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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 나눔터

단풍투어하는 "메노나이트"는 어떤 사람들인가?

작성자Frank|작성시간13.09.30|조회수1,194 목록 댓글 0

 

10월5일 단풍투어하는 메노나이트, 그들의 삶을 소개합니다.

 

아미쉬(메노나이트)는 어떤 사람들인가?
성경 말씀에 따라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

 

 

▲ 세상과의 구별됨을 중시하여 현대 문명이나 사회와 거리가 먼 아미쉬 마을. 

 

아미쉬 교도들은 ‘재세례파(Anabaptist)’라고 하는 기독교 개혁 세력에서 비롯되었으며,

메노나이트와 후터리안 등과 뿌리를 같이 한다.

근세 초기 유럽에서는 가톨릭에서 루터· 칼뱅· 쯔빙글리 등이,

종교 개혁을 단행해 개신교가 만들어졌다. 재세례파는 쯔빙글리의 제자들이었으나,

쯔빙글리가 처음에 표방했던 개혁 사상에서 후퇴하자,

1525년에 다시 떨어져 나와 형성된 ‘제3의 기독교도’들이다.

종교 개혁 당시부터 이들은 국가 교회와 전쟁을 반대하고 병역을 거부한다는 이유에서,

가톨릭과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다.

이들은 당시에 유행하던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무효화하였으며,

성인이 되어 자신의 순수한 신앙의 결단으로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주장하여

‘재세례파’라는 별칭을 얻었다.

가톨릭의 사제였던 네덜란드인 메노 사이몬즈(Menno Simons)가 개종하여

‘재세례파’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이후 이들은 ‘메노나이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1693년, 스위스 메노나이트였던 야콥 암만(Jacob Amman)은 규율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징계 문제와 관련하여 메노나이트가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며,

따로 떨어져 나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들은 암만의 이름을 따서 아미쉬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미쉬는 메노나이트에 비해 보수적이며 공동체 중심의 생활을 중시하고,

현대 문명과 고등교육을 거부하며 사회와 거리를 두고 있다. 

반면 메노나이트는 다소 진보적 경향을 띠며 고등교육을 허용하고,

기술 문명을 수용해 일반 사람들과 소통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내에서도 생활 규정이나 공동체 내 의사결정의 차이 등에 따라, 

다양한 그룹으로 나뉘기도 한다. 

그러나 아미쉬와 메노나이트는 역사적으로 같은 근원을 가지고 있어,

서로 다른 점보다는 같은 점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 아미쉬와 메노나이트 내에서 각 그룹마다 여성들이 서로 다른 커버링(두건)을 사용함으로써,

구별을 하고 있다. 커버링의 종류가 열 가지도 넘었다. 

 

 

 

다음은 아미쉬와 메노나이트가 강조하는 다섯 가지 원칙들이다.

첫째, 철저하고 타협없는 성경 말씀 중심의 생활이다.

이들은 가톨릭 교회가 중세 시대를 거치면서 만들어낸 수많은 전통과 의식을 반대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복종만을 강조했다. 이들 교회에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다.

이들의 독특한 문화는 성경 말씀에 대한 그들의 해석과 말씀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연관이 깊다. 

둘째, 교회와 국가의 분리이다. 가톨릭은 애초부터 세속 권력과의 결탁으로 형성되었으며,

개신교도 역시 근세 초 유럽의 민족 국가 형성 과정에 깊숙히 개입한 반면,

이들은 국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철저히 독립된 교회를 추구해왔다. 

재세례파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로 평가된다.

셋째, 교회 공동체 가입은 성인이 되어 자발적인 의사에 따른 것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와 결단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세례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이되어 세례를 다시 받을 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있다.

또한 이들은 교회가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돌볼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고,

사회보장제도나 보험제도를 이용하는 것을 거부한다.

누군가 결혼하게 되면 공동체 전원이 모여서 그 신혼부부가 살 집을 만들어 주는 전통도

여기에 근거한 것이다.

 

 

 

 

 

▲ 이 그림은 자기를 쫓는 보안관을 구출하고 화형을 당했던 재세례파인 더크 빌렘스의 일화를 묘사한 것이다

 

넷째,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강조이다.

