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정선이야기 23
주렁주렁 강냉이 타래 걸린 가을
<가을이어서 좋았던 날>
“이제 가자!”
조반이 끝나자 할아버지는 가자고 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가족들은 모두 압니다. 오늘은 메밀밭에서 메밀을 베어 주저리를 만드는 날입니다. 주저리는 여문 메밀을 베어 밭에다가 가려 놓은 낟가리입니다. 메밀밭이 멀지 않아 다들 낫을 들고 할아버지 뒤를 따랐습니다.
“올해는 메밀이 잘 여물었구나.”
밭에 도착하니, 메밀대 아래쪽에는 메밀 알이 까맣게 여물었고, 위쪽에는 아직도 꽃이 몇 개씩 피어 있었습니다. 더 두면 알이 대공에서 다 떨어져 수확량이 많이 줄어듭니다.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은 경력이 있는 터라, 다들 메밀을 베는 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메밀을 베어서 이곳저곳 밭 가운데에 주저리를 만들어 갔습니다.
“거참, 보기 좋구나.”
메밀 주저리가 쌓여 가는 모습을 보고 할아버지께서 흐뭇하신 듯 말씀을 했습니다.
“예, 메밀이 양도 많고 잘 여물었네요. 가을 날씨가 좋아서였나 봅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말씀을 이어받았지요. 무엇보다 농사꾼에게는 낟가리가 높아지는 모습에 절로 배부르지요. 그렇게 말씀을 나누는 사이에 우리는 몸을 빨리 놀리며 메밀을 베었지요. 언제 다 벨까 걱정했던 메밀밭은 점심때가 다가오자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메밀을 베어 주저리를 만들어 두었다가 바싹 마르면 지게에 져 마당으로 가져옵니다. 마당 둘레에는 메밀이 가득 쌓이지요. 정말 산더미처럼 메밀 더미가 쌓이고 마당 가운데를 비워서 탈곡할 자리만 남겨둡니다. 이미 마당 고르기가 끝난 상태였습니다.
<마당 고르기는 추수의 전초>
아버지는 조반을 먹은 후 소쿠리를 얹은 지게를 지고 대문을 나섰습니다. 소쿠리 위에는 삽 한 자루가 올려 있었고요. 얼마 후 붉은색 참 진흙을 소쿠리에 담아왔습니다. 마당 옆 한쪽에는 진흙이 쌓였고, 조금 후 초롱에 물을 담아와서 진흙 가운데를 오목하게 하고 뿌렸습니다. 흥건하게 진흙물이 담겨 있었지요.
“얘들아, 마당에 있는 작은 돌을 주워내라.”
이미 마당은 빗자루로 깨끗이 쓸었습니다. 그런데도 마당 바닥에는 작은 돌이 여러 개 보였지요. 여름 내내 장마와 폭풍이 내리면서 마당의 고운 흙을 씻어낸 탓입니다. 한여름 비가 많이 오고 회오리바람이 불 때면 마당 가운데 살아 있는 물고기가 떨어져 있기도 했지요. 하늘이 마당 가운데 떨구고 간 물고기였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워낙 세서 물을 끌어 올리고 가다가 힘이 약해지면서 떨어뜨려 생긴 현상이었지요. 이럴 때 마당의 고운 흙이 파이고, 바닥 속에 있던 돌이 겉으로 드러납니다.
“예.”
아버지의 한 마디에 우리는 이곳저곳 다니면서 넓은 마당의 돌을 주워냈습니다. 삽사리도 아이들을 따라 이리저리 꼬리를 치면서 뛰놀지요. 그렇게 돌을 고르고 나면 이미 섞어놨던 진흙물을 마당에 흥건히 뿌립니다. 그리고 볏짚으로 만든 솔을 들고 맨발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골고루 진흙물이 퍼지도록 합니다.
