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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반

묵시록 자료

작성자sakicoon|작성시간18.05.23|조회수1,172 목록 댓글 0

           제목차례
I. 유대 묵시문학  3
 1. 묵시 문학 유형과 역사적 배경 3
 2.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 4
 3. 묵시문학 유형의 기원과 발전 5
   1) 초창기 단편적인 작품들 5
   2) 묵시문학 유형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단계 5
   3) 위경의 작품들 6
     *위경의 작품 6
   4) 구약정경에서의 묵시문학적인 요소가 담긴 부분들 6

II.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요한 묵시록 7
서론 7
 2. 요한 묵시록의 배경 8
   1) 역사적 배경 8
   2) 정치적 배경(초대교회의 정치적 고민) 9
 3. 요한 묵시록의 저작상(著作相) 10

III. 요한묵시록 11
 1. 제목 11
 2. 저자 12
 3. 집필 장소와 연대 13
 4. 묵시록에 나타난 상징들 14
   1) 우주론적인 상징 14
   2) 천재지변 15
   3) 상징적인 동물들 16
   4) 인류학적 상징(인간적 상징) 17
   5) 상징적인 색깔 21
   6) 상징적인 숫자 22
 5. 왜 묵시록의 저자는 상징(환시, 신비)을 사용하는가? 23
 6. 묵시록의 구조 24
 7. 본문해설 26
   1) 서언(1,1-8) 26
   2) 1,9-20 : 인자에 관한 현시 31
   3) 2,1-3,22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35
     (1). 편지의 양식 37
     (2).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38
   4) 4,1-5,14 : 묵시록 현시들을 미리 보여주는 현시 45


                      요한묵시록 참고자료

▶ 기본도서
◈ 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Doubleday, New York-London-Toronto-SydneyAuckland, 1997, p.773-813.
◈ 레이몬드 E. 브라운, 신약개론, 김근수, 이은수 공역, 기독교문서선교회, 2003

▶ 책들
◈ H.Kraft, 요한 묵시록, 한국신학연구소, 1983.
◈ J.보르톨리니, 요한묵시록 읽기, 김수복 옮김, 2000.
◈ 민병섭, 요한의 묵시록, 분도출판사, 2002.
◈ 박찬용 엮음, 요한 묵시록 주해, 성바오로출판사, 1985.
◈ 안병철, 요한묵시록 I-II, 가톨릭대학, 1996.
◈ 안병철 옮김, 요한 묵시록의 일곱교회, 기쁜소식, 1990.
◈ 에두아르트 로제, 요한계시록, 박두환 옮김, 한국신학연구소, 1997.
◈ 임승필 번역, 요한 묵시록,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
◈ 스콧 한, 어린양의 만찬, 정광영 역, 생활성서, 2002.
◈ 카롤로스 메스테르스, 누가 알아 듣겠는가? 성바오로출판사, 1992.
◈ 프레이 길베르토 S. 고르굴료外 지음, 두려워하지 말라, 심정순 옮김, 가톨릭출판사, 1995.

▶ 논문과 소논문
◈ E.S.피오렌자, 요한묵시록의 역사와 종말론, 신학사상 1991, 가을, 642-682.
◈ F.루펠, 요한묵시록의 여인과 용 이야기, 생활성서 13, 39-41.
◈ 김균진, 종말론과 윤리, 신학사상 1991, 가을, 683-701.
◈ 김연태, 묵시적 종말론의 시간개념, 신학과 선교 16, 서울신학대학 1991, 19-39.
◈ 김진호, 구약 묵시문학의 종말론, 신학사상, 1991 가을, 615-641.
◈ 김혜윤, 묵시문학, 성서와 함께 2001년 1월부터
◈ 박윤선, 요한계시록 이해, 신학정론 1987,11, 188-218.
◈ 서광선외, 심포지움, 종말사상의 유행과 한국교회, 신학사상 1991, 가을, 766-798.
◈ 성서와 함께 123, 38-47.
◈ 성서와 함께 231, 요한묵시록의 상징적 풀이, 65-72.
◈ 신교선, 요한묵시록에 나타난 구원자 예수, 성서와 함께 171, 74-80.
◈ 안병무, 역사와 해석, 대한기독교출판사, 1984, 293-309.
◈ 요한 묵시록 특집, 생활성서 103호.
◈ 이광신, 요한 계시록의 ’일곱 개 봉인으로 봉해진 책‘ 신학과 현장 제 7집, 목원대학교 신학대학, 1997, 129-149.
◈ 이상훈, 예수의 재림과 요한계시록 20장, 신학과 선교 16, 서울신학대학 1991, 5-18
◈ 정양모, 김창락, 박수암의 좌담: 신약성서의 종말론, 신학사상 1991 가을, 597-614.
◈ 정양모, 요한묵시록의 일곱교회, 생활성서 3/1994, 16-.
◈ 죠지 마틴, 요한 묵시록, 생활성서 117, 120-.
◈ 편집부, 희망의 수수께끼 묵시문학, 생활성서 37, 55-57.

    지금부터 우리는 요한 묵시록에 대해서 다루게 될 것이다. 요한 묵시록을 처음 드는 사람이 느끼는 생각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게다가 재앙에 대해서만 잔뜩 이야기 하는 책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묵시적”(apocalyptic)이라는 용어는 아마겟돈을 연상시키는 듯 하고 ‘재앙을 가져다주는’이라는 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국 학자인 로렌스는 요한 묵시록을 신약성경의 유다라고까지 이야기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안에서 교회 전통은 두루마리를 든 어린양의 이미지과 태양 같은 옷을 입고 달을 밟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마리아를 상징한다고 여기는데 묵시록 12장), 네 마리 생물, 알파와 오메가라는 문자, 예수를 지시하는 여러 신적인 이름들, 사탄의 숫자인 666(묵시 13,18), 제단 위나 제단 아래의 식탁에 놓인 순교자들의 유해들 등등 많은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있다. 물론 이 묵시적 상징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묵시록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묵시록은 많은 그리스도교 분파들이나 혹은 이단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책이기도 하다. 그들이 주장하는 그 해석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대응해야 할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간에 우리는 호교론적인 작업을 위해 여기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묵시록을 그들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묵시록을 깊이 있게 연구함으로써 묵시록에 담긴 하느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 수업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하게 되는가? 우선 우리는 유대 묵시문학에 대해서 먼저 간략히 살펴 본 뒤, 묵시록 전반에 대한 전체적인 조망을 갖기 위해서 묵시록 전체를 살펴 볼 것이다. 먼저 책으로서 묵시록을 다루고, 저자, 묵시록의 역사와 역사적인 배경을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묵시록 각 부분에 관해서는 Raymond E. Brown, An Introduction to the New Testament, Doubleday, New York-London-Toronto-SydneyAuckland, 1997, p.773-813을 학생들 각자가 해당되는 부분을 연구 발표하도록 할 것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논쟁이 되는 부분들에 관해서는 해당되는 부분의 연구 발표 전후로 보충 설명을 하도록 한다.


    I. 유대 묵시문학

1. 묵시 문학 유형과 역사적 배경

  1) 이스라엘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와 비슷해서 수난과 슬픔과 비애의 역사였다. 수많은 정복과 압박, 여러 해 동안의 포로생활을 겪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방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용감하고 동시에 처절했던 시기가 B.C. 200~A.D. 100년 사이인데 이 시기는 유다인들이 자기들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때였다. 마카베오 형제들과 하스모네아 왕가의 영도 아래 유다인들이 그 나라를 재건할 때(B.C. 166~160. 1 마카베오 3장 이하; 2 마카베오 8장 이하) 유다인들 사이에는 ‘묵시’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이 양식을 통해서 그들의 종말사상을 표현했고 이것은 유다인들 사이에서 굉장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2) 정전(正典, 정경)이나 외전(外典, 외경)의 많은 묵시문학 작품들은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는 사이에 씌어졌고 그 묵시문학 작가들이나 그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심리상태는 박해에 시달렸거나, 혹은 과거에 하느님이 주신 약속이 믿을 만하고, 따라서 결국에는 반드시 그 약속이 실현된다는 보증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상태였다. 이것은 작품들의 성격상으로 볼 때 거의 모든 묵시문학이 첫 작품부터 이교도들의 압박이나 혹은 종교적 박해로 말미암아 야기된 신앙의 위기 시대에 씌어졌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예) ① 초기 묵시문학(아모스, 원이사야서<1-39장>에 수록된 묵시문학)
       아시리아 침공에 직면했던 시대에 쓰임. 북부 이스라엘(B.C. 933-721)은 B.C. 721년에 아시리아에게 멸망함.
     ② 에제키엘, 제2이사야(40-55장)의 묵시는 음산했던 바빌로니아 유배시대에 쓰임.
       제2이사야서는 유배시대에 희망을 주기 위해 씌어졌다.
       남부 유다(B.C. 933-587)는 B.C. 587에 바빌로니아에게 멸망.
       페르시아 키로스 칙령 - B.C. 538년
     ③ 즈카르야서와 요엘서의 묵시는 유배지에서 돌아온 뒤 환멸을 느꼈던 시대에 쓰임.
     ④ 다니엘서는 안티오쿠스 4세(B.C. 175-164)가 저돌적 이교화를 시도하여 유물주의적 헬레니즘으로 반항적인 유다인 공동체를 말살하려고 위협하던 시대(B.C. 167-164 종교박해)에 쓰인 것이다.
     ⑤ 신약의 요한 묵시록도 네로가 시작한 박해 정책을 그 뒤의 로마 황제들도 답습하여 그리스도 신자들을 계속 탄압하던 위기의 시대에 엮어진 작품이다. 

  3) 이렇게 볼 때 묵시문학은 정치적 관점에서나 인간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 희망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처절한 한 민족역사의 소산물이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현세적인 차원에서의 전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신적 차원에서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 싸움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당신 백성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원수들을 응징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에 꽉 차 있다.

  4) 유다인 묵시록 자체는 충실한 유다인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이방인들이나 타락한 유다인들에게는 회개를 촉구하는 경고의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유다인 묵시록들의 흐름은 이렇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중대한 사건들을 펼쳐나가실 준비가 되어 있다. 과거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진행되어 왔다. 그러므로 완전한 해방 역시 하느님의 계획에 의거해서 그 순간을 맞게 될 것이다.  . 안병철, 요한 묵시록 I,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1996, p.14.


2.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

  1) 유대 묵시문학은 예언자들의 세계에서 파생된 것으로 예언자들이 선포한 것을 현재 상황에 맞추어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이다(즉 묵시문학에서는 주로 역사의 종말의 진행과정, 종말의 시기 계산, 후세 등을 다룬다). 묵시(黙示, ’Αποκάλυψις)라는 단어는 ‘숨겨져 있는 비밀을 드러내어 밝힌다’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것이다. 즉 이미 절박하게 닥쳐온 것으로 생각되었던 세말에 일어날 사건들의 진행상황을 설명한다.

  2) 묵시문학이 중요한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그 인접국가에 관한 것과 그 상황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즉 종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세계사를 그 내용으로 삼고 있다.
  묵시문학이 보는 이 세계는 곧 멸망의 재앙을 면치 못할 것이고 그 멸망과 더불어 곧 하느님의 세계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낙원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살고 있는 당대는 종말을 향한 과정으로서 하느님과 악의 세력이 벌리고 있는 이 우주적 투쟁이 마침내 종국(climax)에 이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묵시문학은 임박한 세상의 파국, 최후의 심판, 선민의 구원과 행복을 묘사하려고 힘쓰고 있다.

  3) 이런 역사의 과정을 묵시문학 저자들은 비밀리에 주어진 계시에 의해서 알게 되었다. 그들은 꿈과 같은 탈혼 상태 또는 환시 속에서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보았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주로 말씀 속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받았고, 말(언어)을 통해서 그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선포했다. 하지만 묵시문학 저자들은 표상과 비유를 통해서 글자(서면)로 표현한다. 즉 야훼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우주적 대변동(천재지변)을 상상적으로 묘사하고(대부분 아모스와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을 때의 놀라운 현상, 이집트에서의 재앙을 본따서 묘사하고 있음) 대체로 상징적인 이름이나 숫자를 많이 쓰고, 환상적인 짐승이나 천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4)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묵시문학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백성에게 선포하고 미래의 사태를 예시하는 데 있어서 상징을 많이 사용한다. 이미 앞선 예언문학에서도 상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의 부패상을 눈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예레미아는 잠방이(아마포)를 땅에 묻어 썩게 했다(13,1-11). 또한 에제키엘이 본 뼈가 가득한 골짜기의 환상은 이스라엘이 국가를 재건해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될 미래를 상징적으로 그려주었다(37장). 즈카르야도 많은 상징을 사용하고 있다(1-6장의 6개 환상; 6,1-8). 다니엘은 상징을 사용하는데 있어서 다른 예언자들보다 앞서고 있고 그 뒤에 나오는 묵시문학 작품들이 그것을 많이 모방한다. 특히 7장에 나오는 네 마리의 짐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금, 은, 놋쇠, 철로 된 거대한 신상(神像)은 하느님의 왕국이 출현하기 이전에 역사에 계속적으로 등장할 4개 국가를 나타내고 있다(2장). 묵시 13장에 나오는 짐승의 상징은 다니엘서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5) 묵시문학의 가장 이색적인 특색은 가명(假名)을 쓰고 있는 점일 것이다. 이 저자들은 가명-과거의 위대한 인물이나 예언자들을 내세움으로써 자신을 감추어 버린다(예 : 헤녹, 아브라함, 야곱과 그의 아들들, 모세, 바룩, 다니엘, 에스드라). 이것은 지혜문학의 작품들이 가장 뛰어난 지혜문학 작가로 기리어진 솔로몬의 이름으로 쓰인 것 같이 묵시문학 작가들은 가상적으로 옛 예언자들이나 족장(성조)들의 입장이 되어 작품을 썼는데 당시 널리 이용되던 이러한 허구적 수법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작품에 보다 큰 권위를 부여하고자 했다.


 3. 묵시문학 유형의 기원과 발전

  어떤 문학 유형이나 그 발전경위를 정확히 더듬어 보려면 우선 그 유형이 발달했던 시대의 대표적인 책들이나 작품들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묵시문학 유형에서는 그 발전사를 순서대로 살펴볼 만한 책이 없다. 그래서 묵시문학적 색채가 짙은 초기의 단편적인 작품들로부터 다니엘서 등 그 밖의 신 · 구약의 중간시대의 난숙한 작품들에 이르기까지의 정확한 발전사를 더듬어 볼 수 없다.
  하지만 기틀 잡힌 문학유형을 깊이 연구해 보고 꽃피게 한 씨앗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 초창기 단편적인 작품들
  탈출기 7-12장, 19,16-19, 신명기 28,60-68, 아모스 3,14 : 5,18 이하. 이사야 13-14장 등의 초기 전승들, 시편 10 ; 47 ; 49 ; 82 ; 96 ; 97 등에서 묵시문학의 색채를 띤 초창기의 글귀들을 식별할 수 있다.

2) 묵시문학 유형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단계
  묵시문학의 시조인 에제키엘서(38-39장 ; 40-48장), 이사야서(24-27장 대묵시록 ; 34-35장 소묵시록), 즈카르야서(9-14장), 요엘서의 여러 대목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 완전한 묵시문학 작품은 마카베오 시대에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 아래서 작성된 다니엘서다(기원전 167-163년경 작품).

3) 외경의 작품들
  묵시문학 유형이 발달하여 완전한 기틀이 잡힌 것은 그리스도 강생 전의 마지막 두 세기인데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정전(正典)에서는 다니엘서 한 권뿐이지만 외전(外典, 혹은 外經)의 묵시문학 작품은 매우 많다. 그 가운데 중요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아래 책들의 내용에 관해서는 죤 브라이트, 이스라엘의 역사 下, pp.361-372; 박찬용, 요한 묵시록 주해 pp.22-33; 성서백과 4, p.221이하, 이동진 편역 제 2의 성서 아포크리파(구약시대) 에누리, 2001과 민병섭, 요한의 묵시록 p.22이하를 참조하라.
 

* 외경의 작품
①에디오피아 어(語)의 에녹서(제 1 에녹서) ②희년서(모세 묵시록) ③열두 족장 유언 ④솔로몬 시편 ⑤모세 승천기 ⑥이사야의 순교와 승천기 ⑦시빌리아 신탁 ⑧슬라브 어(語)의 에녹서(제 2 에녹서) ⑨에즈라 1서 ⑩에즈라 2서 ⑪시리아 어의 바룩 묵시록

4) 구약정경에서의 묵시문학적인 요소가 담긴 부분들

<탈출기 7-12장>
  시나이 산에서의 하느님의 현현(顯現)에 따르는 번개, 천둥소리, 폭풍의 구름, 연기, 나팔소리 등은 그 후 틀에 박힌 일정한 무대의 소도구가 되어 시편의 저자나 예언자들뿐만 아니라 묵시문학 작가들도 하느님이 심판하러 오실 때를 묘사할 경우 같은 표현을 쓰고 있다(시편 18; 50; 75; 이사 6; 에제 1; 미카 1,3-4; 스바 1,14-16; 하바 3,3-6; 에제 38,18-23; 다니 7,9-10; 묵시 4,4-5 참조).

<에제키엘 38-39장>
   마곡의 왕 곡에 대한 예언적인 묵시문학

<에제키엘 40,3-4>
  하느님과 이 세상의 중간 존재로서 등장하고 있는 중개 대화자 천사는 묵시문학의 또 하나의 중요한 무대의 소도구가 되고 있다(즈카 1,8 이하, 2,2; 다니 8,16; 9,21; 10,5; 묵시 21,15 이하 참조).

<이사야서 11장>
  여기서는 메시아의 내림과 창세기 2-3장에 묘사된 낙원시대의 회복이 「주님의 날」이란 개념으로 결합되어 있고 이것은 후대의 예언문학과 묵시문학에서 자주 이런 주제들을 하나로 결합케 하는 길을 닦아 놓을 것이다(아모 9,11-15; 이사 65,17-25 ; 즈카 14,6-11; 요엘 4,17-21; 다니 2,44-45; 7,13-14; 묵시 21-22 참조).

<즈카르야 1-8장>
  즈카르야서에는 묵시문학의 상투어구가 된 많은 상징적인 표현들이 수록되어 있다. 예컨데 힘을 나타내는 「네 뿔들」은(1,18-21; 2,1-4 참조) 구약성서에서 자주 나오는 은유에서 취한 말인데(신명 33,17, 1 열왕 22,11 참조) 이것이 다니엘서와(7,8; 8,3-8 참조) 요한 묵시록에서(12,3; 13,1 참조)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에제키엘서에서(1,18) 취한 일곱 눈은(3,9; 4,10) 하느님의 전지를 상징하는 말인데 다니엘서와(7,20) 묵시록(5,6)에 다시 나타난다. 「바구니(말 속에) 안에 앉은 여인」은(5,5-11) 그녀를 위해 신전을 세운 바빌론의 사악을 나타낸다.
  이것이 묵시록에 대탕녀(엄청난 탕녀)로서 다시 나타난다(17,5-6).
  끝으로 아모스서 7-9장을 본따서 즈카르야가 자기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표현하는 수법으로 이용한 문학적 환시는(1,7; 2,1; 2,5; 기타 등등) 다니엘서(2,9; 4,7; 7,1; 8,1; 9,21; 10,7)와 묵시록(9,17)에서 폭넓게 이용되고 있다.