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절대로 폭력을 행사하거나 소송하지 않으며,

어떠한 전쟁도 거부하고 정당방위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560년대 말 겨울, 네덜란드인 더크 빌렘스(Dirk Willems)라는 사람이 재세례파라는 이유로,

한 보안관에게 쫓기고 있었다. 빌렘스는 얼어붙은 강을 안전하게 건넜으나,

그를 쫓던 보안관은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빌렘스는 되돌아가 그 보안관을 구출하고 나서 체포되어 화형을 당했다고 한다.

다섯째, 세상과 구별됨을 강조한다. 이들이 현대 문명과 거리를 두고 생활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옷차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은 세상 사람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어 연단의 삶을 살기 위해,

값을 치르는 것을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삶 속에서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고 믿는다.

 

 

 아미쉬 Amish, 그들은 누구인가?

 눈에 튀는 특이한 외양을 하고 문명의 이기를 멀리 한 채 전통적 삶의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적 신념을 지켜내기 위하여,

겪어야만 했던 고난과 은둔의 역사가 그들에게 있었음을 알고, 이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메노나이트 Mennonite’와 ‘아미쉬 Amish’의 태동  

 

 끊임없이 이어지는 감시와 박해 속에 곳곳으로 흩어진 재세례파의 지도자들이

1527년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지역에 있는 Schleitheim에 모여 비밀 회합을 가졌다.

그들은 재세례파 분리의 근간이 되었던 'Brotherly Union(형제의 동맹)의 선언’을 보다 진전시켜,

재세례파 교리를 확고하게 밝힌 'Schleitheim Articles(슬라이타임 조약)'를 채택하였다.

 

 이 조약에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일곱 개 항목이 담겨져 있으며,

이는 아미쉬 교도들의 기본 교리가 되어 오늘 날까지 그대로 지켜져 오고 있다.

 

- 유아 세례의 반대와 성인 세례의 실행

- 잘못을 저지른 교도들에게 대한 경고와 파문의 실천

- 세례를 받은 교도에 한하여 성찬식 참석 허용

- 외부 세상의 악으로부터의 격리와 폭력의 거부

- 교회 사역들의 품위 있는 인격과 교도들을 감동시키는 설교

- 정치와 종교의 분리, 공공 사무실 유지나 공직 종사 금지

- 교도들에 대한 서약을 지양하고 언약을 중시

 

 

      

      메노나이트의 창시자  Menno Simons의 초상

 

그러한 모임이 있은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며,

이어진 은둔 생활의 영향으로 재세례파에는 전면에 나서는 강력한 지도자가 없었으며,

1536년에 이르러 네덜란드 가톨릭 사제 출신으로써 개종을 한 Menno Simons(메노 시몬스)가

재세례파에 널리 알려진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곳곳에 산재해 있는 다양한 재세례파 그룹들을 하나로 통합하는데 주력하였으며,

특히 자신의 왕성한 저술 활동을 통하여 재세례파의 교리를 확산 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각 교파의 지도자 이름을 따 교파들의 이름을 정하는 것이 일반화되어있었던 영향으로,

재세례파들에게도 지도자 Menno Simons의 이름을 따‘Mennists' 'Mennonists' 또는 ‘Mennonites’등,

다양한 이름이 붙여졌으며, 시간이 흐르면서 ‘Mennonites'로 일반화 되었다.

 

 Menno Simons가 세상을 떠난 후 70여년이 지난 1632년에 메노나이트의 지도자들이,

네덜란드의 Dordrecht에 모여 재세례파의 교리를 재정리하고 명문화하였다.

 

‘Dordrecht Confession of Faith (도르드렉트 신앙 고백)’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기록에는,

Trinity(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믿음, 예수의 강생과 속죄, 성경 우선,

죄악으로부터의 구원 등 그들이 믿는 신앙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성인 세례,

성찬식과 세족례의 실행 등에 관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여기에는 비순응주의자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하던 당시의 여타 교파들과는

달리 잘못을 저지른 교도들에 대한 징계 수단으로 기피(shunning)와 파문(banning) 등,

비폭력적인 처벌 방법을 정한 ‘Meidung(마이덴: shunning의 뜻을 가진 독일어)'을 명시하였다.

