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9. 레지오 훈화- 양심의 바늘
찬미예수님!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을 맞이하여 이번 주간에는 하느님이 주신 좋은 마음, 어진 마음, 양심에 대해 묵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오스트로고드라는 종족이 이탈리아 평원을 점령하고 오스트로 왕국을 건설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데오도링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혈기를 이기지 못하여 무죄한 친구 보에디오스와 디메니스를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양심의 가책으로 후회하던 중 어느 날 저녁 요리사가 생선으로 좋은 요리를 만들어 왔는데 왕이 빨간 생선의 눈알을 들여다보니 거기에 자기가 죽인 사람의 눈이 보였습니다. 이빨을 보니 마치 자기가 죽인 그 사람이 자기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이를 악물고 뛰어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무서워 식사도 못하고 침상에 누워 사흘 동안 앓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심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죄의 수위를 알게 하는 측정기입니다. 양심이 마비되면 죄를 지어도 느낌이 없습니다. 측정기가 고장 나면 물은 범람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는 도덕상으로 그른 것, 법률에 위반되는 행위, 그리스도교 불교 교법을 어긴 행위, 악에 대한 책임 범죄 등이 적혀 있습니다. 국법을 어기면 국가 앞에 죄인이 됩니다. 학생이 학칙을 어기면 학교 앞에 벌을 받고 회사원이 사칙을 어기면 회사 앞에 죄인이 되며 가족이 가정의 법을 어기면 가족 앞에 죄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법들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예컨데 미국같은 나라는 50주나 되는 큰 나라인데 주법이 각각 달라 한 주에서의 범법행위가 다른 주에서는 죄가 안 되는 경우도 있기에 교묘히 피해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해당되는 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법입니다. 성경은 불신이 죄라고 했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의롭지 못한 불의도 죄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법, 자연법을 어기는 것도 죄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외가 없는 만민의 법입니다. 오늘의 중대한 문제는 하느님이 주신 이 양심의 법이 마비된 데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양심을 하느님의 소리라고 했고, 엠마누엘 칸트는 인간내면의 법정이라고 했습니다. 현대인은 문화적인 혜택과 여유를 즐기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으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무엇인가 공허와 불안 속에 초조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이런 인간의 고통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용서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위험수위를 알리는 양심의 계기가 고장 나지 않았는가 점검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양심의 바늘이 예민할수록 인간다운 바른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한 해를 마감해가는 이 시점에 우리의 양심은 어떠한지 잘 점검하여 밝은 새해를 열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