II. 그리스도교 묵시문학 : 요한 묵시록

서론

  요한 묵시록은 일반 신자들에게나 현대의 독자들에게 굉장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또 그들을 당혹케 한다. 사실 요한 묵시록은 성경 안에서 가장 모호하고 논란이 많은 책이다. 그리고 이 책을 해석하는데 있어서도 그 의견들이 구구하고 엉터리 같은 해석,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만 해석하기도 한다.
  신 · 구약성서 중 제일 끝에 위치한 묵시록은 벌써 제목 자체가 그 성격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묵시록은 신약성서의 다른 책들과 성격(종류)이 판이하다(4복음, 사도들의 기록인 사도행전, 기타 사도들의 서간과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교리에 있지 않고 문학적인 기법(쟝르)이나 주제, 내용에 있다. 이것은 경고와 위로, 앞으로 있을 심판과 축복을 모두 내포한 일종의 예언의 책이다(1,3 ; 22.7.18.19).
  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묵시록 저자는 상징과 환상을 사용한다.


1. 유대 묵시문학과의 비교
  
  유대 묵시문학이나 요한 묵시록은 위기와 혼란이 가중되던 시기에 저술된 것이다. 이 작품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된 자들을 위로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인간 운명의 안내자이시며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더욱 강건하게 갖기 하기 위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다”.  . 안병철, p.15.
 요한 묵시록이 유대 묵시문학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유대 묵시록을 표절하거나 모방한 것은 아니다. 이제 두 묵시문학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점을 찾아보도록 하자.

  1) 유대 묵시문학과 요한 묵시록을 비교해 볼 때 긴밀한 유사점도 있지만(관점, 표상, 체제) 큰 차이점도 있다. 예컨데 묵시자 요한은 유대 묵시문학에서처럼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던 자기 이름(요한)을 서슴치 않고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묵시 1,1; 4,9; 22,8). 요한은 자기 자신이 참다운 예언자로 자처하기에 다른 어떤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내세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묵시자 요한은 자기의 저서가 먼 후대를 위해 씌어진 것처럼 꾸미지 않고 바로 자기 이름을 밝히면서 교회에 직접 제시하고 있다(묵시 1,11-7교회, 2-3장). 또 유대 묵시문학과는 달리 요한 묵시록은 저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에 요한 묵시록의 저술 연대 표명이 분명해진다.
  또 요한 묵시록은 유대 묵시문학에서처럼 알아듣지 못하도록 신비의 베일에 싸인 표상을 통하여 과거의 역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종말의 사건들 만을 알아듣도록 유도하고 있다. 이 종말의 사건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까지를 포함한다.

  2) 유대 묵시문학과 마찬가지로 요한 묵시록에서도 묵시가 여러 모양으로 등장한다. 또 유대 묵시자들과 같이 묵시자 요한도 어떤 황홀경에 들어가(묵시 1,10; 4,1 등) 탈혼상태에서(묵시 17,1 이하, 21,9) 묵시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요한 묵시록의 전체 진행과정(우주에 일어날 일)도 유대 묵시문학적 전승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묵시자 요한은 유다인 묵시록들 속에 나오는 내용들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고, 그러한 원천들을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요한은 자기가 친히 체험한 꿈이나 묵시만을 단순하게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전승에서 전해받은 자료와 소재를 이용하여, 그것을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거양되셨으며 또 재림하실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과 연결시킴으로써 그리스도교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

  3) 요한 묵시록에는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신다: 유대 묵시록들 속에는 오직 하느님만이 새로운 시대를 구현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거기에는 메시아라는 개념이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에서 하느님의 계획은 그리스도께서 봉인을 떼시는 순간부터 실현되기 시작한다. 오직 그분 만이 봉인을 떼실 자격을 갖고 계신다(1,5; 5,9; 7,14; 12,11; 22,14). 그분은 하늘에서 하느님 우편에 자리잡고 계신다(3,21; 7,17; 22,1-3). 종말이 오면 그분은 심판주로 등장하실 것이고(19,11) 세상의 주님으로 드러나실 것이다(2,26; 12,5; 19,15).  . 안병철, p.16.


2. 요한 묵시록의 배경

1) 역사적 배경
  요한 묵시록의 배경은 주로 로마의 영토인 아시아 지역의 이오니아 해안 도시들인 듯 하다. 그곳에서는 각종 종교의식들이 성행했는데 이것들은 그리스도교와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런 의식들을 우상숭배로 거부했고 유일신론(唯一神論)을 주장했기 때문에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대감을 야기시켰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급성장으로 그들은 경제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었다. 교회는 그들의 예배장소를 텅비게 했고, 신상을 만드는 장인들, 제물용 짐승 거래자들도 생계수단을 잃었고 설 자리마저 잃어버렸다.

2) 정치적 배경(초대교회의 정치적 고민)
  초대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곧 도래하리라고 생각했다. 죄악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가까운 시일 내에 임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며 당신의 정의를 들어내시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약 70년이 지나도록 그리스도께서는 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초조감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도래(재림)을 애타게 기다렸다(1테살 4,13-5,11에서 사도 바울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자기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래서 1코린 16,22과 묵시 22,20에서 볼 수 있는 기도, ‘마라나타’(Maranatha - 주여, 빨리 오소서)라는 화살기도를 자주 드렸다. 또 초대교회는 일반적으로 로마제국에 충성을 다하여 화목하게 살려고 했다(로마 13,1-7; 1디모 2,1 이하; 디도 3,1; 1베드 2,13 이하). 예수의 말씀대로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면서(마르 12,17 병행귀) 교회는 살았다. 그런데 교회가 갑자기 제국과 맞서게 되었다.
  묵시 13장과 17장에 보면 저자는 실랄하게 제국의 정치를 비판하고 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의 일치를 도모하기 위해서 황제들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서 황제를 숭배하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식민지 백성들로 하여금 황제에게 절대 복종을 하게 하려는 정치적 방편이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나 그의 후계자들은 그러한 황제 의식을 매우 제한적으로 이용했지만, 37-41년까지 통치한 갈리굴라 황제나, 54-68년까지 통치한 네로 황제, 그리고 81-96년까지 통치한 도미시아누스 황제등은 자신들의 권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행사하기 위하여 황제숭배의식을 의도적으로 강요했었다. 이 황제의식은 우리가 묵시록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순교자를 양산했다.

   ① A.D. 29년 로마제국은 Augustus를  神으로 모셨다.  ”Dii  Filius  Augustus“,  ”Θεού υἱός σεσαρτος“ 란 말을 동전 앞 뒷면에 새겨놓고 숭배예식을 강요했다.

   ② 네로 황제의 박해
   제5대 로마황제(재위 A.D. 54-68)로서 포악한 사람이었다. 59년에 어머니 아그립피나를 살해했고(생매장) 아내 옥타비아도 살해했다. 그는 A.D. 64년 7월 19일 카페나 문 근처 빈민촌 지역에서 대화재를 발생케하여서 로마시의 거의 사분의 일을 태운 장본인이었다. 그 방화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전가시켜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네로 박해 때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순교하였으리라 추측한다. 이것은 한 세대 후에 쓰인 로마의 클레멘스의 서신에서 그들의 죽음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치의 최악의 상태와 무절제한 사생활 등으로 인한 반란 때문에 네로는 68년 6월 9일 자살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네로가 사실은 죽지 않았으며 동방 어느 곳(파르티아)으로 도망친 것이며 언젠가 로마를 멸망시키러 동방으로부터 돌아오리라고 믿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다인들은 어떤 악의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세말에 하느님을 대적하여 나타나리라는 민간신념에 사로잡혔다. 유다인들은 그런 악의 표본적 인물로 네로를 손꼽고 있었으며 그가 세말에 다시 나타나리라고 믿었다. 묵시록에도 이런 사실들이 반영되어 있다(묵시 13,3; 17,10이하). 그러나 네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가해진 박해는 로마라는 지엽적인 장소에 국한되었다. 이렇게 볼 때 묵시록에서 언급되고 있는 주된 내용이 네로 황제가 가했던 박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③ 도미시아누스(Domitianus) 박해(A.D. 81-96)
  일반적으로 묵시록이 도미시아노 황제 말기에 씌어졌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통치 시기는 혼란의 시기였다. 그의 통치전 A.D. 79년 폼페이시와 Herculaneum시가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폐허가 되었다. A.D. 81년 역병이 창궐하였고, A.D. 83년 그의 아들이 죽자 이 아들은 신이며, 그의 어머니 도미티아는 여신이라고 선언했다. 어린 아들을 위한 기념화폐를 발행하였고, 지구의 궤도 위에 앉아 있고 달과 유성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새겨 넣었다(성서백과 p.355).
  도미시아노 황제는 자신을 ‘κύριος καὶ Θεός’(Dominus et Deus)로 자처하면서 자신을 경배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묵시록에서 언급한 내용, 곧 권력을 휘둘러 누구나 그 앞에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짐승’의 묘사와 일치한다(13,15). 하지만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인간에 지나지 않는 황제 중에서 서슴치 않고 그리스도를 유일하신 Κύριος로 택했다. 요한은 유일하시고 참되신 Κύριος,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했다(묵시 1,5 이하; 4,8.11; 5,9 이하; 7,10-12; 15,3; 16,5 이하; 19,1-8).
  묵시록을 이해하려면 정치적인 긴장상태를 감안하여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는 전례와, 황제를 신으로 신봉하는 로마제국의 예식을 비교해야 한다.
  투쟁의 내용은 정권장악이 아니라 사상과 전례, 예식문제였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새로운 경신례를 거행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그들을 박해하게 했다.
  요한 묵시록은 새로운 경신례를 거행하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황제의 절대 권력을 구축햐려는 로마 제국이 비극적으로 대립하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요한 묵시록의 저작상(著作相)

  1) 요한 묵시록에는 상징적인 표현이 많은데 이 표현들은 대부분 구약 및 유다이즘에서 온 것이다. 저자는 유다인으로서 유대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근동지방의 신화 및 종교적 요소도 잘 알고 있었다(예 : 바빌론의 성신종교).
  하지만 저자는 이런 전통적 요소들을 단지 수집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개인사상을 기반으로 해서 전통적 요소들을 모아 편찬했으니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낸 셈이다.

  2) 묵시록은 시대적 요청의 산물이며 교회의 서적이다. 당시 박해와 곤경으로 신음하던 교회에 저자는 용기와 희망을 불러일으켜 주기 위해서 묵시록을 저술했다. 저자 자신도 파트모스 섬에 연금되어 있으면서 이 책을 쓴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곤경에 처해 있는 지상교회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써 구속된 무수한 간선자들, 즉 모든 민족과 모든 언어와 모든 백성들 가운데서 구속된 자들의 무리를 바라보고 있다(7,1-17).


          III. 요한묵시록

1. 제목
  
  묵시록 저자는 1장 1절에서 자신의 저서를 “묵시록”이라도 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Αποκάλυψις Ἰησού Χριστού)이다. ’Αποκάλυψις(Apocalypsis)라는 희랍어 책명은 이 책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며 원본의 첫 단어로 등장한다. 거기에서 이 단어는 최초의 문장을 구성한다. 즉 ’Αποκάλυψις는 이 책의 최초의 단어일뿐만 아니라 내용의 대부분을 묘사하고 있는 주제의 제명이기도하다. 책의 첫 단어로 책 제목을 붙이는 히브리식 서법이 이 경우에 지켜졌다는 것은 히브리 전체문헌의 추세와도 일치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다시 반복되지 않는다. 차라리 저자는 자신의 저서를 예언서(1,3)라고 자주 부르고 있으며(22,7.10.18.19) 자신을 예언자들 중의 하나로 표현하고 있다(22,9).
   구약성경 70인 역에서 ἀποκαλυπτείν은 히브리어 hl'G"를 번역한 용어로 “덮여 있는 것을 열어서 감추어진 것을 보여주다. 드러내 주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레위기와 신명기와 같은 법전, 룻기(3,4.7)에서는 “옷을 들어 치부를 들추다”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곧 “아비의 치부를 드러내다, ~의 치부를 드러내다” 등. 그런데 민수 22,31에서 하느님은 발람의 눈을 열어 주시어(ἀποκαλυπτείν) 주님의 천사가 칼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해 주신다. 곧 발람은 자신의 인간적인 눈으로만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당황하고 있을 때 하느님이 눈을 열어주시자 그 현상 이면에 있는 천상세계와 관련된 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민수기에서는 여러 차례 이 단어가 “환시를 보다”라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24,4; 24,16). 1,2 사무에서는 주님이 나타나는 것을 표현하는데 주로 사용하지만, 주님은 환시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주로 나타나시는데, 이 때 귀를 열어 말씀을 듣도록 해 주는 것 역시 “ἀποκαλυπτείν”, “hl'G"”로 표현된다(1사무 2,27; 3,21; 14,8). 참 인상적인 것은 열왕기와 역대기에 “hl'G"”의 hiphil형이 자주 등장하는데, “유배에 끌고가다”라는 뜻이다. “드러내다”와 “유배에 끌고가다”의 어근이 같다는 점 것이다. 유배시기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런 뜻들은 구약성서 전체, 예언서와 지혜서 전체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도 자주 등장하는데, 모든 경우에 “하느님이 미리 준비해 놓으신 심오한 계획을 드러내 주는 행위나 혹은 드러난 그 계획”을 뜻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말을 한글로 묵시(黙示) 또는 계시(啓示)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이 두 단어를 조금 구분하고자 한다. 먼저 묵시(apocalypsis)란 말은 마지막 때에 대한,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비밀을 알려주는 것을 뜻하며 “묵시록”(apocalypse)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비서(秘書)의 성격을 가지는 하나의 장르를 뜻한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의사소통적인 차원에서 하느님의 의도(계획)을 알려준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만약 우리가 이 책의 제목을 “계시록”이나 “계시들”이라고 부른다면 이 책의 묵시적 장르 성격을 보여 준다기보다 마치 이 책속에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있다고 오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실제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 안에서 많은 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장르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묵시록”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2. 저자

  성서의 저자를 밝힌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복음서들에는 저자들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요한 묵시록에서는 무려 네 번이나 저자가 자신을 가리켜 ”요한“이라고 한다(1,1.4.9; 22,8): 그는 자기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1,1), 이 책의 독자들의 ”형제“이며, 그들과 함께 수난을 겪고 있으며, 장차 그들과 함께 영적 특권을 누릴 자라고 공언한다(1,9). 그는 자신을 사도, 또는 예수의 제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아시아의 교회들에 잘 알려진 인물이며, 이미 “예언자”로 인정받았고(22,6.9.19), 전에도 계시적 성격을 띤 환상을 받아왔던 사람이었다.
  초대 교회의 전통은 한결같이 예수께서 사랑하셨고, 복음서와 세 서간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묵시록의 저자라고 증언하고 있다. 유스티노( +150년경)를 필두로 하여  . 160년 경에 저술한 그의 저서인 『트리폰과의 대화』(81)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우리들 중의 하나요, 그리스도의 제자들 중의 하나인, 요한이라고 불리는 자는 그에게 위탁된 계시를 통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천년간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 유스티노의 이와 같은 증언 내용은 묵시 20,4-6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안병철, 요한묵시록, I, p.24; 카를로스 메스테르스, 누가 알아 듣겠는가? 성바오로출판사, 1992, p.12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215), 리용의 이레네오( +202), 무라또리 정전목록, 테르툴리아누스(160-220년경), 히뽈리투스, 오리게네스(185-254)등도 묵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라는 유스티노의 의견을 따랐다.
  하지만 묵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는 학문적 비교를 통해서 이 책의 저자가 요한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는 요한복음과 묵시록을 비교하면서 첫째, 묵시록에서는 저자가 요한임을 밝히고 있으나, 복음 및 요한 서간에서는 익명이다. 둘째, 요한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빛, 생명, 진리, 은총” 등의 용어들이 묵시록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요한묵시록은 사도 요한의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리고 셋째, 요한복음이나 서간은 대체로 훌륭한 그리스어 문법을 구사했는데 묵시록에는 문법상 틀린 곳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에우세비오는 묵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 원로 요한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복음과 서간에는 저자가 분명히 익명으로 되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추측컨데 열 두 제자들 중 한 사람으로서 이미 독자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또 이것 때문에 후자가 전자의 저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근거가 없다. 용어의 차이도 주제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올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양자 사이에 유사점도 대단히 많다: 양자가 근본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부활하시어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 안에 이미 현존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 생명, 증언, 생활한 물과 같은 주제들은 두 곳에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 E. 샤르팡티에 外 지음, 묵시록, 가톨릭출판사, 1991, p.20.
 또 양자 모두 예수를 유사한 말로 지칭하고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요한 1,1; 묵시 19,13), “어린 양”(요한 1,29 ἀμνός; 묵시 5,6 ἀρνίον), “목자”(요한 10,11; 묵시 7,17)등이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묵시록에 대한 요한의 친저성을 부인한다: 원로 요한은 초대 교회 때부터 나온 인물이며, 이 인물에 대해서 파피아스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가 바로 묵시록의 저자라는 것이다. 또 그가 자신을 “예언자”라고 소개한 것도(22,6.9.19) 그가 사도가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사도였다면 ‘사도적 권위’를 내세웠을텐데 그렇지 않았기에 예언자라고 소개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대부분 성서학자들은 묵시록의 저자가 초대 전승이 증언하듯 사도 요한이라는 데에 동감을 표시한다. 비록 사도 요한이 직접 쓰지는 않았을지라도 그의 사도적 권위 아래 씌어진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 묵시록의 저자가 사도 요한도 원로 요한도 아니라고 부정하는 학자도 있다: “묵시록이 가명으로 쓴 작품이라는 설과 원로, 또는 사제인 요한이 쓴 것이라는 설은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묵시록의 저자는 달리 알려진 바 없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초기 그리스도교 예언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 같다”. 카를로스 메스테르스, p.123.


3. 집필 장소와 연대
  
  묵시록의 저자는 묵시를 파트모스(Patmos) 섬에서 받았다(1,9). 이것은 묵시록이 꼭 파트모스 섬에서 저술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소아시아 지방의 일곱 도시를 잘 아는 것으로 볼 때(1,11) 그는 소아시아에 살던 사람이다.  
  연대문제도 저자문제와 같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자신의 저서에서 “형제들과 환난과 시련을 같이 겪으며,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을 위해 파트모스라 불리는 섬에 있게 되었을 때”(1,9) 환시를 받았고 이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밝히고 있다(1,9-11).
  그러면 과연 언제 묵시록의 저자인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 유배를 갔느냐를 밝히는 것이 연대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것인데 그것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 크게 세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① 4세기 살라미스 출신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라는 이단 역사가와 일부 다른 사람들은 클라우디오 황제(A.D. 41-54)가 통치하던 때에 요한이 그 섬으로 유배를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연대는 너무 이르다. 그 당시에는 아직 아시아 교회들이 설립되지도 않았고, 로마제국과 그리스도교와의 긴장관계가 이 책에 나타날 정도로 심각하지도 않았다.

