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5. 25 성모의 밤)
순종과 겸손
역사를 영어로 하면 History, 곧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인류는 역사조차도 남성 중심적으로 기술했습니다. 남존여비가 확실했던 예수님 시대에는 더 그랬겠지요? 여성은 감히 남자들 하는 일에 끼일 수 없었고, 발언권조차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복음은 여성을 상당히 높게 보고 있습니다. 복음의 처음과 끝이 모두 여성이 주역을 맡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첫 목격자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 공생활 중요한 대목마다 여성들의 신실하게 협조하는 모습은 우매하고 배신하는 남자 제자들과 사뭇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오월, 오늘 성모의 밤에 성모님의 여성성에 대해서 말씀드릴까합니다. 많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성모님의 그 여성성을 우아하고 아름답게 잘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 여성성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성모님의 여성성은 한 마디로 순명과 겸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순명은 ‘obedience’는 ‘obey’ 동사의 명사형입니다. 이 말은 원래 라틴어 ‘~를 향해’라는 전치사 ‘ob’과 ‘듣다’라는 뜻의 동사 ‘audire’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를 향해 귀를 기울이는 것이 바로 순명입니다. 성모님은 천사의 말에 귀를 기우려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성경을 자주 접하는 믿음의 여인으로 천사가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곰곰이 새겼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순명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느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인 여성들이 가정에서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남편과 자녀들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정보 교환이 아니라 모성으로 그들을 감싸고 공감 속에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가족들은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낍니다. 이는 밥 짓고 빨래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입니다. 성당에서는 어떻습니까? 힘들게 살아가고 아픔과 상처가 있는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친교 식사 봉사도 중요하지만 엄마의 마음으로 형제자매들을 이해하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일의 성공이 목적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닙니까?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하면서도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곧 형제들에 대한 순명으로 이어집니다.
둘째, 성모님의 여성성은 겸손입니다. 영어로 겸손을 ‘humility’이라고 하는데 동사는 ‘humble’입니다. 이 단어들은 흙을 가리키는 라틴어 명사 ‘Humus’에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겸손은 흙에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운명을 깨닫고 항상 하느님 앞에서 피조물로써 겸허하게 살아야 함을 뜻합니다. 아울러 땅을 이루고 있는 물질이 흙이니, 땅처럼 항상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 되 생명을 먹이고 키우는 대지의 어머니로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한다는 뜻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이러한 겸손의 덕으로 구세주를 당신의 태에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어머니로서 대지가 되어 사도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그들을 키우십니다. 오늘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의 승천 후 오순절 성령강림 대축일에 사도들과 한 자리에 어머니가 계셨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중재자 어머니는 교회 탄생에도 관여 하시며 하느님께 교회 일치를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 받아 자신을 낮추고 교회의 땅을 이루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만불손, 자기자랑, 독선아집 등의 거짓자아는 버려야 합니다.
끝으로 마리아는 “두려워하지 마라.”는 천사의 말을 믿었고, 그대로 실행합니다. 인간적으로 위기와 역경이 닥쳐옴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하느님께 의탁하며 견디어 냅니다. 살다 보면 현재의 시련과 고통,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에 얼마나 주저하고 두려워합니까? 그러나 성모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계획이 숨어 있음을 믿고 지금 그분의 뜻을 따릅니다.
부디 오늘 성모의 밤 행사가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연중행사가 아니길 바랍니다. 성모신심은 일상의 도입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떠나간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마리아에게 남은 것은 보지 않고 믿는 신앙이며, 하느님 말씀을 매일 실천함으로써 천사의 말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역시 일상의 도입니다. 환시 체험은 한 번이면 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 신심을 매일 실천하는 우리들의 일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성모님께 봉헌하는 초와 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전례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가 매일 그분의 빛과 꽃이 되어 세상을 진리로 밝히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성모의 밤이 더 아름다운 것은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희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합니다. 로사리오 속에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일치와 사랑을 꿈꿉니다. 여러분, 성모님을 한 어머니로 모시는 우리들은 모두 형제자매들입니다. 성모님의 순명과 겸손을 본 받아 성모성월을 더 아름답게 만들어 가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