 

 이러한 징계 조치는 죄를 지은 교도로 하여금 회개를 촉구하고,

공동체내 다른 교도들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차단하며,

공동체의 신망을 지켜나가기 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모든 교도들은 징계를 받은 자가 회개함으로써 처벌이 철회될 때까지,

함께 식사하는 것을 포함하여 일체의 의사소통과 접촉을 한시적으로 차단토록 하였다.

 

 

 

 

 

        아미쉬 탄생지인 독일, 프랑스, 스위스 국경지역에 위치한 Alsace 지역 주변도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메노나이트 교파 내에도 또 다른 보수지향적 개혁 그룹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스위스 메노나이트 교회의 젊은 장로 Jacob Amman(제이콥 암만: 일부의 문헌에는 Ammann)과

그를 따르는 소그룹의 추종자들은 메노나이트 교파가 당초의 교리에서 벗어나,

또다시 세류에 따라 흐르고 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들은 Menno Simons의 저술 내용과 ‘Dordrecht 신앙 고백’에 담긴 교리를,

보다 철저하게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성경의 해석을 위한 친교의 모임을 매년 1회에서 2회로 늘리고, 세족례를 철저히 실행하며,

교회의 규율을 어긴 교도에게 대한 기피와 파문을 보다 엄격하게 집행하여야 한다고 촉구하였다.

 

 특히 그들은 교회의 순수성 확립을 위해서는 징계 받은 자에 대한 완전 격리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여야 하며, 따라서 징계 받은 자에 대하여는 배우자라 할지라도,

그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잠자리를 함께 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메노나이트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러한 요구에 대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고,

마침내 Jacob Amman은 추종하는 교도들과 함께 Alsace 지방에서 또 다른 분파를 이루어 나갔다.

 

 지도자 Jacob Amman의 이름을 따 ‘아미쉬(Amish)’라 이름이 붙여진 그들은,

몇 년이 지난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메노나이트 본류에 합류하려고 시도하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독자적인 종파를 이루어 나갔다.

 

 하지만 분리된 이후에도 아미쉬 교도들은 모든 면에서 뿌리를 같이하는 종교적 배경을 바탕으로,

메노나이트 본류와 상호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주요관심사에 관하여 적극적인 협력관계를 유지하여 왔다.

 

 그러한 상호 유대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늘 날 대부분의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아미쉬를,

또한 아미쉬 교도들은 스스로를 ‘메노나이트의 가장 보수적인 사촌’이라고 여기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 기금 모금 행사장에 나온 메노나이트 여인들 

 

 
 
 
 
 

 

 

 

 

 

 

 

 

 

 


 

 

500년 전과 변함없는 그모습 그대로의 공동체
 
아미쉬인들은 5백년 동안 거의 변함없는 전통을 따른다.

집에서는 여전히 '펜실베이니아 독일어'라 불리는 독일 사투리로 말한다.

아미쉬 신앙의 가장 큰 부분은 교회와 공동체의 생활 계율과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미쉬인들은 '오르드눙(규율)'이라는 엄격한 육체계율에 따라 행동하고

옷을 갖춰 입는다. '세속적인 방식'을 차단하기 위해,

현대문명(자동차, 전화, 텔레비전, 전기)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옷차림을 갖춘다.

아미쉬 남자들은 재킷에 단추나 접는 깃을 달지 않는다.

그들은 옷을 여미는 데 단추나 지퍼보다는 대부분 훅과 아이어를 사용한다.

아미쉬교도들을 '훅과 아이어를 쓰는 사람들(hook-and eyers'라고 부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아미쉬 남자 교도들은 콧수염을 기르지 않지만,

결혼을 하면 턱수염을 손질하지 않은 채로 기른다.

이런 특이한 관습은 구세군파가 아미쉬교도들을 박해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당시 구세군파는 단추와 접는 깃을 사용하고 콧수염을 길렀지만, 턱수염을 기르지 않았다.

그래서 아미쉬 남자들은 구세군파와 다르게

통이 넓은 바지에 멜빵을 메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게 되었다.

아미쉬교도들은 오르드눙을 따라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수 있다고 믿는다.

가령, 아미쉬 여자들은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

대신 집안에 있을 때는 머리를 땋아 흰색이나 검정 오건디(얇은 모슬린 직물)로 만든

'기도 모자'로 단정하게 가린다. 그리고 공공장소에 있을 때는 모직으로 된 검정 보닛을 쓰는데,

1백 년 전 개척지 여자들이 쓰던 것과 비슷하다.