  ② 네로 황제(A.D. 54-68)가 통치하던 때에 이 책이 저술되었다고도 한다. 특별히 이 책에 기록되어 있는 짐승의 숫자 666이 히브리어로 쓰인 네로 황제(NERON KESAR)라는 글자의 수치의 환산과 같은 것도 그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한다.

  ③ 그러나 전통적이고 가장 오래된 견해는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네오( +202)의 증언이다. 교회의 역사가 에우세비오는 그의 저서 『교회사』에 이렇게 적고 있다(III, 18):
  소위 『요한의 묵시록』이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반 그리스도인의 이름의 숫자에 관한 기록을 하면서 이레네오는 자신의 작품 『반이단론』 제 5권에서 요한에 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그 계시는 아주 오래 전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도미시아누스(A.D. 81-96)의 통치 거의 말년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뻬따우의 빅토리아누스, 예로니모 등의 교부들이 여기에 동의했다.  특히 에우세비우스는 이레네오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도미시아누스 통치 14년, 즉 94/95년에 묵시록이 씌어졌다고 구체적으로 그 집필연대를 규명하였다.

  ④ 트라야누스 황제(A.D. 98-117) 시대에 이 책이 집필되었다는 주장도 있고, 또 요한 묵시록이 하나는 네로 황제 시대에 또 하나는 도미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저술된 두 개가 모아져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현대 성서학계에서는 이레네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전반적인 증언의 내용으로 보아 현재 형태의 요한 묵시록은 도미시아누스 황제 시대에 편집된 것이라고 본다.


4. 묵시록에 나타난 파격어법

    Charles는 오메로의 그리스어부터 1400년대까지의 그리스어를 연구하면서 묵시록 만큼이나 많은 문법적 오류(파격문법, Solecism)를 가지고 있는 책을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 한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다른 책에서는 137번의 문법적인 오류가 등장하는데 이곳 묵시록에서는 136번의 문법적인 오류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묵시 1,4 avpo. o` w'n kai. o` h=n kai. o` evrco,menoj에서 전치사 avpo.는 속격(genitive)를 지배하는 전치사인데도 불구하고 주격(nominative)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1,5 avpo. VIhsou/ Cristou/( o` ma,rtuj( o` pisto,j( o` prwto,tokoj tw/n nekrw/n kai. o` a;rcwn tw/n basile,wn th/j gh/j에서 VIhsou/ Cristou/의 동격으로 속격을 사용하지 않고 주격을 사용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게다가 묵시록에서 e;cw라는 동사는 아예 동사변화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묵시록 저자는 왜 문법적으로 이렇게 파격을 쓰고 있는 것일까?
    Wiener는 저자가 이 책을 쓸 때에 탈혼상태에 있었으리라고 이야기 한다. Charles는 저자가 1) 히브리어로 생각하면서 그리스어로 글을 쓰고 있고 또 2) 그리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으며 3) 어떤 것은 사투리에 기인했을 수도 있고 4) 마지막 탈고를 하지 않었거나 아니면 별로 그리스어를 잘 모르던 제자가 손을 댔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 한다. Adela O'Collins와 같은 학자는 요한이 아주 의도적으로 당시 주도적인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화에 반대해서 파격문법을 썼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적인 문법을 깨뜨림으로써 그리스 문화 전체를 깨뜨리는 의미를 담았고 또 억압자인 그리스문화의 침략에 항거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Biguzzi는 저자가 자기 나름의 문법을 만들고자 했음을 볼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곧 “상징의 문법”(grammar of Symbols)이다. 예를 들면 “내 어깨 위에 있는 한 음성을 들어라. 내 소리를 보아라” “여덟번째 왕은 역시 일곱 번째 왕이다”와 같이 아주 이상하고 요상스러운 표현들, 문법들을 사용한다. 이것은 요한이 사용하는 ‘설화’(narrative)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인 설화 양식을 따르지 않고 아주 자유롭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문법 뿐만 아니라 그가 사용하는 상징, 그리고 이야기 전개 방식 모든 면에서 우리는 저자 고유의 자유로움과 주관적인 면모를 발견할 수 있겠다.
    그러면 여기서 저자가 사용하는 ‘상징의 문법’에 관해서 다루어 보도록 하자.  
   1) 한 인물을 소개해야 할 때 마치 해부학책에 나오는 듯이 그 인물을 상세히 묘사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인물의 외형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형을 묘사함으로써 그의 ‘정체’(identity)를 묘사하는 것이다. 곧 “사람의 아들을 닮은 이”와 같은 표현이 그것이다. 이런 표현은 책 전체에 많이 등장한다.
   2) 이미지의 변형(metamorfosi), 곧 앞에서 표현된 이미지가 그대로 사용되지 않고 자꾸 변형이 된다. 예를 들면 7,1-8에 나오는 144000명의 사람은 하느님의 인장을 이마에 받는다. 그러나 14,1에서 보면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와 같이 이미지가 같은 상태로 남아 있지 않고 변화한다. 17,15-18에서 보면 먼저 대탕녀 바빌론을 이야기 하는데 처음 탕녀는 마치 하나의 도시처럼 묘사되다가 다시금 여인처럼 묘사되고 다시금 도시처럼 묘사된다. 어떤 일관성을 가지기보다 여인과 도시 두 가지 사이에서 이미지의 변형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어린 양으로 계속 묘사되고 있다가 나중에는 흰말을 타고 전투를 벌이는 이로 묘사된다(19,11-21).
   3) 묵시록에 등장하는 여러 에피소드들은 하나 하나 독립적인 특징을 지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장 시작에서 대창녀는 큰 물 곁에 앉아 있다. 그러나 이내 3절에서 진홍색 짐승을 탄 여자를 보게 된다. 그런데 이 여자는 9절에서 일곱 산을 타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 별로 개의치 않는다. 아니 너무나도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겠다. 각 에피소드를 논리적으로 완벽하게 연결할 수 없도록 각 에피소드 하나 하나 남겨두는 것은 묵시록 만이 지니는 하나의 특징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
   4) 설화적 공백(lacune narrative)에서 길을 잃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인장을 받은 이를 나열하는 묵시 7,5-8이 대표적이다. 설화가 갑자기 끊기고 설화자는 장황하게 인장을 받은 이에 관해 나열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묵시록 저자가 사용하는 고유한 이야기방식을 따라가면서 그가 전하고자 하는 표현방식에 익숙해 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공백은 너무나도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5) 동사 사용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파격을 사용한다. 예를 들면 11장에서 두 증인에 관해 이야기를 하는데 시작은 미래형으로 시작해 놓고 4번에 걸쳐 현재형을 사용한 뒤 마지막에는 과거(aorist)형이나 미완료과거(imperfect)형을 사용한다. 이것은 18장에서도 반복되는데 바빌론 패망을 보고 전하는 소리에서 시제가 왔다 갔다 한다. 뿐만 아니라 10,7에서는 “일곱번째 천사의 소리의 날에, 그것이 막 울리려고 할 때(이제 막 다가올 사건),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선포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신비는 이루어졌다(완료된 사건).”( evn tai/j h`me,raij th/j fwnh/j tou/ e`bdo,mou avgge,lou( o[tan me,llh| salpi,zein( kai. evtele,sqh to. musth,rion tou/ qeou/( w`j euvhgge,lisen tou.j e`autou/ dou,louj tou.j profh,taj) 물론 희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aorist’ 과거형은 시제와 상관없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을 표현하기 위해 미래를 지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문법적인 탈형임에는 분명하다.
  6) 한 주제나 대상에 대해 다양한 방식과 표현을 사용해서 묘사한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묘사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 대상을 묘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11,2에서 먼저 이민족들이 거룩한 도성을 42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이야기 한다. 이어서 11,3에서 두 증인을 내세워 1260일 동안 두 증인이 자루 옷을 걸치고 예언하게 하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12,6에서 여인이 다시금 1260일 동안 보살핌을 받도록 하느님이 마련해 주신 처소가 있다고 말한다. 이어 12,14에 여인이 일 년과 이 년과 반 년 동안 그 처소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정확히 42달, 42×30=1260일이다. 13,5에 짐승은 마흔 두 달 동안 활동할 권한을 받는다. 항상 같은 길이의 시간이다. 왜 그럴까? 어찌 보면 네 가지 다른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같은 이야기의 여러 가지 다른 양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닐까? 곧 시간 순서대로 이루어 진 사건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벌어진 사건을 뜻하지는 않을까?
  21장에서도 3절에서 새로운 예루살렘이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요한이 보았는데 10절에 가면 다시 천사가 그를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이 두 번 내려왔다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같은 사건의 두 가지 면을 설명하는 것이라고나 할까?
  아마도 같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저자는 두 번 중복해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듯하다. 곧 처음 이야기를 전개할 때 먼저 이야기를 듣게 된 독자가 그 이야기가 마치기도 전에 같은 이야기를 다소 다른 방식으로 전해 듣게 됨으로써 한 사건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묵시록에 드러난 여러 가지 파격적인 구조나 파격적인 문법들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 분명하다. 어찌보면 눈에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상을 설명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깨달을 수 없는 그분의 뜻 역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묵시록의 서술 방식은 대단히 독창적이면서도 적절하다 하겠다. 특별히 하느님의 행동, 곧 확실한 것을 하고, 확실한 것을 약속하기 때문에 이미 확실성이 보장된 “과거형 AORIST”를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저자가 사용하는 상징적인 숫자나, 여러 상징들을 통해서도 잘 찾아 볼 수 있다.


4. 묵시록에 나타난 상징들

 묵시록을 이해하려면 상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자주 “귀 있는 자는 영이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라”(2,7등)고 되어있다. 상징은 symbol이 아니라 mysterion (μυστήριον)이다. 신비, 비밀이다. 묵시록의 상징들은 여러 영역에서 나타난다: 우주적인 면으로, 동물들로써, 인류학적으로, 색깔, 숫자 등으로 나타난다. 

1) 상징적인 숫자
   대개 묵시문학에는 상징적인 숫자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묵시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사탄의 숫자 666(13,8), 144000, 1000년 왕국 등등. 아마도 이 상징적인 숫자는 페르시아에서 기인했을 것으로 본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는 단순히 양적인 수를 지칭하기 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상징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수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전하기 위해서 매우 면밀히 의도적으로 짜여져 있다. 묵시록 저자는 매번 숫자를 사용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한번 찾아보라는 초대를 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해답을 주지는 않는다. 독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찾아보라는 뜻이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까닭이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사람은 그 짐승을 숫자로 풀이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입니다. 그 숫자는 육백육십육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묵시록에서 사용하는 숫자에 대해서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가장 기본적인 숫자는 7, 3, 12, 4이다.
   4는 땅의 네 모퉁이, 곧 사각으로 생각된 땅의 네 모퉁이를 상징한다. 땅의 네 요소인 네 방위 등 어찌보면 우주론적인 가치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21장에서 예루살렘에 대해 설명하는데 있어서도 4개지 방향을 이야기 한다. 14,20에 나타나는 1600 스타디온이라는 숫자는 4×4×100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피가 흘러나와 1600스타디온이나 퍼져 나갔다는 말은 사방으로, 모든 방향으로 피가 넘쳐흘렀다는 것을 뜻 한다.
   12: 묵시 7장에 보면 144,000명이 12 지파에서 각각 12,000명씩 모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여기서 숫자를 통해 신학을 전개하고자 한다. 여기서 12는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 4,10에 하늘의 어좌 옆에 있던 24명의 원로들은 12제자와 12성조들 뿐만 아니라(구약의 하느님 백성과 신약의 하느님 백성 모두를 포괄하는 것) 예루살렘에도 12개의 문과 도성 성벽의 초석 역시 12개이다. 이 초석 위에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예루살렘 도성의 길이와 너비가 똑같이 12,000 스타디온인데 이렇게 되면 도성의 넓이는 12,000×12,000=144,000 스타디온이 된다. 성벽의 길이는 144 페키스이다. 모두가 12 아니면 12×12 등으로 이루어 져 있다. 22,1에는 강 이쪽저쪽에서 열 두번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다고 전한다. 매달 하나씩 열매를 내는데, 이렇게 되면 1년 동안 매달 한번 씩 열매를 맺는 것이다. 1년 12달의 의미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시기를 뜻한다.
   7: 소아시아의 7교회. 그러나 라오디케아 바로 옆에 골로사이가 있는데 당시 바오로가 편지까지 쓸 정도로 유명한 교회였던 골로사이에 대해 요한이 몰랐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결국 요한은 7이라는 숫자를 사용하기를 원했고 7개의 메시지를 전하기를 원했다고 보아야 한다. 두루마리는 7개의 봉인으로 닫혀 있었고 7 천사고 7 번의 나팔을 부르는데 이것은 7번의 재앙을 가져다 준다. 7 잔과, 7번의 재앙.
   7에는 하나의 “도상학적인 가치”(iconographic value)를 지닌 것도 있다. 어린양은 7개의 뿔과 7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5,6) 여기서 7은 “전능”을 상징한다. 그리고 “행위”라는 가치를 지닌 것도 있다. 어린 양은 7 번 봉인을 깨드린다. 이것은 하느님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인데 그리스도와 하느님이 하는 것 처럼 무엇을 7번 한다는 것은 바로 “완전히 행한다”는 것을 뜻 한다. 여기에는 어떤 것도 더 붙일 것도 없고, 더 뺄 것도 없는 완전함의 의미가 담겨 있다.
   7이 항상 긍정적인 면에서의 완전함 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곧 용은 7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그런데 10개의 뿔을 가지고 있는 대단히 부정적이며 사탄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7과는 대조적으로 7의 절반인 3½이 있다. 이것은 전체를 이등분한 것으로 한 부분을 나타낸다. 정확한 내용을 가리키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계속될 어떤 기간(부분)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짐승은 여인과 3년 반 동안 전쟁을 한다. 하느님과 그리스도는 완전하게 행동(7)을 하지만 용과 짐승은 적절하지 못한 방식(3½)으로 행동한다. 그들은 7이라는 완전함을 가지려 한다. 물론 그 7이라는 완전함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7에 따라 행동하지 못한다. 곧 불완전한 행동을 한다. “거룩한 도시”를 짓밟을 42달(月)이 가리키는 것은 한정된 기간인데 일어나는 위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년(年)으로 계산하지 않고 달(月)로 계산하는 것은 시간을 더 토막내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에 대해 더 중압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결국 위기와 고통을 의식하는 기간이 더 길게 느껴진다. 3년 반과 같은 전체(완전함)를 나타내는 기간이 등분된 것이 날(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인위적인 숫자놀음은 날마다 닥치는 상황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일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두 증인이 예언한 “일천이백육십일”(11,3)은 삼년 반과 같은 기간인데 이것이 말하는 것은 현재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의 긴박함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것이 매일 닥쳐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광야로 도망간 여인을 하느님이 “일천이백육십일 동안”(12,6) 먹여 살리셨다: 이 숫자가 상징하는 것은 원수의 세력에 대항하여 싸우는 기간 동안 구약에서 만나가 내린 것처럼, 하느님의 편에서 날마다 도와주신다는 것이다.

* 666과 짐승, 바빌론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일까? 이것은 Giancarlo Biguzzi, Apocallse, nuova versione, introduzione e commento di Giancarlo Biguzzi, Paoline, Torino 2005, 260-267을 요약하면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한 내용이다.

   666에 관해서는 정말 많은 해석이 존재한다. 이 666이 누구를 가르키는지를 해석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해석은 묵시록 전체를 이해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묵시록 전체가 666이 가르키는 그 짐승에 반대해서 적힌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초세기 부터 많은 사람 사람들이 이 숫자를 해석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이레네오(+ 180년)는 당시 세 가지 해석이 있었음을 전한다. 곧 EUANQAS, LATEINOS, TEITAN이다. 그리스어 숫가는 다음과 같다 : James Swetnam, 성서 희랍어 입문, 박찬용 편역, 가톨릭출판사, 1989, 13 참조

A
1
H
8
N
50
T
300
B
2
Q
9
X
60
U
400
G
3
I
10
O
70
F
500
D
4
K
20
P
80
C
600
E
5
L
30
R
100
Y
700
Z
7
M
40
S
200
W
800


이 음가를 기준으로 이레네오 시대에 제시되었던 이름들의 숫가는 다음과 같다.

EUANQAS
 5+400+1+50+9+1+200 = 666
LATEINOS
 30+1+300+5+10+50+70+200 = 666
TEITAN
 300+5+10+400+1+50 = 666


 이레네오는 “에우안타스”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어 “라테이노스”는 로마-라틴 황제를 지칭하는 말이고 “테이탄”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타이탄 뿐만 아니라 태양숭배를 나타낸 것이고 설명한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5,30,3 참조
 그러나 이레네오는 이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666이란 숫자를 만들 수 있는 이름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글자를 가지고 숫가를 환산하려는 것은 잘 못된 시도라고 본다. 그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굳이 알 필요도 없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만약 이름을 꼭 알아야한다고 요한이 생각했었더라면 이름을 알려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레네오는 이 666이라는 숫자가 어떤 이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악을 요약하는 상징적인 숫자라고 본다. 그는 먼저 666은 600과 66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600은 천사들의 죄악으로 인해 홍수 이전에 일어난 모든 죄악들 전체를 요약하는 것이라고 본다. 홍수가 와서 모든 죄악을 씻어냈을 때 노아의 나이는 600살이었다. 게다가 적그리스도는 홍수 이후에 벌어진 우상숭배들을 모두 요약하는데 우상 숭배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 지방의 두라 평야에 세운 자신의 금상으로 높이가 예순 암마, 너비가 여섯 암마이다. 아나니아와 아자리아, 미사엘은 이를 숭배하기를 거부하여 불가마에 던져 지는데 이 고통은 시대의 마지막을 예언적으로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Irenaeus, Against Heresies, 5,29,1-5,30,2 참조
 
   이레네오를 따라 사람들은 666을 하나의 상징적인 숫자로 보고 성서에서 666과 연결된 병행 숫자들을 찾아내고자 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6이라는 숫자를 단순히 “불완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레네오와 달리 현대까지도 여전히 숫자가 이름의 철자 숫가를 더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를 따르는 이들도 있다. 여러 그리스도교 분파들이 서로 서로를 헐뜯기 위해서 이 견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다음과 같다.

