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3. 31 파스카 성야)
Bona Pascha!(좋은 부활!)
올 해 부활은 참 분주한 가운데 맞이하는 것 같습니다. 사순절 숙제와 행사도 많았지만 중간에 학생들 봄 방학 기간도 포함되어 있어 다들 이것저것 바쁘게 지낸 것 같습니다. 저는 일복이 터졌는지 병원대기까지 겹쳐서 마음의 여유 없이 부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만, 오늘 하루만큼은 다 잊고 오로지 주님이 주시는 평화 속에서 그분의 부활을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밤 미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왜 밤에 할까요? 본디 밤이란 어둠이고, 어둠은 곧 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유다도 밤에 예수님을 팔아넘기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동시에 밤은 구원의 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 밤에 예수님은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세상 구원을 위한 고난의 잔을 마시기 위해 겟세마니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으로 오시는 그분을 기다립니다.
여러분들, 오늘 빛의 예식과 말씀의 전례가 깨나 길었지요? 어떤 분들은 너무 지루해서 눈을 감고 졸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례가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들려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즉, 우리는 말씀으로 태어났고 말씀 안에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7개의 독서가 있으나 시간 관계상 생략하고 1,3,7 독서만 들었습니다. 이 세 가지 독서는 구세사에서 절대 뺄 수 없는 대목입니다. 1독서는 창세기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6일 창조가 끝난 다음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앞의 6일은 육적인 창조이고 마지막 7일은 영적인 창조입니다. 그런데 오늘 무덤에 묻히셨던 예수님께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 날, 곧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창조 사업의 완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독서는 탈출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해방시키신 하느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가게 하십니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 파스카 사건을 세례성사에 비유합니다. 우리는 구약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듯이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건너 갈 것입니다. 세례를 통해 죄의 노예가 아니라 빛의 자녀로 살아갈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 말씀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입니다. 마지막 7독서는 에제키엘 예언서입니다. 하느님께 우상숭배의 죄를 짓고 바빌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바빌론 강가에서 울며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다시 정결케 하여 그들에게 새 마음과 새 영을 넣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을 다시 되찾게 하고, 영원히 그들의 하느님이 되시겠다고 희망을 불어 넣으십니다. 이제 그 약속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에게 새 하늘 새 땅을 주시며, 그분의 영, 곧 위로자 성령을 주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배와 같은 비참한 삶을 사는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이자 희망입니다.
자, 이렇게 구약이 끝나고 신약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빈 무덤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만 경축하는 날이 아니지요.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우리의 부활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시자마자 성부 오른편으로 승천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우리와 함께 생활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천사를 시켜 여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생전 예고대로 먼저 갈릴래아로 가서 기다릴테니 거기서 다시 만나자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 또한 당신의 부활에 참여시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갈릴래아는 공생활의 주요 무대이면서 동시에 우리 삶의 현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고 난 다음 미래에 성취될 그 무엇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체험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부활 신비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지요? 참 어려운 이야기 같지요? 물론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초월한 신비스런 이 부활을 한 번에 깨닫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제자들도 한 참이 지난 뒤에야 그분의 도우심으로 깨닫게 되지 않았습니까? 또 깨우친 사람이 깨닫지 못한 이들에게 말로 설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마치 이런 비유와 같습니다.
하루살이-메뚜기-개구리 비유
좀 쉬운 예를 들어 보지요. 저는 이번 부활을 이렇게 체험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죽다가 되살아 난 것입니다. 지난 사순절 저는 삭발례의 심정으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매일 아침 단식 선포입니다. 그 이유는 잘못한 자식 대신 아비가 매를 맞듯 저는 대속의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분풀이였을 뿐, 여전히 보속을 핑계로 저는 어둠 속에 있었습니다. 매일 단식을 하면서 사실 신자들을 더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사순절 중간에 마치 브레이크가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가족 대소사로 본당의 모든 일정이 틀어졌습니다. 합동 판공 시즌 후 지친 몸을 이끌고 바쁜 주일마다 성사를 주는데 화가 났습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성주간에 병원대기까지 겹쳐 더 맘이 분주해지는데, 그 놈의 병원대기까지 저를 골탕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성목요일 저녁 식사 준비하는데 호출 받고 급히 달려갔더니 병원 측의 실수인지 제가 오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임종자가 교구 몰시뇰이신데, 주교님께서 직접 종부 성사를 주시니 그냥 가라고 하더군요. 그것도 저의 소속이 어디냐고 심문하듯 말하면서. 굉장히 불쾌했습니다. 속된 말로 똥개 훈련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영어를 제대로 구사 못해 따지지도 못하고 감정을 내리누르는 이민자들의 심정을 그 때 확실히 알았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족례를 하고, 성삼일 전례 연습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절정은 어제였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고 몸과 맘을 정갈하게 해야 할 때, 저는 중대한 실수를 하고 맙니다. 평소 완벽주의를 자랑하는 제가 어제는 ‘stupid’ 이었습니다. 강론 후 보편지향기도를 해야 하는데, 그냥 십자가 보임 예절부터 해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선을 주어 전례가 깔끔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모든 예식이 끝나고 나서 스스로 막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동안 보이지 못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로는 성공이 아니라 사랑이 우선이라고 해 놓고 그렇게 살지 못한 제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 복사나 해설자가 실수 할 때 마구 다그쳤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전히 나도 실수하는 불완전한 사람인데 말이지요. 그동안 저는 공동체의 선익을 앞세워 개인의 실수와 잘못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실수하더라도 모두를 칭찬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어찌되었든 지금이라도 판공성사를 청하는 사람을 나무라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마음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성공을 방해하는 실수와 결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그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 마음 속에 평화와 사랑이 찾아 왔습니다. 저는 이것이 부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저는 중요한 것을 망각하고 살았습니다. 상황이 절망적이더라도 예수님 함께 계시면 희망적인 것이 되고, 상황이 아무리 좋더라도 예수님 아니 계시면 절망적인 것이 된다는 것을 말이지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으면 난 무덤 속에 있는 시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무덤 같은 내 인생이지만, 그래서 짜증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일상이지만, 생명이신 그분께서 함께 계시면 무덤은 요람이 되고, 분노는 기쁨이 됩니다. 내 인생이 죽음이냐 생명이냐, 어둠이냐 빛이냐 그것은 생명이신 주님을 내가 초대하느냐 초대하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오늘 부활 메시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몫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부활 하셨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우리 또한 각자의 무덤에서 벗어나 생명이신 그분께로 나아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