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사람사는이야기

이학주의 정선이야기22-양반전

작성자이학주|작성시간25.11.10|조회수33 목록 댓글 0

이학주의 정선이야기 22

 

정선 이야기의 백미, <양반전> 읽기

 

<어머니의 자랑, 전봉집>

  “너희들 큰 외할아버지께서는 큰 학자셨다. 정선에서는 알아주는 정말 대단한 분이셨다.”

늘 어머니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는 그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지요. ‘뭔가 뛰어나신 분이 어머니 큰 아버지셨구나’라고 인식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어머니 말씀을 떠올려 함자를 찾아보았습니다.

  “전봉집(全鳳集). 호는 도은(桃隱), 정선인, 경사(經史)에 밝고 시문(詩文)에 능하여 향교 현판문, 비문, 상량문, 정선군지 초고(草稿) 등 문명(文名)이 일향(一鄕)에 떨치고 문하에 수업하는 후생이 그치지 않은 학자였다.”

  󰡔정선군지󰡕(2004) 인물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정선 전씨이며, 학자로 정선 고을에서 이름을 떨친 분이었지요. 게다가 󰡔정선군지󰡕를 처음 집필하신 분이었다니, 정말 정선에서는 최고의 학자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 외가에 이런 분이 계셨다니,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지금도 큰 외할아버지의 제자들이 정선 고을에는 많을 것입니다. 그 덕분에 전봉집 전교의 조카이면서 제자인 제 외삼촌 전기남은 중학교 졸업 후 마을에서 훈장을 몇 년 하시다가 상경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 사서삼경을 모두 외우셨다는 대단한 천재였지요. 입사 시험지에 빼곡하게 사서삼경을 써서 합격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문래리에 사시던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약주만 드시면 조상들의 내력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이냐고요. 조상들의 선행 이야기였습니다. 조상 누구는 무슨 벼슬을 했고, 무슨 좋은 일을 했다는 얘기였습니다. 너무 어려서 그때 들었던 조상들 이야기는 이제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그래도 그때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조상들 이야기는 어린 나의 행실을 바로 하는 지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이는 어렸지만, 조상들께 누가 되지 않고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었다고나 할까요.

  이처럼 좋은 일을 한 집안의 학자와 조상 이야기는 어느 집이나 다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 가문에 대한 인식은 남달랐으니까요.

  이렇게 훌륭한 학자나 조상 이야기와 더불어 정선에는 웃음을 주는 양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양반전>입니다.

 

<조선조 최고 이야기꾼의 해학>

  연암 박지원이 쓴 9개의 전문학(傳文學, 한문소설) 가운데 하나인 <양반전(兩班傳)>은 정선을 알리는 최고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양반전>을 읽다 보면 무릎을 탁 소리 나게 치면서 포복절도하게 됩니다. 짧은 소설 속에 연암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넣었다고나 할까요. 해학(諧謔)의 극치입니다. 그럼 이런 익살스럽고 풍자적인 작품은 어떻게 나왔을까요.

  연암은 18세기 우리나라 최고의 작가였습니다. 오죽하면 임금님부터 연암의 글을 애독하는 독자가 됐을까요. 임금님은 사대부와 궁궐에서 추구하는 옛 문체인 고문(古文)과 다르다고 해서 패사소품체(稗史小品體)라 했습니다. 당시 사대부들이 쓰던 문체를 깨뜨려 새로운 형식으로 글쓰기를 시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정된 틀을 벗어났다고나 할까요. 요즘으로 말하면 진정 칭찬받을 글쓰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새로움’이며, ‘낯설게 하기’라는 글쓰기 방법입니다. 제가 보기엔, 사실 󰡔논어󰡕와 같은 사서(四書) 형태의 이념(理念) 글쓰기가 아니라, 󰡔주역󰡕처럼 실용(實用)과 변화(變化)를 추구하는 글쓰기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사대부들은 자신의 틀을 깨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래서 마찰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조선 후기에 살았던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김려, 이옥 등을 일러 실학자(實學者)라는 말을 씁니다. 실학자는 유학(儒學)을 새롭게 해석하고 실용에 적용해 가고자 했던 학자들입니다. 그래서 기존 유학에서 주창하던 정덕이용후생(正德利用厚生)의 기치를 박지원은 그가 쓴 <홍범우익서(洪範羽翼序)>에서 이용후생정덕(利用厚生正德)으로 바꾸자고 합니다. 곧, 바른 덕목인 정덕을 위해 이용후생을 도구로 썼던 기존의 사상에서 이용후생을 한 후 정덕으로 가야 한다고 정반대로 주장했습니다. 배고파서 죽으면서 바른 도덕만 외치기보다는 먼저 백성을 배부르게 먹여 살린 후에 바른 덕을 가르치자는 논리입니다.

  이를 위해 박지원은 실제로 글을 써서 세상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열하일기󰡕, 󰡔과농소초󰡕 등은 정말 명저이지요. 책 속에 담긴 글마다 어찌 그렇게 가슴을 짜릿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벌써 그가 저승으로 간 지 220년(2025년 현재)이나 되는데도, 마치 우리 앞에서 마주 보고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소설을 통해서 그는 세상의 변화를 깨우쳤습니다. <민옹전>, <광문자전>, <허생전>, <호질> 등등의 작품을 통해서요. 그 가운데, <양반전>은 당시 양반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정말 잘 드러냈지요.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양반전>을 물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바로 정선 고을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양반전>을 읽으면서 양반이라 하면 곧바로 정선이라는 등식을 생각하게 됩니다.