PAPEST
 80+1+80+5+200+300 = 666
ITALIKA EKKLHSIA
 (10+300+1+30+10+20+1)+(5+20+20+30+8+200+10+1) = 666
LOUQERANA
 30+70+400+9+5+100+1+50+1 = 666

    여기서 볼 수 있듯이 각자 적대자를 정해 놓고 그의 이름을 그리스어로 만든 다음에 숫가를 매긴 것으로 볼 수 있다. 몇 개신교에서는 PAPIST, 곧 교황 주의자들이 666이라고 하고, 같은 맥락에서 ITALIKA EKKLESIA, 곧 이탈리아 교회를 666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런 식이라면 LOUTHERANA라는 루터교 이름 역시 666 숫가를 채우기도 한다. 과연 요한 묵시록의 저자가 이 숫자가 루터교나 교황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이 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어쨌든 공통적인 견해는 이 숫자가 로마제국의 황제 이름을 뜻하는 것으로 보고 그들의 이름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하는 경우도 많다. 주로 카이사르, 타라야노, 칼리칼라 왕들의 이름에서 찾아 내려고 하는데 여러 가지 제안들 가운데 네로 왕에 관한 의견이 가장 많다. 그런데 여기서 네로 왕과 관련해서는 히브리어 숫가 히브리어 숫가에 관해서는 Giovanni Deiana, Ambrogio Spreafico, 성서 히브리어 입문, 박요한 역식 역, 성바오로, 2001 참조.

a
1
z
7
m
40
q
100
b
2
x
8
n
50
r
200
g
3
j
9
s
60
f
300
d
4
y
10
[
70
v
"
h
5
k
20
p
80
t
400
w
6
l
30
c
90


에 따른다. 곧 QSR NRWN(카이사르 네론, 희브리어와 같이 네로 황제의 자음만 떼어놓은 것), 이렇게 되면 히브리어로 !wrn rsq이 되는데 그 숫가는 100(q)+60(s)+200(r)+50(n)+200(r)+6(w)+50(n)=666 이 된다.
   A.G. van den Bergh van Eysinga을 시작으로 다소 새로운 해석이 등장했다. 숫자를 문자로 바꾸려 들지 말고 숫자로 남겨 두면서 666이라는 숫자에 담긴 특징을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그는 피타고라스가 “삼각수”(Dreieckszahl)라고 정의한 수의 법칙에서 그 답을 찾아낸다. 피타고라스는 1부터 계속 이어지는 정수의 합의 규칙을 찾아냈는데 1+2+3+…+n= 라는 법칙이다. 그런데 이 법칙으로 만들어진 수를 “삼각수”라고 부른다. 특별히 삼각수를 잘 표현해 주는 도형이 있는데 바로 Tetraktys이다.
   
  매 줄에 점 하나씩 늘여가면 계속해서 정삼각형을 이루는데 지금 여기서는 1+2+3+4=10이다. 필로는 이를 통해서 4는 10을 만들어내는 수로 10은 4가 현실화된 수라 하면 4는 10이 될 가능성을 가지는 수라고 본다. 이런 점에서 10과 4는 서로 같은 수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55는 10의 삼각수로 10과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666은 36의 삼각수이다. 흥미롭게도 36은 8의 삼각수이기에 우리는 666=36=8이라고 볼 수 있다. Van den Bergh는 요한 21,11에서 제자들이 잡은 물고기 153마리 역시 17의 삼각수라는데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사도 2,9이하에서 성령 강림 때 예루살렘에 모인 민족들의 수가 정확히 17개이다. 파르티아 사람, 메디아 사람...등등; Cf. G.A.van den Bergh van Eysinga, “Die in der Apokalypse bekämfte Gnosis”, ZNW 13, 1912, 296-297.
 그런데 묵시 17,11에 “전에는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이 여덟 번째 임금이다. 그러나 그는 일곱 가운데 하나였던 자로서, 멸망을 향하여 나아갈 것이다.” Van den Bergh의 의견에 대한 지지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묵시록 저자가 “_Wde h` sofi,a evsti,nÅ o` e;cwn nou/n yhfisa,tw to.n avriqmo.n tou/ qhri,ou( avriqmo.j ga.r avnqrw,pou evsti,n( kai. o` avriqmo.j auvtou/ e`xako,sioi e`xh,konta e[x”라고 말하면서 짐승의 숫자를 한번 세어보라“yhfisa,tw”라고 말하는데 주의해야 한다. 이 단어는 Theologoumena arithmeticae 64(V. De Falco [ed.], Leipzig 1922)에서 Luciano di Samosata가 말하는 Alexander 11,18에도 사용된다. “만약 글자[의 숫가]를 기준으로 [숫자] 일을 세어본다면(yhfi,shj).” 그러면서 그는 “1, 30, 5 그리고 60은 한 사람의 이름을 담는 원을 형성하는데 그는 모든 민족에게 선을 베풀 사람이다.”(A=1, L=30, E=5, X=60, 곧 Alex=Alexander를 지칭하는 숫자이다.) 게다가 폼페이에 있는 낙서 가운데 그리스 말로 “나는 숫자 545인 그녀를 사랑한다”라는 말에서도 묵시록의 666은 어떤 사람의 이름의 숫가를 뜻한다는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레네오가 지적하는 바처럼 이 숫자가 누구를 표현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찾기란 매우 어렵다. 이 단락에 나오는 여러 정보는 원전 자료를 구하지 못하여 Biguzzi, Apocalisse, p.265에서 재인용하였다.
 아니 이 숫자를 아무리 계산해 본다 하더라도 그가 누구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이름이 몇 자나 되는지도 알아 낼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다시금 이레네오의 방식으로 돌아가서 숫자가 지니는 상징성을 다루어 볼 수 밖에 없다. 사실 묵시록에 등장하는 숫자는 모두가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것 처럼 666이란 숫자 역시도 상징성을 띄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곧 묵시록의 전체 숫자의 상징체계를 잘 살펴 본다면 우리는 666이 지니는 의미를 밝혀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먼저 6이라는 숫자는 12의 절반이고 또 7에서 하나 모자라는 숫자다. 그러니까 12가 상징하는 계약을 파기하는 숫자요, 7이 상징하는 완전에서 모자라는 숫자다. 그러기에 6은 불길하고 부족한 숫자, 즉 흉수(凶數)이다. 이 흉수가 셋이나 모였으니 최악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어린양은 7이라는 숫자가 상징하는 것처럼 언제나 완전하게 행동을 한다. 그리고 12는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 반면에 짐승은 언제나 불완전하게, 나쁘게 행동하는데 7이라는 기간이 아니라 그 반인 3년 6개월 동안 전쟁을 하는 것처럼 그를 따르는 이들도 아주 불안한 상태에 놓인다. 곧 12라는 완전한 숫자의 반인 6이 바로 이들의 표식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제 이 6이 세 번에 걸쳐서 반복된다는 것은 엄청나게 불쌍하고 불안정한 숫자라는 것이다. 결국 짐승과 그를 따르는 이들은 어린 양과 그를 따르는 이들과 근본적으로 차이를 지닌다.
 
   1,000은 최고의 숫자를 나타내는데 신적인 차원에서나 그리스도의 활동에 있어 완전함을 가리킨다. 이 기간은 거룩하며, 그리스도의 현존과 활동이 있는 기간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이들은 천년동안 그분과 함께 군림하게 될 것이다(참조, 20,1-6). 이와는 반대로 연대기적으로 짧은 기간을 말하는 것도 있다: “잠시동안”(μικρὸν χρόνον, 6,11; 20,3) - 이것은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악의 잠정적인 세력의 기간을 말한다.
   묵시록에서 어떤 숫자는 대단히 과장되어있다. 이것은 상상한 것 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는 천사들의 숫자가 “수천수만”이라는 것이다(5,11). 또한 기병 군단의 수효가 “이 억”이나 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9,16).
   하지만 어떤 숫자들은 현실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 규정짓기가 어렵다. 2,10의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10이라는 숫자는 한정된 기간을 말한다. 5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참조, 9,5.10).
     이상과 같이 묵시록의 저자는 숫자와 숫자놀음을 통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당시의 독자들은 이를 쉽게 받아들이고 이해하였겠지만 시간이 흐르고 문화적, 사회적 환경이 뒤바뀐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상징적인 것이다.

2) 우주론적인 상징
  상징의 의미 변화는 특별히 우주의 무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하늘”, “별”, “바다” 등을 나타내는 용어들이 묵시록에서 이중적인(양면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구체적인(실제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것이 상징적인 의미로 바뀌는 것들을 구약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늘(οὐρανός)은 가끔 “창공”(천계)을 나타낸다(참조, 6,14; 16,21등). 각기 다른 문화적인 배경에서 오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상징적인 의미) 초월적인 하느님의 영역이다. 즉, 하느님이 머무르시는 곳이다. 이것이 묵시록에서 말하고자하는 독특한 측면이다(참조, 3,12; 4,1.2; 5,3.13; 8,1등).
  다른 예를 보자. ‘별’(ἀστήρ)도 ‘하늘’이 의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인 의미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별들은 창조 행위와 관련이 있는 하느님의 초월성의 상징이다. 묵시록에서 가끔 상징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 보다 두드러진다. 하지만 천재지변 같은 우주의 혼란(전복)을 나타내는 장면(참조, 6,13; 12,4)에서의 별은 상징적이라기보다 구체적인 의미에서 하늘의 별들이다. 하지만 ”별“이 교회의 천사들을 나타낼 때(1,20), ”하늘로부터 떨어진 별“(9,1)이 악마를 가리킬 때, 샛별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시는 장면에서(참조, 2,28), 자기 자신을 가리켜 ”아침의 빛나는 샛별“이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22,16)의 별들의 의미는 상징적인 것이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근본적인 새로운 의미는 땅 위에서 발견되는 천상적 요소의 의미변화이다. 문맥들은 궁극적으로 여러 특수한 것들을 다룬다: 천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구체적인 역사 안에서 교회를 말하고 있다. 또 교회 안에서 지금의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종말론적인 완성을 향한 절박감을 나타낸다. 혹은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로 초월적인 것이 떨어져서 땅에서 발견되는 전도된 상황을 다룬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번개와 천둥은 초월적인 것, 특별히 하느님의 음성을 나타낸다. 이런 상징들이 묵시록에서는 보다 발전되었다: 하느님의 어좌로부터 나오는 ”번개와 천둥소리“는 틀림없이 그분의 “목소리”를 가리킨다(참조, 4,5; 8,5; 11,19; 16,18). 항상 이런 차원에서 초월자의 소리가 인간적인 언어 안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천둥이다: 10,3에서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데,  그가 외치자 “일곱 천둥이 각각 그들의 소리로 (τὰς ἑαυτών φωνάς) 말하였다(ἐλάλησαν)”고 적고 있다.
  그 이외에도 “해”, “바다”, “구름”등과 같은 다른 우주적인 용어들에게까지 그 범위를 더 넓혀 연구를 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함을 알 수 있다: 의미의 변화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묵시록의 저자가 체험한 것처럼 이 우주 안에는 “새로움”을 향한 움직임, 그리고 지금 이 현실을 뛰어넘어 신적인 초월영역 안으로 밀어넣는 힘(추진력)이 있다는 것이다.

