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1. 1 모든 성인 대축일)
사랑, 결코 시들지 않는…
모든 성인의 날은 각 성인마다 고유 축일이 있지만 교회가 기억하지 못하는 성인들조차 한꺼번에 모아서 기리는 날입니다. 성인은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오른 이만이 아니라 천국에 살아 계시는 모든 분이 곧 성인이지요. 그러므로 오늘은 모든 신자들의 축제입니다. 이미 성인이 되신 천상교회의 신자나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지상교회의 모든 신자가 기도 안에서 만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삶과 죽음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11월 위령성월을 쓸쓸하고 허무한 달로 보내서는 안 됩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 많이 하지만 그것이 지상의 삶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쪽으로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묵시록은 종말이 아니라 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인장을 받은 이들은 십사만사천명, 12지파에서 12,000명 씩 선발, 12는 완성수의 곱이니 하느님 백성의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원로 24명은 신약의 12사도에다 구약의 12파 혹은 12 예언자를 더한 숫자이지요. 즉 모든 시대에 걸쳐 하느님은 구원의 손길을 당신의 사자들을 통해 펼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그 원로들 옆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사자, 황소, 사람,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전하는데, 각기 상징하는 바가 있습니다. 사자는 마르코 복음서의 상징입니다. 마르코 복음의 시작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은 일종의 사자후입니다. 그리고 황소는 루카 복음서의 상징입니다. 루카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입니다. 그런데 황소는 제사 중에 번제물로 쓰입니다. 또 사람은 마태오 복음서의 상징입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족보로 시작합니다. 인물 계보이니 사람이 상징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요한 복음서는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천리안을 가진 새입니다. 요한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영적인 눈으로 꿰뚫어 읽어야 하며, 따라서 그 말씀의 신비가 심오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볼 때, 오늘 제1독서는 세상 끝장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도 전례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성장하며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성인의 날’ 단골 복음입니다. 그 유명한 마태오 복음 5장, 산상수훈 중의 진복팔단! 복음의 백미이지요. 성전 정면을 보시면 바로 눈에 띄실 것입니다. 그런데 순교성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교회는 성인품에 올리기 전에 복자품부터 먼저 베풉니다. 복자는 천상복락을 누리는 자의 호칭입니다. 그러므로 복자품은 순교자나 교회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베푸는 특전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오늘 진복팔단을 실천하는 자가 바로 복자입니다. 익명의 복자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럼 말씀을 들여다봅시다. 하나같이 복자가 아니라 불행아 이야기입니다. 손해 보는 일 밖에 없습니다. 까이고 치이고 밟히고...그런데 역설적이게 하느님 나라에서는 그러한 이들이 복자라고 불립니다. 세속적으로 보면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1984년 천주교 도입 200주년 맞아 여의도광장에서 103위 복자를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그분들의 초상이 바로 뒤에 있습니다. 그 후 30년이 흘러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124위 가경자를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광화문은 아이러니하게도 한 때 우리 순교자들을 참하라고 선고하던 관청이 있던 자리입니다. 역전도 이런 역전이 있을까요? 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200년 전으로 돌아가면 참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박해 속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망나니의 칼을 받으면서도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대체 죽음도 불사하는 그 사랑이 무엇입니까?
이 대목에서 백색순교하신 어떤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병엽 신부님의 유언장>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눈물이 날만큼. 교목신부의 롤 모델이 있어서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릅니다. 한 개인의 역사로 보면 딱한 죽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의 사제로 보면 충만한 완성을 이룬 삶입니다. 항상 힘들 때 그분의 유언장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생을 마치면서 삶을 정리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또 다른 삶을 시작하는 권두사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젊음도 가도 열정도 식습니다. 그리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기거하던 육신과도 이별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함없는 것? 사랑, 그것은 결코 시들지 않습니다. 그 신부님은 아마 죽어서도 천국에서 활짝 웃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죽음이 설사 우리를 갈라놓는다 해도 그 사랑만큼은 영원히 내 곁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사랑 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갑자기 파킨스 병으로 오랫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유언이 생각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 아멘.
(공지사항: 게시판에 김수환 추기경의 진복팔단 풀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