  정선아라리 사설이 상징과 비유를 잘 쓰고 웃음이 넘쳐나는 해학과 골계가 두드러진 이유를 견주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연암이 정선아라리를 듣고 느낀 소감에 정선 고을 양반을 주인공으로 택했을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양반의 두 얼굴과 천민 부자>

  정선아라리에 이런 사설이 있습니다.

  “정선 앞에 조양강물은 소리 없이 흐르고, 옛 조상 옛 시는 변함이 없네.”

  어쩌면 박지원의 <양반전>에 나오는 내용을 이렇게 정선아라리 사설에 잘 담았을까요. 세월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양반의 모습입니다. 이 사설의 옛 조상 옛 시는 좋은 뜻은 아니라 봅니다. 이 사설의 뜻처럼, <양반전>에 대하여 박지원은 <방경각외전>의 자서(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그 저작 경위를 밝힙니다.

  “사(士, 선비)는 천작(天爵)이니 사(士)와 심(心, 마음)이 합하여 지(志, 뜻)가 된다. 그 뜻[志]은 어떠하여야 할 것인가? 권세와 이익을 도모하지 않고 현달하거나 궁곤하여도 선비임을 잃지 말아야 한다. 명절(名節)을 닦지 아니하고 단지 문벌이나 판다면 장사치와 무엇이 다르랴? 이에 <양반전>을 쓴다.”

  그런데 <양반전>에서 선비인 양반은 고을의 환곡을 빌려 먹고, 갚을 수 없으니, 부자에게 양반을 팔려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양반의 아내가 이렇게 얘기했을까요.

  “여보, 당신은 한평생 글 읽기만 부질없이 좋아했군요. 이런 정도의 환곡 갚기에도 아무런 효과가 없구먼요. 양반, 이런 양반이야말로 한 푼어치 값도 못 되는구려.”

  양반을 향한 아내의 한 마디는 고지식하여 변통하지 못하는 사람의 표본으로 나옵니다. 선비임을 잃은 양반의 모습이지요. 아내에게마저 무시당하는 모습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양반을 천민 부자에게 판 양반의 행실은 정말 가관(可觀)입니다.

  그다음에 정선군수가 천민 부자에게 문서로 작성했던 양반의 행실은 더욱 웃깁니다. 비록 참 양반을 일컫는 말이라 하나, 사람의 생활이 아니지요. 기침도 내뱉지 못하고, 방귀도 뀌지 못하고, 아무리 추워도 화롯불을 쬐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천민 부자는 실망합니다. 신선처럼 생각했던 양반이 아니었거든요. 문서를 바꾸어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정선군수는 양반의 횡포를 늘어놓습니다. 이웃집 소를 몰아다가 내 밭을 먼저 갈고, 동네 농민을 잡아 내 김을 먼저 매도 아무도 괄시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천민 부자는 손사래를 치면서 그만두라 합니다.

  “아이구, 그만 두시유. 제발 그만 두셔유. 참 맹랑합니다. 그려. 나를 도둑놈이 되라 하시유.”

  그러고 천민 부자는 그 후 다시는 양반이란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하며 작품은 끝납니다. <양반전>의 작가 박지원은 당시 양반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양반의 이중성을 그대로 작품에다가 나타냈습니다. 왜 그랬는지, 직접 말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정선군 홍보와 관광상품>

  박지원의 <양반전>은 배경이 정선군입니다. 아주 좋은 정선 홍보의 도구로 쓸 수 있습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호재(好材)라 합니다. 󰡔열하일기󰡕 등 연암 박지원의 이미지를 모두 가져올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요. 바보 같은 양반이 살았던 고을에 초점을 맞춘다면 쓰지 말아야 하고, 참 양반의 깨우침이 있는 고을에 초점을 맞춘다면 정말 가치 있는 재료입니다.

  양반의 표본인 선비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입니다. 평상시에는 학문을 익히며 사물을 연구하여 백성을 깨우치고, 전쟁이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걸고 앞장서서 나가 싸우는 사람이 선비입니다. 만약 개인의 이익만 탐하는 양반이라면, 이는 선비가 아니라 물질을 보고 쫓는 모리배일 뿐이지요. 이런 이중성을 분명하게 드러낸 작품이 <양반전>입니다. 이를 우리는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참 양반의 모습을 가진 고을로요.

  물론 1966년에 최인현 감독이 영화로 만든 <양반전>이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양반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한 웃음을 유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처럼 정선의 자연과 정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넣은 영화, 뮤지컬, 연극, 팝송, 트로트 등의 공연예술로 만들고, 소설, 시, 동화 등의 문학예술로 만들고, 조형물도 설치해서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양반 체험시설은 당연하지요. 이런 이미지 창출은 참 양반의 고장 정선을 부각하는 일입니다. 정선에 가면 한국의 양반이 가진 참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반과 선비는 한국 고유의 용어이며, 한국을 대표하는 상징을 띱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