  3) 천재지변
  묵시록에서 우주의 천체의 변화는 상징적인 것이다. 특히 천재지변(천체의 전도)은 묵시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상징 중의 하나다. 비록 이것들이 일상용어로 씌어졌지만 가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사용된 몇몇 상징들을 보자.
  태양이 어두워졌고(ἐσκοτώθη: 9,2), “머리 털로 짠 자루 옷처럼 꺼멓게 되고”(6,12) 부분적으로나(태양의 삼분의 일) 전체적으로(참조, 16,8)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종말에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비출 태양이 필요없다(참조, 21,23). 달이 “온통 피같이 되며”(6,12), 역시 달도 부분적으로(ἐπλήγη τὸ τρίτον; 8,2) 타격을 받거나, 한 여인의 지배를 받으며(참조, 12,1) 태양도 마찬가지이다. 달도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필요가 없다(참조, 21,23). 하늘은 “두루마리가 말리듯이”(6,14) 사라져버리고(ἀπεχωρίσθη; 6,14), 새 하늘이 도래하면 이전의 하늘은 사라져 버린다(참조, 21,1). 별은 원래 “하늘에” 있고(6,13), 하늘이 그들이 머무는 장소이다. 하지만 별들도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한다: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그것들을 땅으로 내던진다(참조, 12,4); 그들도 역시 부분적으로(참조, 8,12: τὸ τρίτον........ἐπλήγη) 타격을 받고, “마치 무화과 나무가 거센 바람에 흔들려 설익은 열매들을 떨구는 것처럼”(6,13; 참조, 8,10) 땅으로 떨어진다.
  땅도 이 끔찍한 변화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해를 입을 것이며(참조, 7,2.3), 비록 부분적이긴 하지만(삼분의 일) 불에 탈 것이고(κατεκάη: 8,7), 온갖 재앙으로 타격을 받을 것이며(참조, 11,6) 하늘처럼 새 땅이 도래하면 사라질 것이다(참조, 21,1).
  이 우주적이고, 지상적 실체의 끔찍한 변화의 예는 묵시록에서 자주 나타난다: 나무들과 풀들은 불에 탔고(참조, 8,7), 산들과 섬들은 제자리에서 마구 옮겨졌으며(참조 6,14), 결국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참조, 16,20). 뿐만 아니라 물은 몹시 쓰게되고(참조, 8,11), 피로 변한다(참조, 8,8). 또한 지진(σεισμός)도 묵시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이외에도 여러 가지 변화들을 볼 수 있다: “불타는 큰 산”(8,8)이나 “불이 섞인 유리바다”(15,2)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묵시록 저자가 자기가 눈으로 본 것을 적고 있는 이 변화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 우주적 변화 앞에 몸부림치면서 인간들은 “재앙들을 다스리는 권능을 가지신” 하느님을 모독하는데(16,9; 참조, 16,21b) 여기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이 부정적인 문맥들이 가리키는 것은 자연의 주인은 인간들이 아니라 하느님이 절대적인 주인이시라는 확신이다.
  즉, 우주적인 변화가 나타내고자하는 것은 하느님의 특별하고 극적인 현존이다. 그리고 문맥 안에서 자주 사용되는 수동태들(ἐσκοτώθη, ἐπλήγη, ἀπεχωρίσθη, κατεκάη)은 ‘신학적인 수동태’(신적인 수동태)라고 하는데, 능동적으로 바꾸어 말하자면 하느님이 모든 일어나는 현상의 주관자이시라는 것이다.
  묵시록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주적인 변화는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인간들과 연관이 되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킨다. 이 역사의 현장 안에 하느님이 머물고 계시는 것이다.
  그런데 나팔의 장(참조, 8,7-12)에서 우주적 변화는 제한적이고 부분적이다. 상징적인 숫자이기는 하지만 삼분의 일이 말하는 것은 아직도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능동적인 현존과 변화가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상황은 분명히 전(前)종말론적인 상황이다. 마찬가지로 불타는 산(참조, 8,8)과 특별히 불이 섞인 바다(참조, 15,2)의 문맥에서 말하고 있는 부분적인 변화, 물과 불이 뒤섞인 현상들은 아직도 새로운 창조가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종말은 다가오고 있다. 묵시 16,1-16에서처럼 나팔소리에 맞추어 일어나는 보다 큰 우주적 변화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그 변화의 권능은 더욱 더 크게 나타난다: “하느님의 큰 날”(16,14)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대의 변화(해가 꺼멓게 되고, 달은 온통 피같이 되고, 별들은 땅에 떨어지는 것 등, 참조, 6,12-17과 16,1-21등)가 일어날 때 하느님의 현존과 그 변화의 권능은 극에 달한다: “큰 날이 닥쳐왔다”(6,17).
  모든 구절에서 발견되는 놀랍고 끔찍한 변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역사와 환경이 근본적(본질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영향아래 이 세상은 변화되어야하며, 변화할 것이고 이미 변하고 있다. 이런 것을 말하기 위해서 저자는 매번 우주적 변화의 상징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4) 상징적인 동물들
  묵시록을 보면 동물들을 나타내는 스무 개 정도의 단어들이 있는데 이것은 우주나 자연적인 현상이나 실체를 나타내는 것에 비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그 단어들을 보면 “동물들”(ζῷα 20번), “양”(ἀρνίον, 29번), “사자”(λέων, 6번), “독수리”(ἀετός, 3번),  “메뚜기”(ἀκρίδες, 2번), “용”(δράκων, 13번,  신약에서 나타나는 숫자 전부이다), “괴물” 혹은 “짐승”(θηρίον, 38번), “말”(ἵππος, 16번), “개구리”(βάτραχος, 1번), “전갈”(σκορπίος, 3번), “뱀”(ὄφις, 5번), “개”(κύων, 1번),  “새”(ὄρνεον, 3번)등이다. 신약성서의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많이, 넓게 쓰이지 않는다. 어떤 경우들을 보면 이런 동물들은 보다 본질적이고 구체적인 면을 갖고 있다: 땅의 주민들의 사분의 일을 삼키는 동물들(참조, 6,8), 피가 그들의 굴레(높이)까지 불어 오르는 말들(참조, 14,20), 마치 사자가 울부짖는 듯한 천사의 외치는 소리(참조, 10,3), 전갈들의 침(참조, 9,5)등이다. 그러나 이런 동물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 보다 자주 달리 나타나고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로 등장한다. 이런 동물들은 다양한 모습과 행동을 보이는데, 실제로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참조, 4,6b-8a), 영광을 드리는 역할도 하고(4,8b), 명령도 하고(참조, 6,1-7: ἔρχου: “오너라” 등등), 천사들에게 대접을 주기도 하고(참조, 15,7), 찬양노래도 부른다(참조, 19,5). 현실과는 거리가 먼 모습과 특성을 지닌 어린 양도 끊이지 않는 고통 중에서 다양한 행위를 하고 있다(참조, 5,6): 두루마리를 받고(참조, 5,7) 봉인들을 개봉하며(참조, 6,1이하), 분노하기도 하며(참조, 6,16), 생명의 샘물로 인도한다(참조, 7,17); 싸워서 이기고(참조, 6,16), 혼인잔치를 주관하고(참조, 19,7.9), 어좌를 가지고 있다(참조, 22,1.3). 사자는 승리하여 두루마리와 그 일곱 봉인을 떼고 펼 것이며(참조, 5,5), 메뚜기들도 특이한 모습을 갖추고 마치 전갈마냥 사람들을 괴롭히고(참조, 9,7), 독수리는 위협적이고 놀라울 정도로 큰 소리로 불행을 고지한다(참조, 8,13). 여기 저기서 볼 수 있는 현실적인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 색깔, 행위들도 주목할 만하다(참조, 6,1-8; 특히 9,16-19). 첫 번째, 두 번째 짐승인 용은 한편으로는 온갖 인간의 실체(모습)를 드러내면서 동시에 놀라운 일도 저지르고 있다: 용은 하늘의 별들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지며(참조, 12,4),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12,7); 첫 번째 짐승은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며(13,6), 모든 종족과 백성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13,7); 두 번째 짐승은 용과 같이 말을 하며(13,11), 첫 번째 짐승의 우상을 만들며 생명을 주기도 한다(13,14-15).
  이런 예들은 계속 나타난다:
  이런 것들로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가? 본질적으로 실제적인 차원과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불투명하나 인간들의 차원과 비교하여 어떤 우위적인 면을 내보이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동물들의 행위와 거기로부터 나타나는 명백한 현상들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 행위들의 주체인 동물들은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상징이고, 그들의 행위는 늘 놀라운 것이고,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이해하기가 불가능한 것들도 많다. 그들의 행위는 인간들과 그들의 역사를 짓누르지만 항상 하느님의 주도하에 놓여져 있다.
  인간 역사에 들어 온 하나의 힘을 나타내 보이는데, 이것은 긍정적이기도 하며 부정적이기도 하다. 이 힘은 종국에까지 그 세력을 펼칠 것이다. 그러나 천상 예루살렘에서는 모든 동물들이 사라진다: 그 도시 한가운데에 오직 어린양(ἀρνίον)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구원이 있을 것이다. 이 구원은 긍극적으로 당신의 부활로써 종말론적으로 보증해 주신 그리스도 덕분에 주어지는 것이다. 현대의 묵시록의 대가인 F. Kafka는 이 상징적인 동물들이 인간과 비교하여 더 우월하고 뛰어난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상징적인 동물들을 단지 드러난 가치 안에서만 보는, 즉 단순한 실체파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 동물들은 기능적인 면에서 볼 때 선한 면을 드러내기도 하고 악한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5) 인류학적 상징(인간적 상징)
  역사를 인간사로 나타내고자하는 묵시록 저자(의 민감한 센스)는 인간과 생명의 여러 가지 측면과(ζωή, 17번; ζάω, 13번) 그 표현 양상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사용된 어휘들로부터 어떤 특성을 가진 인간에 대한 표현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생명체(ψυχή, 7번)이고, 육을 지닌 인격체이며(σώμα, 참조, 18,13), 생명의 결정적인 요소인 피를 가지고 있으며(αἷμα, 19번),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고통받는 존재다(참조, 7,16). 하지만 저자는 인간을 결코 홀로 버려두지 않는다. 인간은 늘 他者를 주시하고 있다. 저자는 인간을 생각하기를 역사 안으로 끼여든 존재로 보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 상관관계에 대해서 말한다: 남자와 여자, 사랑, 결혼, 풍요, 출산 등이다. 특별히 저자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ἱμάτιον, 7번; στολή, 5번; περιβάλλω, 12번). 또는 서 있다든지, 앉아 있는 것과 같은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강조점을 둔다; 신체의 어느 특정한 부분, 예를 들면, 머리, 이마, 얼굴, 손, 발 등을 언급하기도 하고 더 세밀하게는 치아, 머리카락, 음성, 대퇴골등을 언급한다. 인간들의 마음을 즐겁게하는 금, 보석같은 것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또 인간은 기쁨에 넘쳐 날뛰거나, 고함을 지르거나 박수를 치거나 노래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나 분노하는 것에 대해서도 민감하다: 자주 열정(θυμός, 10번)이나 분노(ὀργή, 6번)에 대해서 말한다.
  역사 안에서 인간과 다른 이들과 더불어 산다. 저자는 인간들의 공동생활을 주장하며 이 생활을 나타내는 용어인 ‘절친함’이나 ‘우정’같은 말로써 전형적인 인간적 측면을 강조한다: 만찬이나 포도주에 대해서 언급한다. 인간들은 서로 서로 바라보며, 축하하고, 서신을 교환하고, 통교한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노동, 포도수확, 추수, 목축 등이 있다. 또한 사고 팔고 하는 상거래가 있고 이것에서 체계화된 시장구조가 형성된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풍성하고 귀중하고, 특별한 물건들을 제시한다(참조, 18,11-13.17).
  저자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인간들끼리 벌이는 긴장이나 폭력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말을 탄 사람이 소개되는가 하면(물론 스포츠가 아니다), 인간들끼리 서로 싸우고, 정복하거나 정복당하며, 상대방을 도구화하는가 하면,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고통과 억압받는 이들의 신음소리와 지쳐 쓰러짐과 통곡의 소리에 귀를 귀울인다.
  인간은 더불어 사는 존재다. 특별한 모양으로 어느 도시 안에 서로 살고 있다. 물론 한 도시 안에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공동체 안에는 계급, 질서, 조직이 있다: 왕이 있고 국가가 있으며, 그 공동체를 꾸려 나갈 조직체가 있다. 하지만 저자의 눈에는 이런 인간의 수평적인 위계 질서만으로 충분치 않다. 이미 구약에서도 드러난 것처럼 하느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만 한다: 여기에는 예배, 전례가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묵시록에서 볼 수 있는 커다란 인간적인 단면이다. 그 이외에도 더 구체적인 단면들이 있다: 예를 들면 “신랑과 신부의 음성”(18,23)이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인간의 구체적인 현실이다; 혹은 특정한 인간 기술을 나타내는 용어(참조, 18,22)도 있고, 노래도 있으며 인간 신체의 다양한 부분에 대한 언급도 있다: 머리, 눈, 얼굴, 가슴, 발들이 말하는 것은 인간의 구체적인 면모이다(참조, 1,14-16). 하지만 우리가 알다시피 묵시록에서는 이런 구체적인 것들이 다른 것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런 것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묵시록을 보면 옷에 대한 것들이 자주  등장한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 (ἐνδεδυμένον ποδήρη: 1,13), “가슴에 두른 금띠”는 모두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소위 묵시록적인 재림을 언급하는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입고 계시는 옷(ἱμάτιον)도 볼 수 있다(19,11-21): 피에 젖은 옷을 입으셨고,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불리는 것 등은 모두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임금들의 임금, 주님들의 주님”(19,16).
  한편 복수로 쓰인 “옷들”(ἱμάτια)은 사르디스의 그리스도 신자들에게나-“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3,4), 종말론적 전쟁의 승리자의 신비로운 행복에 적용된다; “복되어라, 깨어 있어 자기 옷을 간수하는 사람”.
  “흰색”에 대해서는 뒤에 나오는 상징적인 색깔에서 상세히 다루겠으나, 흰옷은 그리스도와 함께 악을 거슬러 싸워 이긴(참조, 3,5)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권고 된 것이기도 하다: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라”(3,18). 또 스물 네 명의 원로들이 걸쳐 입은 옷이기도 하다(4,4). 묵시록에서 옷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 στολή가 있다. 물론 이것은 ἱμάτιον과 동의어이다. στολή는 보통 “흰색”과 더불어 쓰인다: 하느님께 피의 앙갚음을 청했던 순교자들에게 “흰 예복”(στολή λευκή)이 주어졌다(6,11); 종말론적 구원의 대열에 참가한 모든 이들이 “흰 예복들”(στολὰς λευκάς)을 차려 입었다(7,9.13). 이 문맥에서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흰 예복을 입고 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긴 겉옷을 빨았고(ἔπλυναν) 또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하였다(ἐλεύκαναν)”(7,14)는 것이다.
  στολή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여기서는 흰색과는 관련이 없지만) 묵시록의 마지막 부분(전례적 대화 부분의 결론)에 있다: 여기서 “자기들의 긴 옷을 깨끗이 빠는 이들은 행복하다”(22,14)라고 되어있다.
  비록 ἱμάτιον이나 στολή라는 단어를 쓰지는 않았지만 묵시록에서 옷이나 의복에 관한 암시가 주어진 곳이 몇 군데 있다: περιβάλλω(입다, 두르다)라는 동사가 사용된 구절이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이 동사는 이미 ἱμάτιον(참조, 3,5.18;4,4)이나 στολή(참조, 7,9.13)와 더불어 쓰였다; 천사 하나가 “구름에 휩싸여 있었고”(10,1), 큰 탕녀는 “자주색과 진홍색 옷을 입고” 있다(17,4); 탕녀로 상징되는 도시 바빌론은 “고운 아마포 옷과 자주색 옷과 진홍색 옷을 입고” 있다(18,16); 어린양의 신부는 “빛나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는 특권을 받았다”(19,8). 그리고 나서 즉시 저자는 여기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고운 아마포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τὰ δικαιώματα)이다.” 11장에서 등장하는 두 증인도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자루 옷을 걸치고” 예언할 것이다(11,3).
  옷(의복)에 대한 이런 여러 예문을 두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이런 것들이 구체적인 사실들을 두고 한 말인가, 아니면 상징적인 것들인가? 성서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묵시록이 언급하는 옷(의복)은 상징적인 것이다: 결코 물질적인 의류나 옷이 아니다. 예를 들면 두 증인이 걸치고 있는 자루 옷은 자기가 처한 상황 안에서의 일종의 투쟁을 가리킨다(회개복). 탕녀가 입고 있는 자주 색과 진홍색 옷은 엄청난 사치와 소비를 나타낸다. 대사제가 입고 있는 옷은 신약성서의 대사제처럼 그리스도의 새로운 역할을 의미한다.
  순교자들에게 주어진 흰 예복, 원로들이 걸쳐 입은 흰 의복, 어린양의 피로 빨아 희게 된 옷 등은 분명히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옷이 아니다. 그렇다면 옷들이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옷이 말하는 것은 어떤 인물이 처한 상태와 관련이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는 대 사제이시요 교회 공동체 안에서 그렇게 인식되어진다. 24 원로들이 입고 있는 흰 의복은 “듣는 이들”(ἀκούοντες:1,3)의 공동체 안에서 그들이 해야 될 역할을 나타낸다.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입고 있는 흰 의복은 구원의 상태, 기쁨의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신부가 입는 흰옷도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옷을 빨고, 지키고 간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신자로서 윤리 계명을 지키고 새롭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묵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용어는 “여인”(γυνή)으로 무려 19번이나 사용된다. 여기에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 실제냐? 상징이냐? 19번 중에서 3번이 실제적이고 나머지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12,1-17에 나오는 여인(γυνή)을 보자, 저자에 따르면 이 여인은 사랑을 하기도 하고, 고통을 당하기도 하며, 자신을 내어줄 줄도 알고, 어머니가 되기도 한다. 구약에 보면 하느님의 백성의 이상적인 모상(여인, 어머니)이다. 그 백성은 역경과 사막에서의 어려움에 직면하고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이것으로써 저자는 투쟁의 역사 현장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종말론적 위업을 나타내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여인에 관해서는 앞에서 본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상징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즉 17,3-18의  “대탕녀”(ἡ πόρνη ἡ μεγάλη)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이란 사치와 방탕과 정욕으로 나타나고, 모성은 근본적으로 왜곡되어 있으며, 그녀는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ἡ μήτερ)”로 소개되고 있다(17,5b). 그녀는 주정뱅이로서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 있다”(17,6). 저자는 여인의 보다 의미심장한 인간학적인 가치를 선택해가지고 이것을 전도시킴으로써 바빌론의 부정적인 면을 잘 설명하고 있다. 바빌론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게 될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이것은 보다 긍정적인 용어로 지적되고 있는데 “사랑”에 대한 것들이다: 바빌론의 타락을 나타내는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는 그 도시의 극도로 지나친 사치와 낭비다. 그래서 그 도시 안에는 “신랑과 신부의 목소리도 다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18,23). 하지만 이런 평가들이 저자로 하여금 사랑의 용어를 쓰면서 보다 긍정적이고 드높은 사랑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게 한다. 즉 혼인 잔치인데, 어린양의 혼인 잔치이다: 과연 어린양의 혼인날이 다가왔고(19,7),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행복하다”(19,9)라고 외치고 있다. 어린양의 신부가 언급된다. 즉 “어린양의 아내가 될 신부”(τὴν νύμφην τὴν γυναίκα: 21,9)이다. 저자는 구약성서로부터 출발하여 인류 공동체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신랑과 신부의 사랑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회 안의 사랑으로 과감히 적용시킨다. 하지만 이 사랑은 궁극적으로 종말에 가서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종국적인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참조, 22,17) νύμφη임을 자각하고 있다.
  종말론적인 인간은 결코 홀로 서 있지 않고 타인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도시다. “고을-도시”(πόλις)라는 용어도 묵시록의 저자가 자주 쓰고 있는데 무려 27번이나 등장한다. 저자는 πόλις를 구체적인 의미로 사용하는데, 예를 들면 “모든 민족들의 고을이 무너졌다”(16,19)라든지 “도성 밖”(14,20)의 포도주 확을 언급하는 경우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도성을 짓밟는 것”(11,2)에 대해 말할 때는 지리학상 정확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큰 탕녀는 “큰 도성”(17,18)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심중한 의미로 나타내지기도 한다. “거룩한 도성”, “주님도 십자가에 못박히셨던”(11,8b) 도시 예루살렘은 이집트, 소돔, 로마라고 불린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던 도시, 예루살렘의 부정적인 면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리학상으로 서로 일치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죄악의 상징인 대탕녀라고 불리는 바빌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이외에도 묵시록의 저자는 구약에서 많은 전례적인 용어와 요소를 빌려와서 사용하며, 때로는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기타 신체적인 요소, 행동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서 있는 어린 양”은 비록 그들이 죽였지만 부활하신(서 있다)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어좌에 앉아 있다”는 것은 왕이 명령함을 상징한다.

6) 상징적인 색깔
  묵시록의 저자는 색깔에 대한 그의 (특별한) 감성을 잘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색깔에 대해서 살펴보면, 흰색(λευκός, 15번), 검은색(μέλας 2번), 붉은색(πυρρός, 2번), 불빛색(πύρινος, 1번, 9,17-성경은 붉은색으로 번역), 진홍색(κόκκινος, 4번)  . 200주년 번역에는 묵시 17,3.4는 붉은 색으로, 18,12.16은 진홍색으로 번역했다. 성경은 모두 진홍색으로 번역함.
, 푸른색(χλωρός, 3번)등이다. 나머지 두 색깔은 특별한데 정확하게 규명하기가 어렵다: 보라색=히아신스색(ὑακίνθινος, 1번, 9,17-성경은 파란색)과 유황색(θειώδης, 1번, 9,17-성경은 노란색)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묵시록의 저자가 단지 美學的인 의미로 이 색깔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어떤 상징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푸른색은 풀의 자연적인 색깔이나(참조, 8,7), 푸성귀나 나무 같은 것들의 일반적인 색이다(참조, 9,4). 뿐만 아니라 봉인의 장에서는 네 번째 등장한 말의 고유한 색이기도 하다(참조, 6,8).
  사실 이전에는 말의 색깔을 나타내는데 이 색을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다른 경우에서는 χλωρός가 가진 색, 즉 푸른색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으로써 어떤 특별한 속성을 드러내려고 하고 있다. 즉 풀 같은 것의 푸르름을 나타내는 것이면서, 죽음 이전에 등장하는 색깔이기도하다(참조, 6,8b). 이것은 분명히 파멸(caducità)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풀이요 그 영화는 들의 꽃과 같다”(이사 40,6). 더욱이 붉은색, πυρρός는 더 많은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색으로써 역동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다: 6,4의 두 번째 말과 12,3의 용의 단락에서 그 특질이 드러난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잔인함과, 비록 저자가 “피”(αἷμα)라는 말을 19번이나 사용하면서도 그 색깔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피 흘림”이다.
  “검은색” μέλας가 의미하는 것은 분명히 부정적인 것들이다: 마치 “털로 짠 자루 옷처럼 검게 되고”(6,12) 해는 우주의 전복의 장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 나타난 말도 검은색이었는데(6,5) 그 말을 탄자는 이 세상에서의 불의에 대하여 벌을 내릴 것이다.
  불빛색(붉은색-πύρινος), 보라색(파란색-ὑακίνθινος), 유황색(노란색-θειώδης) 등의 세 색깔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색깔들이 나타내는 것은 초월적인 힘이나 악의 세력이 가진 약탈적인 힘을 나타내는데 문맥에서 더 세밀하게 드러날 것이다.
  무엇보다도 자주 등장하고 중요한 것은 “흰색”(λευκός)이다. 사용된 횟수가 제일 많다는 것이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 저자는 다니 7,9에서 암시를 받아 그리스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었다”고 한다(1,14).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즉 ‘달이 희다’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이다. 눈(雪)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니엘서에서 “태고적부터 계신 이”의 옷과 머리털이 희다는 것은 분명히 상징적인 것인데 일반적으로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묵시 1,14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할 때 바로 이 표현을 쓴다. 이렇게 볼 때 “흰색”은 초월적이고 신적인 차원, 즉 하느님의 색이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색이다. 이와 비슷한 것을 복음서에서도 볼 수 있다: 거룩하신 변모 장면에서 예수의 옷은 하얗게 빛났고 부활장면에서 휜색이 자주 등장한다(참조, 마태 28,3; 마르 16,5; 요한 20,12). 특히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λευκός의 자주 쓰임은 지금 수신교회에게 1인칭으로 말씀하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흰옷을 입고 그 분과 함께 다닐 것이며’(μετ’ἐμού, 3,4) “승리하는 사람은 이처럼(οὕτως, 3,5) 흰옷을 입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미 앞에서 언급한 “흰옷”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는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흰색”은 바로 그 분의 색깔이다. 여기에서 묵시록에서 어떤 용어가 얼마나 자주 쓰였느냐에 따라 그것이 뜻하는 풍부함과 다양함을 알 수 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초월하심을 나타낸다. “흰 돌”은 부활의 기저를 이루는 것인데 그 돌 위에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된 새로운 존재를 뜻한다(2,17). 원로들(4,4), 순교자들(6,11), 구원된 무리들(7,9.13)은 비록 다시 살아난 그들의 육체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더라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상태 안에 들어가 있다. “흰말”(6,2; 19,11)은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메시아적인 능력을 말하는데 인간의 역사 안에서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희고 깨끗한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서 흰말을 탄” 하늘의 군대는(19,14)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참여하는 무리들이다. 인자가 타고 내려오시는 “흰 구름”은(14,14) 아직도 완성을 행해서 나아가는 이 땅과 인간과 대조되는, 이미 몸소 살아나신 그리스도의 고유한 초월성을 말하는 것이다.
  “흰 어좌”(20,11)는 살아나신 그리스도가 심판관으로서 나타나실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흰색뿐만 아니라 다른 색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면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어떤 색이 상징성을 나타낸다고 해도 그것이 나타내려는 새로운 의미는 항상 색깔이라는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7) 짐승, 바빌론은 과연 누구를 지칭하는 말인가?
   묵시록 전체의 내용을 보면 바로 짐승, 대탕녀 바빌론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대한 하나의 공격으로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바빌론이 누구인지, 짐승이 누구인지를 해석하는 것은 묵시록 전체를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할 수 있겠다. 이 때문에
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로마의 정치적 상황이나 왕들을 나타내는 것으로(참조, 17,9-14) 결코 그 이름이 거명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상황이나 왕들을 가리키는 상징들이다. 하지만 πόλις의 대부분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며, 근본적으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루살렘은 “새로운” 도성이며, “하느님으로부터(나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있다”(21,2); 그 도시는 즉시 상징적으로 나타나는데 “어린 양의 아내가 될 신부”(21,9)로 등장한다.