이 관습은 '예배를 드릴 때 여자는 머리를 가리라'는 성경 말씀을 따른 것이다.

그리고 하루 중 언제라도 기도할 수 있으므로 항상 머리를 가릴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여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되고 앞치마가 달린 단정한 긴 원피스를 입고,

단추 대신 아이어로 옷을 여민다. 옷감은 무늬가 없는 단색이어야 한다.
 
아미쉬인들은 예수의 삶과 산상설교를 모범으로 삼아 일상을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가족, 공동체, 형제애를 중시하며 세속과 분리된 채 절대로 폭력을 행하지 않고,

겸손하고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미쉬인들은 욕설이나 폭력적인 행동에 침묵으로 답하도록 배운다.

그들은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도 대주라’는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외부인들의 공격을 받더라도(외부인들이 아미쉬인을 괴롭히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아미쉬인들은 반응하지 않고 지나간다.

그리고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신념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군대에 가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많은 아미쉬인들이 감옥에 갔고 2차대전 때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신앙에 따라, 선거를 하지 않고 정부 일에 참여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들에게 잘못을 하더라도 법에 호소하지 않는다.

아미쉬인들은 선교 활동을 하거나 외부인을 설득하여 아미쉬 신앙을 갖게 하지 않는다.
 아미쉬교도들은 아미쉬 신앙관을 체득하기 위해 심도 있는 훈련을 받고

‘세상의 빛’이 되길 열망하며, 아미쉬 젊은이들에게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주지만,

이방인이 자신들과 함께 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미쉬인이 아닌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아미쉬 공동체’)
(아미쉬 공동체는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고 마차를 이용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차를 타고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마차를 타고 한 시간을 걸려서 간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안 되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주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차를 갖게 된다면, 그렇게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소비해버리지 않아도 되고,

그러면 집에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이다.”
딱 한 번만 시내에 다녀온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마차를 타고 갔다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한다면, 그 사람의 이야기는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마차를 자동차로 바꾸어보면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전보다 더 늘어난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시내에 나가기가 훨씬 쉽기 때문에 더 자주 나다니게 되고,

아주 사소한 일로도 시내에 나가게 된다.

그리고 곧 집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곳을 방문하기 시작한다.

50마일을 운전하고 가는 것이 예전에 5마일을 가는 것만큼 쉽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되고 만다.

그래서 결국에는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허비해버리게 된다.
 (“관점과 가치”)
 

마을의 첫 인상은, 목가적 풍경 그 자체였다.

 

어떤 현대적 치장도 하지 않고, 소박하고 견실한 농
가가 여기저기 보였다. 들판에는 일찍부터 농부들이 두 마리 말이 끄
는 쟁기로 이랑을 갈고 있었다. 오솔길 같은 도로에는 간간히 말 한
마리가 끄는 덮개마차가 터덕터덕 가고 있었다. 농가마다 긴 줄을 치
고, 거기에 빨래를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풍경을 보니 어릴 적 고향이
떠올랐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복장이다. 몇 세기 전으로 타임머신
을 타고 간 기분이었다. 남자들은 긴 턱수염을 기르고, 밀짚모자를 쓰
고, 멜빵바지를 입는다. 여자들은 머리에 천을 두르고, 앞치마를 하고
거친 천의 원피스를 입는다. 아이들은 모두 멜빵바지에다, 가끔 모자
를 쓰고 지낸다. 한마디로 단정하고 소박한 스위스 산촌의 복장으로,
어떤 ‘요란스러움’과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정과 일터에 기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계는 농사에서 사람
을 밀어낸다. 기계화된 영농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대신 개인의 경제적 부만
늘리는 데 관심을 둔다. 반면 사람은 무한정으로 작업할 수 없고, 말은 무한정
착취될 수 없다. 사람과 말로 하는 일은 근면함과 이웃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
을 하지 않는다. 복장과 외모는 아미쉬를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기준
이 된다.
오늘날 상업화된 사회에선 사람의 표정도 상업화한다. 모르는 사람
을 보면, 금방 ‘웃을 듯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런데 아미쉬 사람들의 표정은 언뜻 보면 무심한 듯하고, 자세히 보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이게 아마도 땅에 붙박힌 사람,
그리고 외부를 향해 요사스럽게 웃을 필요가 없는 공동체의 사람들의
자연스런 표정이리라.
외부를 향해 요란스러움을 떨지 않는 것은 모든 곳에 나타난다. 기
계가 아니라 손의 노동을 일상화하고 있는 공동체에선 수예품이 많다.
퀼트(quilt), 목공예품은 근면한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작된다. 빵
과 잼과 파이는 인공조미료가 없는데, 희한한 맛을 오랫동안 느끼게
한다.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상업화에 물들지 않는 그 맛이다. 물건을
광고하는 곳이 없다. 지나치는 길에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가게가 있
고, 거기에 몇가지 물건을 깔끔하게 진열해 놓고 있다. 지나가다 필요
한 사람은 사가면 되는 것이다. 또 집집에서 만든 물건을 조금씩 모아
파는 가게는, 그야말로 아무 표시도 없어 초행길 관광객은 눈치챌 수
도 없을 지경이다.
이곳 저곳 한나절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 온다.
현대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며 살아가느라 얼마나 바빴던가. 자동차 대
신 마차를 탄다면 그만큼의 시간손실이란 계산을 대번에 하는 우리다.

