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 6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성령과 물과 피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운명하신 뒤 로마 병사의 창에 의해 당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십니다. 여기서 물과 피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 물과 피로써 세상 모든 이를 구원했다는 것이 교회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초대 교부들은 또 다른 해석을 내어 놓는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은 그분의 인성이고, 피는 그분의 신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 전례를 보면 성찬을 준비하면서 사제는 성작에 포도주를 붓고 물 몇 방울을 떨어뜨리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물과 술이 하나 되듯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그런데 오늘 복음을 보면 이러한 물과 피를 하나로 엮는 분이 있으니 성령이십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은 성령 안에서 분리되지 않은 모습으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을 성령과 함께 했다는 결론입니다.
한편 성령과 물과 피에 관하여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세례자 요한에게 받은 세례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루카 복음 12장 50절을 보면 수난을 앞두고 당신의 죽음을 세례에 비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그러니까 세례자 요한에게 받은 세례는 물로써 이루어졌고, 십자가 죽음의 세례는 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그 순간마다 주님과 함께 했으며, 그 결과 이제 주님은 우리에게 물이 아니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되었습니다.
어떤 해석을 따르든지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물에, 성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피에, 견진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교회는 이 세 가지를 성품성사를 통하여 결합시킵니다. 사제의 손으로 세례를 베풀고, 성체를 이루며, 성령 안수를 합니다.
14년 전 사제서품을 받을 때 모또를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루카 12, 49)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어떤 수녀원에 제의 디자인을 맡겼는데, 제 영대와 제의에 수를 놓은 분은 마리아 고레띠라는 장애인 자매님이었습니다. 수녀원에 기거하며 평생 사제 제의를 만드는 일만 하셨는데, 그분의 사연을 들어 보니 참 기가 막혔습니다. 그분의 세례명, 마리아 고레띠가 동정을 지키다가 살해당한 것처럼 그분은 결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강도로부터 변을 당합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무단 침입한 강도는 결국 그 자매를 강간했습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강간을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하반신에 마비가 왔고 그 길로 평생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남편은 매정하게 그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자매님은 수녀원에 들어왔고, 수녀는 아니지만 세례 후 평생 동정녀로 살면서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 사제들의 옷을 짓기 시작한 것입니다. 수를 한 땀 한 땀 놓을 때 마다 간절히 기도하면서. 참 기구한 운명이지요.
그 때 그 자매님의 사연을 듣고 결심한 것이 있습니다. “이 제의에는 자매님의 간절한 기도가 담겨져 있으니 이것을 입을 때 마다 그분처럼 가련한 이들을 기억하자. 제의의 주제가 세상에 불을 지르는 것이니, 세상에 사랑의 불, 성령의 불, 십자가 죽음의 불을 지르자. 물과 피로 세상에 오신 그분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