 5. 왜 묵시록의 저자는 상징(환시, 신비)을 사용하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다.
① 신비적인 것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고,
② 상징적인 언어는 차라리 모든 이에게 통한다. 상징은 범우주적인 언어다. 이 시대와 이 환경에서 통용되는 언어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 사실 하느님과 같이 우리들의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분은 차라리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낫다.
③ 상징적인 언어는 정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면 지금 우리의 언어와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서려면 우리 자신을 정화할 수 있는 다른 언어를 배워야 한다.
④ 신자들을 위로하고 싸울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하여.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은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 대사제, 심판주, 역사의 주인으로서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 등의 표현을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묵시록에는 그분을 여러 가지 상징적인 것을 사용하여, 환시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1,12-18). 일반적인 말에서는 예수께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시지 않으시지만, 환시에서는 살아 움직이신다. 일반적인 말은 하나의 사실을 묘사하고 있지만, 환시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일반적인 말은 이해를 낳지만, 환시는 힘과 용기를 갖게 한다. 우리는 일반적인 말로 진리를 말하지만, 요한은 환시로 예수의 기쁜 소식을 전한다.  . 카롤로스 메스테르스, p.35.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묵시록에 드러난 여러 가지 파격적인 구조나 파격적인 문법들, 여러 상징들은 나름대로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다분히 의도적으로 이것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말은 곧 묵시록의 언어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괜히 다른 자료들을 찾아서 다니기 보다 묵시록 안에 담겨있는 것들을 찾아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곧 묵시록 속에 있는 여러 병행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우리는 묵시록 속에 담긴 여러 가지 저자의 의도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6. 묵시록의 구조

    19세기 역사비평방법론은 묵시록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쪼개어서 연구하곤 했다. 왜냐하면 서로 아무런 연결성도 없이 여러 가지 자료들을 그냥 짜 집어 놓은 듯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20세기에 들어서도 여전히 주창되기도 하는데 Charles는 묵시록이 온전치 못한 책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어느 어리석은 제자가 각 장과 절들의 위치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묵시록이 너무나 읽기 어려워 졌다고 이야기 한다. Boismard는 예루살렘 성서의 주석부분에서 ‘중복구절’을 찾아내는데 아마도 저자가 두 개의 묵시록을 적은 뒤에 그것을 하나로 묵었으리라고 추측한다. 곧 같은 저자의 두 가지 원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Prigent는 묵시록의 저자가 먼저 네 개의 장(4,1-8,1)을 적은 뒤에 다시 첫 삼장(1장-3장)을 덭 붙이고 나머지 뒷 부분을 덭 붙였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역시도 같은 저자가 이 모든 것을 적었다고 이야기 한다. Aune는 같은 저자가 이미 존재하던 자료들을 모아서 하나로 묶었다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최근 들어 묵시록은 하나의 저자가 한 번에 적은 책으로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더욱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물론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묵시록이 단순히 짜깁기 된 책이 아니라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하나의 온전한 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구조에 관해 여러 가지 주장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 주장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묵시록에는 어떤 순서나 질서도 없다(Prigent). 그는 왜 굳이 묵시록의 구조를 찾으려 하는지 질문을 재기한다. 곧 묵시록에는 어떤 조직적인 구조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각 부분에 제목만을 달고 주석을 한 뒤 다음 단락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묵시록을 연구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너무나도 무책임한 듯 보인다. 조금 더 면밀히 묵시록을 살펴 본다면 우리는 묵시록의 저자가 묵시록을 적으면서 어떤 조직적인 구조를 담아 놓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점에 대해서는 다시금 뒤에 살펴 보도록 할 것이다.
   2) 묵시록은 교차대구구조(Chiasmus)로 이루어져 있다. 곧 7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묵시록 마지막에 나오는 예루살렘이 대구를 이루고 한 가운데 12,13,14장이 배열되며... 교차대구구조나 중앙집중구조(Centric Structure)에서는 대개 가운데 부분이 중요한 부분이 되는데, 사실 묵시록의 중간 부분은 그리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또한 이런 교차대구구조는 대개 짧은 길이의 글에서 사용되는 것이지, 책 전체의 구조를 담고 있다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왜냐하면 어떤 책 저자도 중요한 장면을 가운데 배치한 뒤에 점점 그 내용을 식혀가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묵시록은 나름의 점층적인 구조로 되어 있으며 처음에 시작해서 서서히 발전, 전개한 뒤 마지막 휘날레로 마친다(H. Vanni, G. Biguzzi). 우리는 여기서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하지만 학자들 마다 묵시록의 구조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다. 여기에서는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살펴 보겠다.  . R. 파브리스 外, 신약성서 중급, 4, pp.186-188 참조.


R. 파브리스

I.  1,1-8 : 서언
     1) 1,1-3 책의 머리말
     2) 1,4-8 인사

II. 1,9-20 : 인자에 관한 현시

III. 2,1-3,22 :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1) 2,1-7 :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
     2) 2,8-11 :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
     3) 2,12-17 : 페르가몬 교회에 보내는 편지
     4) 2,18-29 : 티아티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
     5) 3,1-6 :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
     6) 3,7-13 :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7) 3,14-22 :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

IV. 4,1-22,5 : 미래에 일어날 일들 (현세의 종말과 내세의 도래)
     1) 4,1-5,14 : 묵시록 현시들을 미리 보여주는 현시(어좌에 앉으신 분, 어린 양의 전례)
        ***여섯 묶음의 현시들***
    
     2) 여섯 가지 상징의 첫째 묶음 : 봉인들
       (1) 6,1-2 :   흰 말과 첫째 봉인
       (2) 6,3-4 :   붉은 말과 둘째 봉인
       (3) 6,5-6 :   검은 말과 셋째 봉인
       (4) 6,7-8 :   푸르스름한 말과 넷째 봉인
       (5) 6,9-11 :  흰 두루마기를 입은 순교자들과 다섯째 봉인
       (6) 6,12-17 : 세계의 붕괴와 여섯째 봉인
       (7) 7,1-17 : 구원의 현시: 인장이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찍혀지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들과                     합류하다.

      3) 여섯 가지 상징의 둘째 묶음 : 일곱째 봉인  . 처음에 일곱 개의 봉인이 나타나고 여섯 개가 떼어지면서 징벌을 집행하는 최초의 인물들이 출현한다. 그렇지만 일곱째 봉인이 떼어지면서 새로 일곱 가지 재앙의 묶음이 등장한다. 일곱 개의 나팔을 든 일곱 천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과 여섯 나팔을 가진 천사
       (1) 8,1-6 :    일곱째 봉인과 일곱 천사의 등장
       (2) 8,7 :      땅에 쏟아진 불덩어리; 첫째 천사
       (3) 8,8-9 :    바다 속의 피; 둘째 천사
       (4) 8,10-11 :  물에 떨어진 쑥; 셋째 천사
       (5) 8,12-13 :  천체가 어두워짐; 넷째 천사
       (6) 9,1-12 :   메뚜기들; 다섯째 천사. 첫 번째 저주
       (7) 9,13-21 :  기마병들; 여섯째 천사
       (8) 10,1-11,14: 예루살렘의 종말에 관한 현시. 두 번째 저주
     
4) 여섯 가지 상징의 셋째 묶음
       (1) 11,15-19;  서론 : 일곱째 천사가 일곱째 나팔을 불다  . 일곱 번째 천사가 일곱 번째 나팔을 불면서 다시 여섯 가지 환시가 시작된다. 그 마지막 환시는 또 다시 일곱 천사를 등장시킨다.

       (2) 12,1-2 :   잉태한 여인
       (3) 12,3-18 :  용이 여인과 싸우다
       (4) 13,1-10 :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5) 13,11-18 : 땅에서 올라온 짐승
       (6) 14,1-5 :   어린양과 속량된 자들
       (7) 14,6-20 :  일곱 천사들과 낫

      5) 여섯 가지 상징의 넷째 묶음  . 넷째 묶음의 영상들은 또 한 번 일곱 재난을 손에 들고서 일곱 천사가 무대에 나타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다음부터는 이런 도식이 자취를 감춘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 구성이 무척 뚜렷하였다: 하느님의 징벌을 집행하는 일곱 천사들이 등장하고 그들 중의 마지막 인물은 또 다시 일곱 천사와 재앙이 출현하는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1) 15,1-8 :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대접에 들고 나타나다
       (2) 16,1-2 :   독한 종기. 첫째 대접
       (3) 16,3 :     바다가 피로 변함. 둘째 대접
       (4) 16,4-7 :   물이 피로 변함. 셋째 대접
       (5) 16,8-9 :   불같은 태양. 넷째 대접
       (6) 16,10-11 : 짐승의 권좌에 쏟아진 징벌. 다섯째 대접
       (7) 16,12-16 : 유프라테스강의 전쟁. 여섯째 대접
       (8) 16,17-21 : 바빌론에 쏟아진 징벌. 일곱째 대접

      6) 여섯 가지 상징의 다섯째 묶음
       (1) 17,1-6 :   탕녀 바빌론
       (2) 17,7-18 :  현시에 대한 해설
       (3) 18,1-8 :   바빌론의 멸망
       (4) 18,9-20 :  바빌론의 통곡
       (5) 18,21-24 : 바빌론의 종말
       (6) 19,1-10 :  찬미가와 어린양의 혼인 잔치

      7) 여섯 가지 상징의 여섯째 묶음
       (1) 19,11-16 : 흰말을 타신 분
       (2) 19,17-18 : 잔치
       (3) 19,19-21 : 두 짐승의 체포
       (4) 20,1-3   : 깊은 구렁의 천사
       (5) 20,11-15 : 심판
       (6) 21,1-22,5 : 구원의 현시 :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V. 22,6-21 : 결어; 그리스도의 내림

G. Biguzzi

     1,1-3 제목과 도입축복
     1,4-8 서간 도입

I. 첫 번째 부분 : 그리스도와 아시아의 교회
     1,9-20 주님의 날에 일어난 그리스도 현시
     2,1-3,22 :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첫번째 일곱 묵음)

II. 두 번째 부분 :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하느님의 계획과 업적
     a.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계시 단락
     4,1-5,14 : 시작 현시 : 옥좌, 두루마리, 어린양
    6,1-8,1 : 어린양이 두리마리의 봉인을 풀다(두 번째 일곱 묶음)

   b. 두 우상에 대한 치료적 개입 단락  
   8,2-11,19 : 전통적인 우상에 대한 재앙들 (세 번째 일곱 묶음)
   [10장 : 백성들과 왕에게 예언하도록 임무를 받은 요한]
   [11장 : 예언하다가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는 두 증인들]
   12,1-13,18 : 용, 두 짐승들과 짐승의 우상
   14,1-16,21 : 짐승의 우상에 대한 재앙들 (네 번째 일곱 묶음)

   c. 하느님의 심판적-종말론적 개입 단락
   17,1-21,8 : 바빌론, 두 짐승, 용, 죽음에 대한 심판
   21,9-22,5 : 새창조와 새 예루살렘

   22,6-21 : 서간의 맺음부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곧 두 가지 의견 모두 중요한 본문을 두 부분(1-3; 4-22)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요한묵시록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3장과 4장 사이에 단절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3장은 파트모스, 7교회, 곧 지상세계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4장에서 요한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느님이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는 공간을 보게 되고 이제 천상세계를 그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1-3장은 지상의 7교회를 다루지만 4장부터 교회는 하나요 거룩한 보편교회를 나타내며 더 이상 지상의 7교회를 표시하지 않는다. 또한 1-3장은 그리스도가 나타나 요한에게 받아쓰라고 한 것인 반면에 4장부터는 요한이 본 것을 적은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요한 묵시록을 명확하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문제는 6이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요한 묵시록을 묶을 것인지 7이라는 숫자로 요한 묵시록을 묶을 것인지의 차이이다. 여기서 우리는 7이라는 숫자를 중심으로 요한 묵시록을 묶는 G. Biguzzi의 구조를 따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요한 묵시록 자체가 7이라는 숫자를 아주 좋아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신약성서에 7이란 수는 총 88번 나오는데 55번이 이곳 묵시록에서 사용되고 있고 또 ‘7번째’라는 단어 역시 7번 가운데 5번이 이곳 묵시록에 등장한다. 요한 묵시록 역시 바로 이 7이란 숫자를 중심으로 네 번에 걸친 일곱묶음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Gioachino da Fiore는 이 일곱묶음을 settenario라고 부른다. 곧 ‘7가지로 구성된 한 묶음, 구조’라는 말이다 : 예수는 7번에 걸쳐 같은 행동을 한다(7교회에 메시지를 보내다). 그리고 어린양은 7봉인이 된 두루마리를 들고 하나씩 하나씩 그 봉인을 연다. 또한 7천사가 나팔을 부르며 재앙을 내린다. 게다가 7잔까지. 실제로 신약성경에 이런 일곱묶음들은 많이 나타나는데(요한복음이 대표적) 그 가운데 2/3가 이곳 묵시록에 등장한다. 어찌보면 1-3장에 등장하는 일곱묶음은 요한 묵시록 전체의 구조를 이해하는데 좋은 힌트가 된다.
     Biguzzi는 묵시록이 네 가지 일곱묶음을 토대로 구성되었다고 가정하는데 1-3장은 묵시록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곧 1장은 환시(vision)를 다루며 이 환시는 2-3장의 일곱묶음의 메시지를 준비해 주는 환시이다. 이 구조를 따라 나머지 4-22장의 구조가 형성되어 있다. 곧 두 번째 부분의 첫 단락은 옥좌(=하느님),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현시가 있은 뒤(4,1-5,14) 다시금 어린양이 봉인을 푸는 일곱 묶음의 두루마리와 어린양의 계시가 나타난다(6,1-8,1). 여기서 어린양인 그리스도는 두루마리를 풀어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신비, 곧 인간이 겪는 고난과 짐의 의미를 드러내 줄 수 있는 유일한 이로 소개되고 있다. 두 번째 단락은 다소 다른 형식을 띈다. 먼저 일곱 번의 나팔소리를 울리는 일곱 묶음이(8,2-11,19) 그것을 준비해주는 환시 없이 등장한다. 일곱 번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일곱 번의 재앙이 닥치는데 이것은 마치 이집트에서 일어난 재앙과 같다. 곧 묵시록은 신약성경의 탈출기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재앙은 무엇을 파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우상숭배를 하는 이들을 향해 주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이집트의 재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우상숭배는 매우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우상숭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특정한 대상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나서 여인과 용, 용을 도와주기 위해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의 환시가 있고(12,1-13,18) 이어서 일곱 잔을 붇는 일곱묶음이 등장한다(14,1-16,21). 여기에서 다시금 우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는 전통적인 우상숭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우상숭배, 곧 바다에서 올라온 그 짐승을 숭배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일곱 잔을 부으면서 주어지는 재앙은 바다에서 올라온 이 짐승을 숭배하는 이들을 향해 주어진다. ‘두 우상, 곧 전통적인 우상숭배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 대한 우상숭배’에 관한 치료적인 개입이라는 이 두 번째 부분을 이해하는 것은 묵시록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곧 하느님은 새로운 출애굽의 재앙을 통해 전통적인 방식의 우상숭배를 하는 이들을 회개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또 다른 우상, 곧 짐승을 숭배하는 우상숭배가 태어나는데 하느님은 이들 역시 회개시키고자 한다(16.9).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는다. 이 짐승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알기 어렵기 때문에 이 두 번째 단락을 이해하기를 그리 쉽지만은 않다. 어쨌든 하느님은 전통적인 우상숭배와 특정한 우상숭배를 하는 이들을 회개시키려고 시도하였으나 무위에 그친다. 그러나 하느님은 악과 결코 공존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심판적인 개입이 주어진다. 첫 번째 심판은 매우 부정적이지만(17,1-21,8) 두 번째 심판은 매우 긍정적이다(21,9-22,5). 마치 악을 싫어하고 선을 사랑하라는 가르침과 같다. 여기서 부정적인 심판의 대상은 그 짐승의 왕국 수도인 바빌론이다(여기서 바빌론이 누구인지 역시 묵시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이 바빌론은 불에 타서 사라지고 그것에 관심을 가지던 이들은 희망을 잃게 된다. 이어서 흰 말을 탄 기사, 곧 예수에 의해 두 짐승에 대한 심판이 주어진다. 그리고 용에 대한 심판과 죽음과 죽음의 왕국인 지옥에 대한 심판이 주어진다. 곧 보편적인 심판이 주어진다. 이어서 주어지는 긍정적인 심판은 새 창조이다. 새롭고 거룩한 예루살렘의 탄생이다. 이렇게 묵시록은 재앙으로 끝나지 않고 긍정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축복이 등장한다. 곧 이 예언의 말씀을 듣고 그 적인 것을 마음에 새기는 이는 복될 것이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묵시록은 축복의 책이다. 곧 회개를 위해 재앙을 내리는 이야기를 적은 책이지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책은 아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묵시록은 여러 자료들을 아무런 순서없이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나름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 관점에서 앞으로의 본문을 해설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본문해설

I. 서언(1,1-8)
  서언은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책의 머리말(1,1-3)과 인사(1,4-8) 부분이다.

1. 책의 머리말(1,1-3)
  1-3절은 머리말(혹은 서론)이면서 이 책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21장 6.7.10.16절에서 다시 나타나 결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히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곧 일어날 일을 계시해 주셨다고 한다. 유대 묵시문학의 저자들처럼 이 저자도 자기가 예언한 모든 일들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반드시 이루어지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1절
  많은 학자들이 이 책의 제목부터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의 제목이 ”요한(의) 묵시록“(ἀπο-κάλυψις Ἰωαννού)인데 실제로 묵시는 ’요한의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내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 Ἰησού Χριςτού)라는 표현 속에는 두 가지 의미의 소유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소유격이 주어적 의미냐, 목적어적 의미냐 하는 것이다. 소유격을 주어적 의미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하신 것들”이라는 뜻이다. 그와는 달리 소유격을 목적의 의미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가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소유격이 과연 어떤 의미로 쓰였느냐를 두고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으나 일반적으로 주어적 의미로 쓰였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시이다. 따라서 그것은 예수를 나타내는 계시가 아니다. H.Kraft, 요한 묵시록, p.34 참조; 안병철, 요한 묵시록 I, pp.43-44에서는 이 소유격이 목적의 의미로 쓰였다고 본다.

”당신 종들에게“(τοὶς δούλοις αὐτού)
  ”그의 종들에게“. 구약에서 ‘종’이라는 말은 예언자를 가리킨다. 특별히 아모 3,7에서는 ”하느님의 종“과 ”예언자“를 동의어로 쓰고 있다. 이사 42,1에서 “하느님의 종”은 메시아적 의미로 사용된다. 묵시록에서는 이 표현이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기도 하지만, 무려 14번씩이나 예수 그리스도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가리킨다(2,20; 7,3).. 하느님의 종이라는 명칭은 세례받은 공동체 지체를 가리킬 수 도 있었으나 또한 카리스마적인 예언자의 직책을 소유한 자에 한정될 수도 있었다. 여기서는 이 책의 목적과 일치하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종으로 이해되었다. H.Kraft, p.35.

  하느님의 계시는 천사를 통하여 요한에게 알려진다. 이것은 하느님이 당신 종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려는 것이다. 물론 첫머리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διὰ τού ἀγγέλου αὐτού)에서 천사를 보내신 분을 그리스도로 해석할 수 있고(22,16 참조) 하느님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22,6 참조) 200주년 번역에서는 하느님으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1절에 나타난 계시의 유래를 보면 하느님→예수 그리스도→천사→저자 요한→독자들(우리)의 순서로 되어 있다. ’요한‘이라는 필자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뿐만 아니라 나머지 부분 속에서도 계시를 전달해 주는 사람으로 소개된다. 그는 그가 보는 것을 “기록하여 보내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1,11.19; 14,13; 19,9). 저자 문제에서도 다루었지만 이 요한은 제3세대 유대계 그리스도인으로서 소아시아 지방의 교회들 사이에서 카리스마적 예언자로 존경받던 인물인 것 같다.. 200주년 번역, 주 ㉡.