문명의 톱니바퀴 속에서 돌아가는 우리와 목가적 농촌에서 ‘현대’의
‘진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아미쉬들 중 누가 더 잘 사는 것일까 자
문하게 된다.


TV, 전화, 자동차가 없다!
지금 이 세상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 그것은 TV와 전화와 자동
차가 아닐까. 아예 구입할 돈이 없다면 모르되, 이 셋이 없는 환경을
생각하기 어렵다. TV를 켜면, 온 세상이 화면 속에 들어온다. 전화 하
나로 눈 앞에 없는 사람을, 어디 있든지 불러낼 수 있다. 자동차는 자
신의 좁은 공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수단이다. 그런데 아미쉬 마을엔
그것이 없다.
TV는 바보상자로 곧잘 불린다. 그러나 TV는 유혹의 천재다. 온 세
상의 화려한 구경꺼리가 눈앞에 펼쳐지면, 나의 삶의 초라함이 대조되
면서 자신이 별볼일 없는 존재로 불만스럽게 느껴진다. 아미쉬 사람들
은 그런 TV를 갖지 않고 있다. 더 큰 유혹거리인 영화도 보지 않는다.
소음과 공해, 욕망의 탈주를 만들어내는 자동차를 거부한다. 대신 그
들은 몇 세기 전, 자신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을 때 알고 있
었던 그 수단, 즉 마차를 지금껏 타고 다닌다. 농장은 그들의 집이고
창고이고 축사이며 또 일터이다. 집과 일터와 교회는 지척지간이므로
마차로도 크게 불편한 느낌이 없다. 이웃에서 늘 만나는 사이에서는
전화도 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전화는 마을 입구에 비상용 연락을 위
해 한 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가정과 일터에 기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계는 농사
에서 사람을 밀어낸다. 기계화된 영농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마을의 첫 인상은, 목가적 풍경 그 자체였다.

어떤 현대적 치장도 하지 않고, 소박하고 견실한 농가가 여기저기 보였다.

들판에는 일찍부터 농부들이 두 마리 말이 끄
는 쟁기로 이랑을 갈고 있었다. 오솔길 같은 도로에는 간간히 말 한
마리가 끄는 덮개마차가 터덕터덕 가고 있었다. 농가마다 긴 줄을 치
고, 거기에 빨래를 주렁주렁 매달아놓은 풍경을 보니 어릴 적 고향이
떠올랐다.
단연 눈에 띄는 것은 사람들의 복장이다. 몇 세기 전으로 타임머신
을 타고 간 기분이었다. 남자들은 긴 턱수염을 기르고, 밀짚모자를 쓰
고, 멜빵바지를 입는다. 여자들은 머리에 천을 두르고, 앞치마를 하고
거친 천의 원피스를 입는다. 아이들은 모두 멜빵바지에다, 가끔 모자
를 쓰고 지낸다. 한마디로 단정하고 소박한 스위스 산촌의 복장으로,
어떤 ‘요란스러움’과 ‘잡스러움’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도 보석 치장
을 하지 않는다. 복장과 외모는 아미쉬를 다른 집단과 구별하는 기준
이 된다.

