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이야기19
화전을 일구며 희망을 경작한 정선 사람들
독가촌으로 내려온 화전민들
어렸을 때 독가촌(獨家村)이 우리 동네에 생겼습니다. 갑자기 정부에서 집을 지어줘서 참 의아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왜 독가촌이라 하는지 몰랐습니다. 궁금하던 차에 어른들에게 물어봤지요. 어른들은 화전민(火田民)들의 집을 버덩에 지어주고 살게 한 마을을 독가촌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어렸지만 금방 이해가 되더라고요.
이제는 독가촌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곳곳에 독가촌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습니다. 화전민은 한데 어울려 마을을 이루어 살기도 했지만 불을 놓아 땅을 일궈야 하므로 드문드문 떨어져 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홀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한자로 홀로 독(獨) 자에 집 가(家) 자에 마을 촌(村) 자를 써서 독가촌이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화전민들을 마을로 내려오게 하려고 집을 한데 올망졸망 지었는데도 사람들은 똑같이 독가촌이라 불렀습니다. 요즘 정선 곳곳과 전국에 걸쳐 독가촌이라 불리는 마을 이름이 있는 원인이지요.
우리 동네 독가촌은 집의 구조가 특이했습니다. 집 한 채를 양쪽으로 나누어서 두 집이 살도록 지었습니다. 그래서 두 집이 마당을 같이 쓰고,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집 한 채를 같이 썼습니다. 도랑에 있는 우물도 같이 쓰고, 빨래터도 같았습니다. 어렸을 때라, 그 모양이 아주 이색적으로 보여서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생생합니다. 물론 우리 동네에 있던 독가촌은 헐려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화전민이 많지 않아서 독가촌도 두 가구가 사는 한 채뿐이었습니다. 그 당시 화전민 대부분은 이주 비용을 받아서 도시로 나갔기에 마을로 내려와서 살지 않았습니다. 어른들 말씀이 이주 비용으로 가구당 40만 원을 받고 떠났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화전은 1968년 법이 공포되어 시작한 후 완전히 정리한 시기는 1978년이었습니다. 물론 화전 중 옥토로 일굴 만한 땅은 정책화전민이라 하여 국가에서 정착 비용 20만 원을 주고 개간을 독려하기도 했지요. 정책화전민은 군유지나 국유지를 분할받아 개간했습니다.
당시 어른들은 화전정리 한 원인이 무장공비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화전민이 산에 집을 짓고 살면 무장공비들이 산에 숨을 수 있는 은신처를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1970년대 우리는 무장공비에 대한 식별 등에 대한 교육을 많이 받았습니다. 새벽에 옷이 젖은 채로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 담뱃값을 모르는 사람 등등.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합니다. 화전정리는 물론 무장공비가 원인이기도 했지만, 황폐해져 가는 산림을 복구시키기 위함이었지요. 그 당시 화전정리를 한 덕분에 지금 우리나라 산림이 풍요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버덩에 사는 사람들도 비료나 거름이 마땅하지 않아 곡식 소출이 적으므로 화전을 했습니다. 산촌의 사람들은 대개 화전을 해서 생계를 이어갔지요. 그러므로 독가촌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익숙한 만남이 있는 터라 버덩 사람들과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비탈밭에 거름 져 날라 심은 강냉이
정선은 특히 산이 많고 평야(平野)가 적은 지역입니다. 화전민이 참 많았던 원인입니다. 그래서 독가촌도 마을마다 형성되었습니다. 도시로 떠나지 못하고, 농촌의 독가촌에 살던 사람들은 삶의 터전이 버덩에는 없었습니다. 이들은 마을로 내려와 정부에서 지어준 독가촌에 살았지만, 농토가 산에 있으므로 매일 새벽마다 산으로 농사지으러 갔다가 저녁이면 내려왔습니다. 버덩에 살던 사람들이 화전을 하던 방식으로 독가촌 사람들도 농사를 지었습니다. 사실 산촌의 삶은 누구도 다르지 않았지요.