  이 절 자체는 다니 2,28-29.45과 많은 관련을 갖고 있으며, 또 이 절에서 전제되어 있는 것은 마지막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그에 앞서서 예언자들에게 이 사건을 예언해 주시리라는 아모 3,7.8과 관련이 있다.

2절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와 비슷한 표현이 1,9; 6,9; 12,17; 20,4에서도 나타난다. 묵시록에서 사용되는 ‘증언’(μαρτυρία)이나 ‘증언하다’(μαρτυρέω)라는 말이 “항시 순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안병철, p.50)고 주장되기도 하나 본래는 순교적인 의미를 갖지 않고 예언적인 선포의 뜻을 가졌다. 물론 교회의 후기 시대에 “증언”과 “수난‘이 직접 결합되기도 했다.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이란 “자기가 본 모든 것”인데 저자는 이것을 증언하였다. 과연 저자가 “본 모든 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증언된 하느님의 말씀이다. “묵시록의 전언의 핵심은 예수께서 진리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당하고 죽으셨다는 선포에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살아 계신다. 예수께서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사실 자체가 당신 증거다. 이 증거는 모든 그리스도 신자 공동체를 위한 빛과 길로서 영원히 존재한다. 이 증거야말로 하느님께서 공동체들이 특히 박해를 당하는 시기에 생명을 얻고 활력을 갖기 위하여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전언이다.”. 프레이 길베르토 S. 고르굴로 外 지음, 두려워하지 말라, 가톨릭출판사, 1995. p.16.

  묵시록의 첫째 두 절은 요한 일서의 서언(1,1-2)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요한 일서의 ‘그들이 본 것’은 묵시록의 “자기가 본 모든 것”과 일치한다. 또 묵시록에 있는 “하느님의 말씀”은 요한 일서의 “생명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보인, 즉 그리스도에 의해 확증된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요한 일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영원한 생명”과 일치한다. 하지만 여기서 두 책의 저자의 동일성을 보자는 것은 아니다.

3절
  μακάριος로 시작되는 축복의 말씀은 희랍어와 성서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화법이다. 구약성서에서 축복이란 거의 언제나 구원이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것이다. 지혜문학, 특히 시편에서도 이런 사상을 볼 수 있다(1편).
  신약성서에서 축복이란 먼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신약성서의 축복의 말씀의 가장 큰 부분은 복음서 안에 있으며(마태 5,1-12) 예수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묵시록에서는 1,3에서 처음으로 언급되지만 이와 동일한 표현이 묵시록 안에서 7번이나 언급된다(14,13; 16,15; 19,9; 20,6; 22,7; 22,14). 이 묵시록의 일곱 가지 행복선언은 마태 5,1-12에 있는 여덟 가지 행복선언과 비교할 수 있다.
  이 축복의 말씀이 일곱 개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과 완전성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다. 그러니까 행복의 완전함을 말하는 것이다. 마지막 편집자는 이 수를 일곱으로 하기 위하여 첫 번째 것과 마지막 두 개를 첨가시켰다.. H.Kraft, 요한 묵시록, 한국신학연구소, 1983, p.39.
 이것들은 루가 11,28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는 축복의 말씀의 영향을 받고 첨가된 것 같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이사 56장 1-2절이다: “행복하여라, 이를 실천하는 사람, 이를 준수하는 인간,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는 이,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이”.

  요한 묵시록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을 행복의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때(καιρός)가 가까웠기 때문이다. ”하느님 나라의 때는 이미 이 자리에 그리고 우리 안에 현존하고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고통스러운 역사의 시간(χρονός) 속에서 드러난다. 요한 묵시록은 고통스러운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라고 촉구하면서, 그런 삶이 행복과 위안을 가져다주게 될 것이라고 언명한다.“. 안병철, p.55.


2. 인사(1,4-8)
  이 부분은 전례적 대화의 내용을 담고 있다. 묵시 22,6-21과 문학적으로 비슷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전례 집전자 저자 요한과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들과의 전례적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단락의 문학유형에 대해서 많은 의견이 있다: U.Vanni는 전례적인 대화로 보고 있다. 같은 양식이 묵시록 맨 마지막에도 나온다(22,20-21). 하지만 M.Karrer는 Vanni의 주장에 반박한다. 전례양식이 아니라 편지양식이라는 것이다. 바울로가 아카이아 지방에 있는 코린토 교회에 편지를 썼듯이 묵시록 저자도 7 교회에 편지를 썼다. 그래서 여기도 편지양식을 띤 계시가 펼쳐진다.
:
  먼저 하느님과 성령과 그리스도로부터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간구한다(1,4-5a). 이어서 공동체로부터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하고 찬미하는 응답이 있다(1,5b-6). 집전자의 말씀의 선포가 이어지고(7ab) 거기에 대해 공동체는 아멘으로 화답한다(7c). 끝으로 집전자는 하느님을 장엄하게 선포한다(8).

4-5a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쓴다고 했다. 로마 제국에 직속된 소아시아 서편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다. 이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까닭은 다만 거기에 일곱 교회만 있었기 때문은 분명히 아니다. 또한 그가 편지를 쓴 이 일곱 교회가 그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도 아니다. 일곱 교회로 제한한 이유는 분명히 묵시록에서 일곱이라는 수가 완성을 나타내는 수이기 때문에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보편성을 띠고 있으며, 전체 교회를 향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틀림없이 이 일곱 교회는 전 세계의 모든 세대에 걸친 대표적인 교회를 말한다.
  저자는 이 단락에서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인사하고 전언을 보낸다.

① 하느님의 이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으로부터”(ἀπὸ ὁ ὤν καὶ ὁ ἦν καὶ ὁ ἐρχόμενος)
  8절에 다시 한 번 언급된다. 탈출 3,14 “나는 있는 나다” (ἐγω εἰμι ὁ ὤν=YHWH)라는 이름을 신학적으로 의미를 확대시킨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에 계시는 분으로 우리 역사를 주관하시고 또 역사에 임하실 분이다.

② 성령 : 일곱 영에게서(ἀπὸ τών ἑπτὰ πνευμάτων)
  묵시 4,5과 5,6에도 이 일곱 영이 등장한다. 이것은 즈카 4,10의 일곱 등잔, 즉 하느님의 일곱 눈과 관련이 있다. 뿐만 아니라 70인역 성서 이사 11,1-3의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위에 주님(야훼)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기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이 일곱 영은 메시아 위에 머무실 영이시다. 여기서 계약의 완성에 있어서의 그분의 역할이라는 측면에서 상징적인 일곱이라는 표현으로 성령의 모습을 지칭하고 있다.

③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이름이 세 부분으로 되었기에 형식적인 이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도 역시 세 가지가 덧붙여졌다. 즉 삼중적인 내용의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다.
  -성실한 증인이신 분(ὁ μάρτυς ὁ πιςτός)
   시편 89,27.38(참조. 요한 18,37)의 영향을 받았다.
  -죽은 이들의 맏이이신 분(ὁ πρωτότοκος τών νεκρών)
   콜로 1,18에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맏이이십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분(ὁ ἄρχων τών βασιλέων τής γής)

  이 세 가지 서술어는 한마디로 하나의 작은 그리스도론이다. 고난을 받으시고 부활하시고 들어 높임(현양)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론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5b-6절
  저자는 하느님과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 후에 (기쁨에 넘쳤는지) 찬미가를 부르고 있다. 5b-6절은 일종의 찬미가이다. “이 찬미가는 구약의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 예언자들의 활동과 역사(役事)를 정의해 주는 것이다.”. 안병철, p.64.

  예수 이름에 대한 서술어가 세 가지이듯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의 내용도 세 가지로 선포한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신 분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신 분
 
  이 찬미가는 약속의 성취를 전제로 하고 있고, 예언적인 감사기도라 할 수 있다.

7-8절
  7-8절은 인사부분(1,4-8)을 마무리 짓는 찬미가이다. 묵시록 저자는 다니 7,13과 즈카 12,10을 혼합해서 인용한다. 구약의 인용을 통하여 저자는 묵시록의 중요 테마 중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와 더불어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앞 단락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서술어가 세 가지이듯이 하느님에 대한 찬양도 세 가지이다: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 오실 분
  -전능하신 분(200주년 번역: 만물의 주재자)

  “알파요 오메가이신 분”  희랍어의 글자 순서에 따라 보면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묵시 21,6과 22,13에서도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참조. 이사 44,6). “하느님을 ‘알파요, 오메가’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분의 영원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의 시초에서부터 끝까지 그분께서 현존하고 계신다는 점을 지적해 주려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성서의 글들 안에 그리고 모든 사건들 안에 처음부터 그것들이 목적을 성취하는 순간까지 자리하고 계시며, 그 역사가 성취라는 시점에 이르기까지 희망을 주시는 분으로 계신다.”. 안병철, p.75.


  “만물의 주재자”(성경: 전능하신 분-ὁ παντοκράτωρ)는 묵시록에 이곳까지 포함해서 9번이나 나온다(1,8; 4,8; 11,17 ; 15,13; 16,7.14; 18,6.15; 21,22). 구약의 야훼 사바옷(YHWH SABAOTH)에서 온 것이다. 로마 황제 도미시아누스가 자신을 가리켜 ‘만물의 주재자’라고 했다. 여기에 반해 묵시록 저자는 오직 하느님만이 만물의 주재자(전능하신 분)라고 선포한다.

II. 1,9-20 : 인자에 관한 현시
  묵시록 저자가 본 인자의 모습을 구약성서의 몇몇 구절을 이용하여 서술하고 있다. 이 서술을 단지 현시뿐만 아니라 저자가 불림을 받은 것을 나타내는 “소명설화”라고 보기도 한다(H.Kraft, p.64 이하). 물론 신약의 소명설화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구약의 소명설화가 전형으로 작용했다. 물론 묵시록의 소명환상은 아주 통일적인 것은 아니다. 이 소명환상은 한편으로는 일곱 편지에 대한 서론이며 다른 한편은 원래의 묵시록에 대한 서론이다.
  이 단락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구체적인 환경 소개(9-10절), 일곱 교회의 구체적인 이름(11절), 인자의 외적 모습(12-16절) 그리고 인자의 내적 모습(17-20)이다.

1. 구체적인 환경 소개(9-10절)
  묵시록 저자는 자신이 체험한 상황들을 먼저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먼저 저자는 자기 자신을 요한이라고 밝힌다. 이 이름은 1,1과 1,4에 이어서 세 번째이다(참조. 22,8). 저자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 섬에 갇혀 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장소를 밝히고 있다. 이 섬은 소아시아 서쪽 에게해에 있는 작은 섬으로 거칠고 황량했다.
  현재의 교회가 박해를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저자도 역시 같은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난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냄으로써 위로와 용기를 전하는 저자가 편안하고 안이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시련(θλίψις)과 나라(βασιλεἰα)와 인내(ὑπομονἠ)의 동참자라고 소개한다. 시련은 무엇보다도 마지막 때의 고통을 뜻한다. 그러나 고통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영광을 얻기 위하여 반드시 지나쳐야 할 단계이다. 나라는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다. 이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희망을 표현하는 정식 가운데 하나이다. 인내는 고난을 참으며 견디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극복되는 것이며, 직접 절박해 있는 큰 종말론적 시련에서 참고 견디는 것이며 불굴의 의연함이다. H.Kraft, p.67.

  구약의 예언자들도 하느님 말씀이나 환시를 받은 장소, 시간 그리고 상황에 대해 상세하게 전해 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요한이 전해주는 자료들은 예언자적인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날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주님의 날에(성경: 어느 주일에-ἐν τῇ κυριακῇ ἡμέρᾳ) 현시를 보았다는 것이다. “주일”이라는 표현은 신약성서에 단 한 번 나온다. 구약성서에서 “야훼의 날”(=주님의 날)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연상케 한다. 묵시록에서 이 의미를 배제할 수 없다. 요한의 눈으로 볼 때 “야훼의 날”이라는 말로 예고했던 하느님의 심판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주님의 날’이라고 칭하는 주간의 첫째 날에 거행했던 사건,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완전하게 구현될 것이다.. 안병철, p.80.

  “성령께 사로잡혀”라는 표현의 직접적인 원형은 에제 3,12이다: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주님의 영광이 머무르던 그 자리에서 위로 올라갈 때, 큰 진동 소리가 내 뒤에서 들렸다.”
  “~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라는 표현은 묵시록에 자주 나타난다. 여기서는 “나팔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이다. 유대전승에서 볼 때 나팔은 종교의식에서 사용하는 도구이다. 탈출 19,16이나 히브 12,19에 보면 주님의 현현이 나타날 때 나팔소리가 울린다. 또 나팔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을 예고할 때 쓰이는 도구다(마태 24,31; 1코린 15,52; 1테살 4,16).

2. 일곱 교회의 구체적인 이름(11절)
  이미 1,4에서 일곱 교회라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일곱 교회의 구체적인 이름이 나타난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은 1,11에서 언급된 순서대로 2-3장에서 다시 소개될 것이다.
  물론 소아시아 지방에는 이 일곱 교회 이외에도 다른 교회들이 있었다. 밀레토스, 트로아스, 콜로새, 히에라폴리스 교회가 그것이다. 1,4에서 이미 본 바와 같이 일곱은 상징적인 숫자로 완전함, 충만함을 나타낸다.

3. 인자의 외적 모습(12-16절)
  1,12이하에서 요한이 본 환시의 두 번째 장면이 소개된다. 이 두 번째 장면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이 인자의 외적 모습을 그렸고(12-16절), 둘째 부분은 인자의 내적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17-20절) 인자가 요한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인자의 환시를 보기 전에 요한은 먼저 일곱 개의 황금등경을 보았다. 일곱 개의 황금등경의 기원은 분명히 구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다: 탈출 25,40; 37,17; 즈카 4,2.10; 1열왕 7,49; 1마카 4,49; 2마카 1,8; 10,3. 신약성서에서는 마태 5,14-16과의 관련성을 볼 수 있다. 묵시 1,20에서 일곱 등경이 바로 일곱 교회라고 설명한다.
  이어서 인자의 외적 모습이 그려지고 있는데 묵시록 저자는 다니엘서(7,13; 10,5; 7,9b; 10,6)와 에제키엘서(1,7; 43,2)를 간접 인용하여 그리고 있다 즉 요한은 다니엘 예언자와 에제키엘 예언자가 야훼 하느님께 부여하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인자를 묘사하고 있다.
  먼저 요한은 인자의 옷을 묘사한 후 그의 모습을 일곱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과 가슴의 금띠
  “긴 옷”은 항상 상징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그 직접적인 연관성은 다니 10,5 이하에 있다: “아마포 옷을 입고 허리에는 우파즈 금으로 만든 띠를 두른 사람 하나”.

  탈출 28,4.27에 히브리 대사제들이 입던 긴 옷이 나온다. 그런 옷은 왕들과 고관들이 특권적으로 입던 옷이기도 했다(1마카 10,89; 11,58). 그래서 이레네오 교부 이래, 옛 주석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현대 성서학자들은 ‘긴 옷’이라는 표현이 대사제와 왕의 특성을 표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자가 그 긴 옷을 입고 있다는 묵시 1,13의 정확한 지적에 근거해서 여기서의 긴 옷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사제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대부분 학자들은 주장한다.

-가슴의 금 띠
  금 띠 역시 다니 10,5 이하와 탈출 18,8; 39,5과 관련이 있다. 묵시록에서 자주 금붙이들이 나타나는데 예를 들면 금 띠(1,13), 금관(4,4), 금 대접(5,8), 금으로 만든 잣대(21,15), 순금의 도성(21,18) 등이다. 금은 광휘와 영광을 드러내는 금속이다. 특별히 묵시록에서는 순수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경신례를 위해 그것이 사용되고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이어서 인자의 일곱 가지 외적 모습을 보도록 하자.
①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었으며”(14절)
   다니 7,9에서 따 온 것이다: “옷은 눈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깨끗한 양털 같았다.” 물론 다니엘서에서 이 표현은 야훼 하느님과 그분의 영원성을 특징적으로 묘사하기 위한 것인데 묵시록 저자는 이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흰색은 권위, 영광, 순결성을 상징한다. 묵시 6,2에서 흰색은 오로지 승리한 자를 나타낸다. 또 죄 없음을 상징한다.. “희다”(λευκός)는 묵시록에서 세 가지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말은 신적인 형상이나 또는 하늘의 형상을 서술할 때 초지상적인 빛을 나타내며 신적인 존엄을 반사해 주는 빛이거나 또는 신적인 존엄 자체이다. 묵시 6,2에서 흰색은 오로지 승리한 자를 나타낸다. 의복의 색깔로서 이 흰색은 죄가 없음을 나타내 준다. 순교자의 의복은 그것들의 흰색으로 인해 또한 승리를 나타내며 인도자인 그리스도에 가까이 감을 나타낸다.

② “그분의 눈은 불꽃같았으며”(14절)
  다니 10,6에서 따 온 것이다: “눈은 햇불 같고.” 이것은 모든 악을 밝혀내는 공의의 눈이다. 또 하느님이 보편적 심판관으로서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표명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③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고”(15절)
  이 말은 다니 10,6에서 따 온 것이다: “팔과 다리는 광을 낸 청동 같았으며.” 이 이미지는 하느님의 절대성을 나타내며, 모든 더러운 무리들과 반대자들을 밟아 심판하는 발을 나타낸다(에제 1,27 참조). 이것을 인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④ “그분의 목소리는 큰 물소리 같았다”(15절)
  다니 10,6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원래 이 비유는 에제키엘에 소급된다. 에제 1,24에서는 날개소리가 이와 같이 묘사되어 있으며, 에제 43,2도 이와 비슷하다:
   에제 1,24 : “그들이 나아갈 때에는 날갯소리가 들리는데, 마치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 같았으며….”
   에제 43,2 : “그 소리는 큰 물이 밀려오는 소리 같았고.”
  본래 하느님 계시의 보편성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을 인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에게해의 물소리가 저자 요한의 귀에 들릴 때 큰 파도소리는 책망의 음성으로, 그리고 작은 파도 소리는 위로의 음성으로 들렸을 것이다.
⑤ “그분은 자기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계셨으며”(16절)
  1,20에서 “일곱 별은 일곱 천사들”이라고 한다. 여기에 근접하는 성서 구절을 찾는다면 욥기 38,31인데 근거가 희박하다: “너는 오리온자리를 매단 밧줄을 풀 수 있느냐?” 물론 이 성서구절은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자는 하느님 혼자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오른손”은 힘과 영광을 말한다.
⑥ “그분의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칼이 나왔고”(16절)
  관련구절을 보면
   이사 11,4 : “그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막대로 무뢰배를 내리치고, 자기 입술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악인을 죽이리라.”
   이사 49,2 : “그분께서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시고, 당신의 손 그늘에 나를 숨겨 주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처럼 만드시어”
  그 이외에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과(14절)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쌍날칼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비밀들을 꿰뚫어 보고, 선과 악을 냉혹하게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킨다.
⑦ “그분의 얼굴은 한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
  이 절의 직접적인 구약성서와의 연관성은 찾을 수 없다. H.Kraft는 판관 5,31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하여 주십시오”와 시편 19,5의 “해는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같고”의 결합으로 본다. 꼭 그대로는 아니지만 다니 10,8의 환상과 이사 6,5의 성전에서 본 환상과 연결시킬 수 있다. 신약에서는 마태 17,2의 산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예수님의 모습과 사도 26,13의 다마스커스에서 사도 바울로에게 나타난 주님의 얼굴이다.
  이상 일곱 개의 내용을 저자는 다시 2-3장의 일곱 편지 서두에서 몇 개씩 다시 언급할 것이다.