그들은 가정과 일터에 기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계는 농사에서 사람
을 밀어낸다. 기계화된 영농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대신 개인의 경제적 부만
늘리는 데 관심을 둔다. 반면 사람은 무한정으로 작업할 수 없고, 말은 무한정
착취될 수 없다. 사람과 말로 하는 일은 근면함과 이웃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


오늘날 상업화된 사회에선 사람의 표정도 상업화한다. 모르는 사람
을 보면, 금방 ‘웃을 듯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런데 아미쉬 사람들의 표정은 언뜻 보면 무심한 듯하고, 자세히 보면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이게 아마도 땅에 붙박힌 사람,
그리고 외부를 향해 요사스럽게 웃을 필요가 없는 공동체의 사람들의
자연스런 표정이리라.
외부를 향해 요란스러움을 떨지 않는 것은 모든 곳에 나타난다. 기
계가 아니라 손의 노동을 일상화하고 있는 공동체에선 수예품이 많다.
퀼트(quilt), 목공예품은 근면한 생활 가운데 자연스럽게 제작된다. 빵
과 잼과 파이는 인공조미료가 없는데, 희한한 맛을 오랫동안 느끼게
한다. 오랜 전통으로 내려온, 상업화에 물들지 않는 그 맛이다. 물건을
광고하는 곳이 없다. 지나치는 길에 간판도 없는 조그마한 가게가 있
고, 거기에 몇가지 물건을 깔끔하게 진열해 놓고 있다. 지나가다 필요
한 사람은 사가면 되는 것이다. 또 집집에서 만든 물건을 조금씩 모아
파는 가게는, 그야말로 아무 표시도 없어 초행길 관광객은 눈치챌 수
도 없을 지경이다.
이곳 저곳 한나절 돌아다니다 보니, 시간이 정지하는 느낌이 온다.
현대의 빠른 속도에 적응하며 살아가느라 얼마나 바빴던가. 자동차 대
신 마차를 탄다면 그만큼의 시간손실이란 계산을 대번에 하는 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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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톱니바퀴 속에서 돌아가는 우리와 목가적 농촌에서 ‘현대’의
‘진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아미쉬들 중 누가 더 잘 사는 것일까 자
문하게 된다.
TV, 전화, 자동차가 없다!
지금 이 세상에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 그것은 TV와 전화와 자동
차가 아닐까. 아예 구입할 돈이 없다면 모르되, 이 셋이 없는 환경을
생각하기 어렵다. TV를 켜면, 온 세상이 화면 속에 들어온다. 전화 하
나로 눈 앞에 없는 사람을, 어디 있든지 불러낼 수 있다. 자동차는 자
신의 좁은 공간과 세계를 이어주는 수단이다. 그런데 아미쉬 마을엔
그것이 없다.
TV는 바보상자로 곧잘 불린다. 그러나 TV는 유혹의 천재다. 온 세
상의 화려한 구경꺼리가 눈앞에 펼쳐지면, 나의 삶의 초라함이 대조되
면서 자신이 별볼일 없는 존재로 불만스럽게 느껴진다. 아미쉬 사람들
은 그런 TV를 갖지 않고 있다. 더 큰 유혹거리인 영화도 보지 않는다.
소음과 공해, 욕망의 탈주를 만들어내는 자동차를 거부한다. 대신 그
들은 몇 세기 전, 자신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을 때 알고 있
었던 그 수단, 즉 마차를 지금껏 타고 다닌다. 농장은 그들의 집이고
창고이고 축사이며 또 일터이다. 집과 일터와 교회는 지척지간이므로
마차로도 크게 불편한 느낌이 없다. 이웃에서 늘 만나는 사이에서는
전화도 별 필요하지 않다. 다만 전화는 마을 입구에 비상용 연락을 위
해 한 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그들은 가정과 일터에 기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기계는 농사
에서 사람을 밀어낸다. 기계화된 영농은 공동체를 와해시키고, 대신
개인의 경제적 부만 늘리는 데 관심을 둔다. 반면 사람은 무한정으로
작업할 수 없고, 말은 무한정 착취될 수 없다. 사람과 말로 하는 일은
근면함과 이웃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아미쉬
사람에게는 기계 대신 말을, 트렉터 대신 쟁기를, 기계의 독점 대신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현대인은 넓은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들은 넓은 사회로
부터 독립되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늘 함께 산다. … 그들은 대가족으로 같이 살며, 큰 거실에서 공동으로
예배를 본다. 주어진 땅에서 검소하게,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사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늘 근면하
게 일한다. 일을 어떻게 하면 쉽게 할까 생각보다, 근면하게 일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들은 늘 접촉하는 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에게 농사는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는 것이다. 그 땅을