산촌 사람들은 그렇게 예전에 화전으로 일군 밭을 옥토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정부에서 마을과 가까운 장소의 화전은 계속 농사지을 수 있게 했거든요. 물론 화전정리를 강력히 단행한 지역은 농사를 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농토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어쩔 수 없이 비탈밭으로 가야 했습니다. 거름을 지고 산길을 오르는 일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생산된 곡식을 지고 집까지 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고요. 참과 점심을 해서 머리에 이고 비탈밭까지 나르던 여성들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습니다. 온몸에 땀이 흘러내리고 치마는 다리에 척척 감겼습니다. 머리에는 밥과 반찬을 이고 한 손에는 주전자에 막걸리까지 담아 들고 산길을 올랐거든요. 고무신에는 땀이 채어 미끄러지기 일쑤였고요.
화전은 처음 불을 놓았을 때 부덱이, 그다음 화전, 그다음은 삭전이라 합니다. 부덱이나 화전일 때는 아직 거름기가 있어 농사가 잘됩니다. 삭전은 거름기가 없어 땅이 거칩니다. 그나마 경사도가 낮아 오래도록 밭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요. 산촌 사람들은 삭전을 옥토로 만들고자 거름지게를 지고 한 시간 이상 산으로 향해 올라야 했습니다. 소똥을 한 움큼씩 밭이랑에 놓고 그 위에 강냉이 씨를 두 개씩 놓고 흙을 괭이로 툭툭 쳐서 덮었습니다. 그렇게 심은 강냉이가 가을이면 그래도 여물어서 수확할 수 있었습니다.
강냉이밥 묵나물로 겨우살이 한 사람들
맷돌에 강냉이 알갱이를 넣어 맷손을 돌리면 사절치기 강냉이밥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맷돌에 강냉이를 넣어 돌리면 네 가닥으로 쪼개져서 사절치기라 했습니니다. 정선 사람들은 그렇게 강냉이밥을 먹으면서도 여유가 있었지요.
“사절치기 강낭밥은 오글박짝 끓고요/ 애호박 된장국 끓거든 잡숫고나 가세요.”
“사시장철 고기반찬은 맛을 몰라 못먹나/ 사절치기 강낭밥으는 맘만 편하면 되잖나.”
정선사람들이 불렀던 정선아라리 가사입니다. 참 정감 있는 표현입니다. 가난하지만 강냉이밥과 된장국이나마 이웃과 나누고자 했던 마음이 따뜻하게 다가옵니다. 아무리 거친 강냉이밥이지만 맘만 편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만족할 줄 알고, 나눌 줄 알고,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정선 사람들이었지요. 누구든 밥때가 되면 그렇게 밥 한 그릇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지나가는 장사꾼도, 옆집 아이들도, 길손들도 그렇게 밥을 먹고는 고맙다는 인사만 하면 그만이었지요.
산촌의 초가집 처마 밑 바람벽에 이곳저곳 걸려 있는 묵나물 덩이는 강냉이 타래와 함께 정선의 또 다른 겨울 풍경이었지요. 어느 집으로 가도 같은 풍경이 연출되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배부른 풍경이라고 할까요. 따뜻한 강냉이밥에 묵나물을 삶아 무치면 배고픔을 면할 수 있었으니, 어찌 풍족하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 강냉이가 화전을 하던 비탈밭을 호리소로 갈아 소똥을 놓아 키운 알찬 곡식입니다. 정선은 겨리보다는 주로 호리로 밭을 갈았습니다. 경사가 심해서 소 두 바리로 밭을 갈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물론 재주 좋은 사람들은 겨리로 밭을 갈기도 했습니다. 비탈밭에서 쟁기를 메어 밭을 갈아 거둔 강냉이에 봄날 산에 올라 풀숲을 헤치며 어렵게 뜯어말린 묵나물입니다. 정선의 산촌에서 겨울을 날 수 있는 정말 든든한 먹거리였지요.
어렵게 거둔 곡식이어서 더 인정을 베풀었던 것일까요. 아니 더 여유로웠던 것일까요. 그렇다고 이밥을 먹는 꿈을 꾸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밥에 고기반찬 맛을 몰라서 못먹나/ 사절치기 강냉이밥도 맘만 편하면 되잖소.”
이밥 먹어보기를 바라는 소원들은 있었습니다. 다만 현실이 이밥에 고기반찬을 허락하지 않았을 따름이지요. 그래도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가족들이 있고, 언젠가는 이밥에 고기반찬을 먹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