기가 옳다고 소리 높여 싸우는 모습뿐이다. 나 역시 나만의 기준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피로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이게 맞는데 왜 저걸 틀리다고 하지?’같은 생각들 말이다. 장자의 「제물론」은 이처럼 내가 옳다고 믿는 기준이 사실은 얼마나 좁은 우물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었고, 마침내 이 끝없는 갈등의 실체를 마주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가두고 있는 고정관념이자 아집인 성심, 즉 무형의 사슬이었다. 이에 장자의 「제물론」 본문과 이를 심도 있게 풀어낸 요해를 참고하여 인간의 편견을 깨부수는 장자의 깊이 있는 통찰을 따라가보고자 한다. 나아가 완고한 성심의 벽을 허물고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유연한 삶의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장자는 바람이 불어 삼라만상의 수많은 구멍들이 제각각 다른 소리를 내는 것을 ‘땅의 피리 소리’라고 했다. 사람들이 저마다 주어진 환경과 여건에 갇혀 선악시비를 다투는 모습이 딱 이 구멍들과 같다. 그러나 구멍 자체가 소리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듯, 그 배후에는 만물을 움직이는 우주의 절대적인 실체인 도의 움직임이 존재한다. 이를 온전히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분별을 넘어선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물의 고정된 개념에 얽매여 궤변을 늘어놓던 공손룡에 대한 장자의 비판은 인상 깊었다. 우리는 손가락 하나를 두고 ‘이것만이 진짜 손가락이다.’라고 우기던 공손룡처럼, 내가 가진 잣대만 절대적이라 믿곤 한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에 갇히는 순간 다른 수많은 가치는 배제되고 만다. 나아가 외물에 마음이 흔들려 독선에 빠지면, 결국 눈앞의 이익만 따지다 본질을 놓치는 조삼모사의 어리석음에 떨어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장자의 말대로 내가 가진 가치관의 뿌리가 얼마나 빈약한지 스스로 인정해야 한다. 거처, 식성, 아름다움의 기준이 동물마다 다르듯 우리 맞다고 생각하는 세속의 잣대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다. 인위적인 때가 묻지 않은 인간의 본심을 회복하라는 장자의 지론은 맹자가 말한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것과도 일맥상통하여 깊은 울림을 주었다.
물론 요해를 읽으며 장자의 논리가 결코 완벽한 것만은 아님을 깨달았다. 장자는 소문, 사광, 혜시 같은 명인들이 기술과 학문으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도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세상을 그저 자연 그대로만 내버려둔다면, 인간의 창의와 계발을 통한 문명의 진보와 발전은 완전히 멈추고 말 것이다. 유한한 소리를 통해서도 무한의 경지를 열어낼 수 있는 법인데, 장자는 무한이라는 개념에만 너무 집착한 듯 보인다. 또한 ‘진정으로 안다는 것은 명백하게 알려 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의 공허한 변론은 실천적 차원에서 다소 옹색하고 정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 꿈과 현실이라는 거대한 경계마저 허물어뜨리는 ‘호접몽’의 우화는 참으로 인상 깊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분별할 수 없는 절대적 무차별의 경지는 나와 타인의 경계를 지우고 모두를 평등하게 포용하는 태도를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물아일체의 경지야말로 장자가 말한 일관평등을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아울러 글의 말미에 이르러 시비의 차별을 두지 않으려는 장자의 입장이 유가의 중용설과 닮아있다는 요해의 분석 역시 흥미롭게 다가왔다.
장자의 「제물론」을 통해 내가 가진 생각의 한계를 과연 넘어설 수 있는지 깊이 고민할 수 있었다. 내가 무조건 옳다는 입장만 고수하며 남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매사 옳고 그름을 나누려 애쓰는 소모전은 결국 내 마음을 해칠 뿐이다. 이제는 내 안의 완고한 고정관념인 성심을 비워내고 굳은 잣대를 조금 내려놓아야 할 필요를 느꼈다. 만물의 개체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도의 흐름에 나를 맡길 때, 비로소 진정한 무형의 사슬을 깨부수고 진정한 안식의 세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세상을 향해 더 부드럽고 유연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내 마음을 지키고 평온을 얻는 진짜 지혜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