비옥하게 가꾸고, 그 땅에 알맞는 농사일을 잘 개발해왔다. 아미쉬는
최상의 농부이다. 면적당 수확량은 기계농보다 높고, 에너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
현대인은 넓은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들은
넓은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
라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늘 함께 산다. 생활과 일터와 예배의 공간은
그들이 한평생 같이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같
이 살며, 큰 거실에서 공동으로 예배를 본다. 주어진 땅에서 검소하게,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현대인은 넓은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들은 넓은 사회로
부터 독립되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라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늘 함께 산다. … 그들은 대가족으로 같이 살며, 큰 거실에서 공동으로
예배를 본다. 주어진 땅에서 검소하게,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개인의 경제적 부만 늘리는 데 관심을 둔다. 반면 사람은 무한정으로
작업할 수 없고, 말은 무한정 착취될 수 없다. 사람과 말로 하는 일은
근면함과 이웃의 협동을 필요로 한다.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아미쉬
사람에게는 기계 대신 말을, 트렉터 대신 쟁기를, 기계의 독점 대신
사람들 사이의 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빈곤 속에서 사는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늘 근면하
게 일한다. 일을 어떻게 하면 쉽게 할까 생각보다, 근면하게 일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그들은 늘 접촉하는 땅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 그들에게 농사는 하나님의 땅을 경작하는 것이다. 그 땅을
비옥하게 가꾸고, 그 땅에 알맞는 농사일을 잘 개발해왔다. 아미쉬는
최상의 농부이다. 면적당 수확량은 기계농보다 높고, 에너지는 비교할
수 없이 적게 든다.
현대인은 넓은 사회에 사는 것 같지만 고독하고 쓸쓸하다. 그들은
넓은 사회로부터 독립되어 고립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혼자가 아니
라 자신의 공동체 속에서 늘 함께 산다. 생활과 일터와 예배의 공간은
그들이 한평생 같이 살아가는 터전이기도 하다. 그들은 대가족으로 같
이 살며, 큰 거실에서 공동으로 예배를 본다. 주어진 땅에서 검소하게,
조용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는 미래인가
봄날, 관광버스를 타고 아미쉬 마을로 들이닥친 관광객의 앞에는 목
가적 풍경이 펼쳐진다. 아지랑이 저쪽으로 말로 쟁기를 끄는 농부의
모습, 긴 옷을 입은 채 공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 세탁물이 주렁주렁
매달린 모습, 그 하나하나가 사진의 소재가 된다. 목공품과 퀼트 등
수예품을 몇 점 사기도 하며, 빵과 잼은 최고의 인기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한 번 쯤 반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빠른 속도와 소음․공해 속을 헤쳐가며, 경쟁 속에서 아등바등 살아가
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그토록 바쁘게 열심히 살았는데, 자기에
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감싸주는 풍요한 가족과 이웃 공동체
가 있는가, 향기로운 흙가슴의 감촉이 남아있는가, 매일같이 새로운
소비의 유혹 속에서 늘 욕구불만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말이다.
공동체도 없고, 가족간의 만남마저 점점 어려워지고, 남은 건 기껏해
야 돈 몇 푼과 노후걱정밖에 없는 21세기라면, 16~7세기적인 삶을 살
아가는 아미쉬 사람들보다 낫다고 자위할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회의
감이다.

아미쉬 사람들에겐 고민이 없을까. 급변하는 주변 세상에 동화될 수
도 없고, 이를 무시하며 살아갈 수도 없는 고민도 있을 것이다.

그 고민은 우리에게도 새삼스런 게 아니다. 산업을 ‘신성한 전쟁’으로
예찬했던 계몽주의자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계몽주의자 사이의 갈
등을 지금도 늘 치르고 있는 것이다.
고민해야 할 것은 그들일까, 우리일까?
더욱이 어떤 삶이 하느님의 방식에 합당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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