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월 꾸리아 훈화-죽음에 대한 단상(斷想)
찬미예수님!
11월은 위령성윌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특별히 기억하며 기도하는 달로써, 자신의 죽음도 묵상해 보는 달이기도 합니다.
저는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장례미사를 많이 해 보았고, 특히 병원생활을 하면서 많은 이의 죽음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죽는 모습은 달랐습니다. 힘들게 죽는 사람도 있었고, 편안하게 죽는 사람도 있었고, 눈물을 흘리며 죽는 사람도 있었고, 기쁘게 죽는 사람도 있었고, 감사하며 죽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죽을까, 어떻게 죽을까, 죽음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묵상해보게 합니다.
공산주의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시이나 린조씨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것은 거짓은 아니지만 죽음을 겁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 모습이다. 그러면 부활신앙의 공덕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죽음의 공포에 빠질 듯 하다가도 머리를 조금 받쳐 주어 숨을 쉴 수 있게 해 줌에 있다”고 합니다.
과연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퀴블러 로스 여사도 “신앙이 있는 이와 없는 이의 죽는 모습은 큰 차이가 없는 듯하다”고 말하면서도 “극히 소수이지만 참으로 깊은 신앙을 가진 자는 확실히 그 신앙으로 큰 도움을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임종할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의 영원한 사랑의 눈을 머리로만이 아니고 마음속으로부터 믿고 느끼게 되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나이가 들어 정신이 거의 없는 치매증인 어떤 노 수녀가 성당 종소리에 자연히 자세를 가다듬는 것처럼 마음 깊숙이 젖어든 신앙은 우리들 마음에 빛을 가져다 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어떤 이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죽음을 '사랑하는 자매'라고 부르는 이도 있을 것이고, 베르나노스처럼 "찬란한 죽음이여, 한 번만의 아침!"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각자가 맞이하는 죽음은 다르지만, 우리 신앙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이 중요합니다. 지금의 삶에 충실할 때, 하느님이 언제, 어디서 부르더라도 기쁘고, 감사하게 “예,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찍이 레지오를 위해 수고한 많은 이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더욱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노력하여,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하는 뜻깊은 11월, 위령성월이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