어느새 마당은 고운 진흙을 옷처럼 입었습니다. 그렇게 마당에 진흙을 덮어 고르면 사람도, 개도, 닭도 아무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발자국이 나면 안 되잖아요. 완전히 굳어서 딱딱해질 때를 기다리는 것이지요. 햇볕이 잘 드는 날이면 한나절이 채 안 돼 마당은 딱딱하게 굳습니다. 그러면 마당에서 가을걷이할 준비가 끝납니다. 모든 가을걷이의 끝은 마당에서 이뤄지니까요.
<달빛은 낮 햇살>
“밥 든든히 먹고 져 와라.”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이 듬뿍 담긴 말이었습니다. 5리가 넘는 밭에 가서 옥수수며, 콩이며, 귀리며, 볏단 등을 지게에 지고 와야 했습니다.
정선의 가을걷이는 참 고된 현장이었습니다. 대개 논밭이 집과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요. 조금이라도 소출을 더 올리려고 산 아래에 살아도 화전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1970년대에 화전정리가 끝났어도 마을과 가까운 밭은 경작을 지속했습니다. 집 주변의 오랍드리 삭전에만 곡식을 심어서는 가족이 풍족하게 살 수 없어서였습니다.
“저녁밥 먹고 해요.”
짧은 가을 해는 빨리도 졌습니다. 산골에는 산과 산이 가로막혀 어둠이 먼저 찾아들었지요. 그러면 잠시 쉴 겸 저녁을 일찍 먹습니다. 아직 모기가 사라지지 않은 탓에, 마당에는 모깃불이 피워지고요. 멍석 위에는 감자와 호박이 밥상 위에 가득 차려집니다. 약간 싸늘한 기운도 느껴지는 저녁입니다.
“아이 배부르다.”
막걸리 한 잔을 쭈욱 들이키고,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도 옆에서 막걸리 한 잔을 마십니다. 비록 삶은 감자와 호박이 전부지만, 흡족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입니다. 되호박을 삶아 먹는 시기도 이제 마지막입니다. 된장을 넣어 슥슥 비벼 먹는 되호박은 정말 일품이었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후 달이 하늘에서 밝아옵니다. 밝은 달빛은 마당 가에 앉아 강냉이 타래를 묶어서 달기에는 안성맞춤이었습니다. 강냉이 타래를 걸려고 마당 가에는 큰 나무 기둥을 Y자로 박고, 사이에다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의 큰 나무를 걸쳐 놓았습니다. 몇 개의 강냉이 타래를 만들어도 끄떡없지요.
“이제 들어가서 자자.”
밤 10시가 넘어가자 도저히 피곤하여 일을 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졸음이 쏟아지기도 하고요. 달이 뜬 밤이면, 이런 풍경은 자주 볼 수 있습니다. 밤을 낮 삼아 일했습니다.
<탈곡의 흥겨움>
“탁! 탁! 탁! 와롱! 와롱! 와롱!”
이 의성어는 마당에서 탈곡하는 소리입니다. 정선에서는 마댕이라고 불렀지요. 타작, 탈곡이라고도 합니다. 마당을 진흙으로 고르게 한 위에서 펼쳐지는 마댕이[마당질] 장면이지요. 훌치기[벼훑이], 태질, 도리깨질, 탈곡기 등을 사용해서 마댕이를 했습니다. 벼는 탈곡기를 주로 사용하고요. 메밀이나 콩은 도리깨질로 알곡을 털었습니다. 정말 분주하게 하루를 보냅니다.
오늘은 메밀 마댕이, 내일은 콩 마댕이, 모래는 벼 탈곡 등 매일 이어졌습니다. 옆에서는 풍구를 돌려 겨를 털어내고요. 알곡을 가마니에 담았습니다. 온 식구가 매달렸습니다. 어른들은 집집이 돌며 품앗이를 했습니다.
정선의 가을은 언제나 풍요로웠습니다. 앞마당 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던 붉나무 잎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추수가 시작됩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식구들은 모두 추수에 동원됐습니다. 올해도 정선 사람 모두 이렇게 풍요로운 가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