4. 인자의 내적 모습(17-20절)
  이 단락에서 인자(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사실적으로 드러나는데, 파스카 신비 안에서의 그리스도로 등장한다. 그분은 죽음과 저승을 쳐부수시고 구원을 이룰 모든 권능을 쥐고 계신 분이시다.
  인자의 내적 모습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①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하느님께 묘사된 것이(8절) 이제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있다. 예수의 영원한 신성을 가리킨다(참조. 히브 13,8 이하).
②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있는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의 신적인 생명을 제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한다(참조. 요한 5,26). 여기서 우선 그리스도교적인 부활의 희망에 대한 신뢰가 나타나 있고, 이런 신뢰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그 확증을 갖고 있다.
③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저승은 하데스(Hades)이다. 하데스는 희랍 신화에 나오는 잡신 이름인데 지하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다. 그래서 하데스는 죽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 2,31에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시편 16,10의 인용)라는 표현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죽음과 저승을 극복하신 분이시다.

  저자 요한은 이런 인자의 모습을 뵙자마자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이것은 하느님을 뵙고 나서의 인간의 첫 번째 반응(현상)이다(참조. 이사 6,5; 에제 1,28; 루가 5,8).
  하지만 묵시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간들의 상태를 엿보게 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인간들은 원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 즉 신적 생명을 죄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묵시록 저자는 그런 인간 조건을 6,7-8에서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안병철, p.9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죽음을 이겼다고 선언하시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일들을 기록하라는 명령을 다시 반복하신다(19절, 참조. 12절). 그리고 일곱 별과 일곱 황금등경의 신비를 밝혀 주시는데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일곱 등경은 일곱 교회이다(20절).

III. 2,1-3,22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묵시록의 환상부분(미래에 일어날 일들, 4,1-22,5)에 앞서 저자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소개한다. 저자는 그가 말해야 하는 것, 즉 영적인 권위와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서 언급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구체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를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 공동체들은 모든 교회를 대표하는 것이다.
  저자가 자신의 편지를 듣기를 기대하는 모든 교회는 완전히 충실한 필라델피아 교회와 열의가 없는 라오디케이아 교회 사이에 놓여져 있다. 모든 교회는 이단과 분열로 인해 위협을 받고 있으며 로마제국을 거슬러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기에 심한 박해를 받고 있다.

1. 편지의 양식
  일곱 편지는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다른 서간들과 구분되며 엄격한 의미로 볼 때 편지라고 할 수 없다. “써 보내라”는 명령이 서두에 있고 서문과 인사가 없는 것으로 볼 때 편지라기보다는 일종의 보고서의 형태와 비슷하다.
  일곱 편지의 동일한 양식을 보면:
① “써 보내라”는 명령과 함께 각 교회의 이름이 거명된다.
② “이렇게 말한다”와 더불어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것은 1,12-16의 인자의 환상에서 나온 것인데 그리스도께 칭호나 특징을 부여하고 있다.
③ “나는 안다”라는 말로써 각 교회가 놓여 있는 상황을 드러내며, 교회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반성을 촉구한다. 일곱 교회를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책망받는 교회와 칭찬받는 교회이다. 책망받고 있는 교회는 에페소-페르가몬-사르디스-라오디케이아이며 칭찬받는 교회는 스미르나-티아티라-필라델피아 순으로 충실성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④ 회개의 명령, 경고사항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신앙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
⑤ 성령의 메시지를 들으라는 명령
  “귀 있는 사람은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는 명령이 각 교회에게 주어진다.
⑥ 승리자에게 내릴 특별한 선물
  박해의 시련 속에서 인내하는 사람에게 승리와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1) 편지의 형식

수신교회
그리스도의 모습
각 교회의 잘잘못
명령 경고사항
승리자에게 내릴 특별한 선물
에페소
(2,1-7)
오른손에
일곱별을 쥐고
일곱 황금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
인내심, 내 이름 때문에 어려움, 용기를 잃지 않음.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렸다.
회개하라.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우겠다.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
스미르나
(2,8-11)
처음이요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
환난과 궁핍-너는 부요하다. 유다인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다. …책망이 없음-
네가 앞으로 겪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죽을 때까지 충실하라.
생명의 화관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음
페르가몬
(2,12-17)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
굳건한 믿음
발라암과 니콜라오스파의 가르침을
고수하는 자들.
회개하여라.
내가 곧 너에게 가서 내 입에서 나오는 칼로
그들과 싸우겠다.
만나. 흰 돌.
티아티라
(2,18-29)
불꽃 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
사랑, 믿음, 봉사, 인내 이제벨이라는 여자
내가 갈 때까지
너희가 가진 것을 굳게 지켜라.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
샛별
사르디스
(3,1-6)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몇
죽은 신앙
굳게 지키라. 회개하여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흰 옷.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겠다.
필라델피아
(3,7-13)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닫으면 열 자가 없는 이
 힘이 약한데도, 내 말을 굳게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칭찬받았음
내가 곧 간다.
하느님의 성전 기둥으로 삼겠다.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 에게
새겨 주겠다.
라오디케이아(3,14-22)
아멘 그 자체이고 성실하고 참된 증인이며, 하느님의 창조의 근원인 이
영적으로 가난한 교회
(책망만 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다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 옷을 사라.
안약을 사라.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여라.
내 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해 주겠다.


2) 각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

 ①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2,1-7)

  a. 에페소 도시
  기원전 13세기부터 이 도시에 사람들이 정주했다. 이 도시가 교통의 요충지가 되면서 크게 발전하여 전성기에는 25만의 인구가 거주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고대시대부터 에페소는 아르테미스(에페소의 다이아나) 여신을 섬겼고, 이 여신상이 있는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다. 이 여신은 풍년, 생명, 성을 주관한다. 그리스도교는 사도 바울로에 의해 처음으로 에페소 지역에 전래되었다. 즉 제 3차 선교여행(53-58년) 때에 이 도시에 약 3년간(사도 19,8-10에는 27개월; 20,31에는 3년) 머물면서 선교사로서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참조. 1코린 16,9 “문이 활짝 열렸다”) 큰 교회도 세웠다. 그러나 만 3년간의 활동이 끝날 무렵 은장이 조합(Guild), 조합장 데메트리오의 선동으로 큰 폭동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바울로의 활동으로 개종자가 늘어났고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파는 그들의 사업이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바울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갔다(사도 20,1). 옛 전승에 따르면 요한은 에페소에서 약 5㎞ 떨어진 “Merymana”라고 하는 조그만 집에서 성모 마리아를 모시며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거기에 조그만 경당이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때 에페소에 성 요한 대성전이 세워졌고 기원 후 431년과 449년 두차례 세계 공의회가 열렸던 성모 대성당도 있다. 요한 묵시록 시대에 에페소 교회는 대단히 번창했고 아르테미스에게 바치는 종교의식에 대항해서 격렬한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에페소 교회에 편지가 보내졌다.

  b. 내용
  에페소 교회에 소개되는 그리스도의 스스로 드러내시는 모습(autopresentazione)은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이시다(2,1). 그분은 에페소 교회를 책망도 하시고 칭찬도 하신다. 그리스도는 먼저 에페소 교회의 소행, 수고, 인내, 거짓 사도를 발견한 것,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당했고 용기를 잃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계신다고 한다. 하지만 에페소 교회의 잘못도 지적하신다. 즉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문구는 구약에서 예언자들의 입을 빌어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말씀과 비슷하다(예레 2,2; 참조 호세 2,14-16).
  · 예레 2,2 : “네 젊은 시절의 순정과 신부 시절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
  묵시 2,4은 에페소 교회에서 예전에는 그토록 소중하게 실천되었던 그런 사랑이 지금은 한 구석에 내동댕이쳐져서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에페소 교회가 예전에 지녔던 사랑을 기억하고 실천하도록 간청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에페소 교회를 칭찬도 하신다. 즉 그 교회가 니콜라오스파의 소행을 미워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니콜라오스파와 그들의 소행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고대 神의 영적 후손들인 니콜라오스파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고 음란한 짓을 하는 것을 가르침으로까지 승격시켜 받들어 섬기고 있다. 여기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다는 것과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을 인정하고 우상에게 바치는 의식에 연계되어 있는 비윤리적 결합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다. 안병철, p.126.
 어쩌면 니콜라오스파에 속한 사람들이 2절의 “거짓 사도”와 가깝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니콜라오스파가 그 당시에 성행하던 영지주의의 한 갈래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지주의자들은, 첫째,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존재이며 영적인 존재이므로 악한 이 세상에 물질적 육신으로 오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몸으로 나타나신 것은 다만 그와 같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요, 결코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假現說 Docetism). 둘째, 영지주의자들은 정신적 해방과 자유를 자랑하였다. 그리고 윤리적 책임을 등한시하였다(1요한 1,2-4; 2,9). 그들은 육체란 하찮은 것이고 썩어 없어질 것이기에 육체를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회개하고 승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해 주겠다”(2,7)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볼 수 있겠다:
  첫째, 창세 3,24의 내용이다. 승리하는 자는 보상으로서 낙원으로부터의 추방 때문에 조상들이 잃어버린 것, 즉 생명 나무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불사성을 얻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다.
  둘째, 당시 통용되던 동전에 새겨져 있던 아르테미스의 거룩한 나무를 암시해 주는 것이다.
  셋째, 묵시록 저자에게 생명 나무는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낙원에서의 생명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늘에서 일치한다. 생명 나무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사된 생명이다. 이 열매가 먹혀진다는 것에서 우리는 미리 성찬례적인 또는 성사적으로 인도되는 표상을 볼 수 있다.

 ②  스미르나 교회에 보내는 편지(2,8-11)

  a. 스미르나 도시
  스미르나는 에페소 북쪽 약 120㎞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당대 약 30만명의 인구를 가진 에페소와 같은 대 상업도시였다. 소아시아의 모든 도시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도시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음을 당한 첫 번째 사람은 그 교회의 첫 번째 주교였던 뽈리까르뽀였다. 그는 요한의 직제자였고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69년 태어나서 155년 2월 23일 군중들 앞에서 화형을 당했다.
  현재 터어키의 두 번째 항구이며, 세 번째 큰 도시인 이스미르를 가리킨다. 하지만 사도행전에는 이 도시에 관한 언급이 일체 없다. 현재 인구가 약 300만 가량 된다.

  b. 내용
  서두에 묵시 1,18에 있는 인자에 대한 환시를 반복하고 있다(“처음이요 마지막이고, 죽었다가 살아난 이” 2,8). 이 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의 모형이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를 통해서 설명되고 입증된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겪으시고 나서 새로운 생명을 얻으신 분이시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조건과 하느님의 영원성을 당신 자신 안에 모아 놓으신다.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호칭은 스미르나 교회를 위협하는 죽음 때문에 선택된 호칭임에 틀림없다.. 안병철, p.116.

  이 교회에 보낸 편지는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서 가장 짧은 것으로서 책망이 없다. 비록 스미르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을 겪고 있지만 사실은 부요하다. 이것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와는 반대되는 것이다(3,17). 여기서 궁핍은 다만 물질적인 빈곤과 곤궁만을 의미할 수 있다. 왜냐하면 외형적인 가난이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실제로 부요하다고 한다. 풍부하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영적인 은사가 풍부하다는 것이지만 특별히 여기에서는 교회가 앞으로 다가올 박해에 저항할 수 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교회는 자칭 유다인이라는 자들에게서 비방을 당하고 있다(9절).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묵시록 저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유다인은 그리스도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자들은 “사탄의 무리”인 것이다. 저자는 여기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다.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데 악마, 유혹하는 자(2,10; 12,9.12; 20,2.19), 사탄(2,9.13.24; 3,9; 20,2.7), 오래된 뱀(12,9; 20,2), 우리 형제들의 고발자(12,10) 등이다. 모두 부정적인 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교회에게 생명의 화관이 약속되어 있고, 또 박해에 승리하는 자는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고 있다(10-11절). 승리의 상징인 이 화관은 아곤(Agon) 대회에서 이기는 자가 쓰는 것이며, 또 로마의 개선 장군의 화관이기도 했다. 스미르나 교회 공동체가 주님께 충실할 때, 그 공동체 또한 불사불멸을 보장해 주는, 영광스러운 승리의 상징인 화관을 받게 될 것이다(4,4; 6,2).
  두 번째 죽음에 대해서는 21,8에 그 설명이 나온다:
  “비겁한 자들과 불충한 자들, 역겨운 것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 마술쟁이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모든 거짓말쟁이들이 차지할 몫은 불과 유황이 타오르는 못뿐이다. 이것이 두 번째 죽음이다.”

 ③ 페르가몬 교회에 보내는 편지(2,12-17)

  a. 페르가몬 도시
  페르가몬은 소아시아의 문화도시였고 행정기관의 소재지였다. 또 이 도시는 가파른 언덕 위에 세워져서 넓은 평야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도시는 종교적 중심지였다. 왜냐하면 많은 잡신들을 섬기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신전이 있었고 특별히 제우스 신전이 있었다. 또 이 도시는 의사들의 신 아스클레피오스(Aesculapius 혹은 Asklepios 樂의 神) 신전과 치유의 샘이 있었다. 또한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묵시 2,13에서 말하는 ‘사탄의 왕좌’는 도미시아누스(81-96년 재위)를 신으로 섬긴 황제 신전을 가리킬 것이다. 또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컸다는 유메네스 도서관은 200,000권의 장서를 보관하고 있었다. 페르가몬은 전성기에 주민이 16만여 명이었으나, 지금은 약 8만명 정도이다.

  b. 내용
  편지 서두에 묵시 1,16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환시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그분은 “날카로운 쌍날칼을 가진 이”로 나타나신다. “쌍날칼의 이미지는 하느님이 인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관능적인 즉 음란한 모든 것’에 종지부를 찍으러 오신 것임을 전해 주는 묵시 19,15-21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안병철, p.124.
 로마제국의 식민지에는 로마 총독들이 식민지 원주민을 다스렸는데 그들은 로마 황제로부터 식민지인들의 생사여탈권을 받았다는 상징으로 ‘jus gladii’라는 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생사여탈권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쌍날칼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페르가몬 교회에 대한 칭찬은 그들이 주님의 이름을 굳게 믿고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주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예로서 ‘안티파스’를 들고 있는데 전승에 의하면 그는 페르가몬의 주교였다고 하지만 확실히 알 수 없다. 그 교회에 대한 책망은 발라암과 니콜라오스파의 교훈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발라암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민수 22-24장과 31,16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 모압 왕 발락은 신성(神性)을 지닌 발라암을 자기 나라로 초청해 한없이 불어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빈다. 그러나 발라암은 야훼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는커녕 축복을 한다. 그리하여 발라암은 자기 땅으로(브돌) 돌아갔다. 하지만 유대 랍비들은 민수 31,16을 이렇게 해석한다: 발라암은 모압 왕 발락에게, 히브리 사람들에게 모압의 여인들을 내주어 타락하게 하고 간음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우상을 섬기고 부정한 고기를 먹게 한다. 묵시록 저자는 이런 사상을 받아들여 페르가몬 교회에 “발라암의 가르침을 고집하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니콜라오스파’에 대해서는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미 보았다. 승리하는 자에게 두 가지 상급이 약속되어 있다. ‘숨겨진 만나’와 ‘흰 돌’을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만나는 신약성서에서 드물게 나타난다. 히브 9,4, 요한 6장, 1코린 10,3에 나오는 만나는 마지막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 올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만찬의 유형이었다. 이 약속을 이기는 자가 하느님 나라에서 종말론적인 식사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상급은 ‘흰 돌’인데 그 위에 새로운 이름이 새겨진다. 이 흰 돌은 희랍-로마식 사회구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흰 돌’은 투표를 하는데 의사표시용으로 사용되었다. 즉 ‘흰 돌’은 동의(찬성)를, 검은 돌은 거부(반대)를 표시했다(사도 26,10).
  뿐만 아니라 ‘흰 돌’은 축제에 참여할 수 있는 입장권 같은 것이었다. 이 사상이 발전해서 이 흰 돌은 세상 축제뿐만 아니라 천상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그 입장권에 그리스도의 새로운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지상에서 불완전하게만 알려진 예수의 이름을 굳건하게 지켜온 승리자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완전히 알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또 ‘흰 돌’은 법정에 고발된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은 후 그 표로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흰 돌을 준다는 것은 예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없고 흠없는 의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이다.

 ④  티아티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2,18-29)

  a. 티아티라 도시
  페르가몬에서 남동쪽으로 65㎞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로서(현대 도시는 아키사르-Akhisar라고 한다), 일곱 도시 중 가장 보잘 것이 없었다. 이 도시는 상업조합의 조직(노동자들의 Guild, 현대의 주식회사 형태). Guild로 인한 교회 내부의 문제가 발생했다. 이들 Guild 중의 하나에 가입하지 않는 것은 노동자의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것과 같음을 의미했다.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들의 양심에 의해서 이런 Guild에 가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두 가지 중요한 특성들로서 구별되었다. 첫째, 그 회원들은 공동의 잔치와 식사를 행했다. 이것들은 가끔 사회적 중심부인 신전에서 행해졌다. 둘째, 이 만찬들은 대체로 잡신들에게 바친 희생물과 봉헌을 함으로써 시작하였다. 의식을 거친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자가 이같은 길드 식사에 참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 옷감과 제철공업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 도시는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했다. 이 옷감은 달팽이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대단한 고가품이라 부호들이나 입을 수 있었다. 사도 바울로가 제2차 전도여행 중(50-52년경) 필립비에서 전도할 때 맨 먼저 입교한 이가 바로 티아티라 출신 자색 옷감장수 리디아라는 부인이었다(사도 16,14). 도시는 보잘 것 없었지만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 가장 긴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놀랍다.

  b. 내용
  먼저 그리스도의 환시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분은 ‘불꽃같은 눈과 놋쇠 같은 발을 가진 이, 곧 하느님의 아들’이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묵시록에서 여기에만 나온다. 물론 서문인 1,6과 티아티라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종결문인 2,28과 그리고 3,5.21; 14,1에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는 “사람의 속과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23절) 불꽃같은 눈을 가지신 분이시다. 또 “발이 놋쇠와 같다”는 것은(1,15 참조) 견고성, 안전성, 굳건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이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 이제벨 여자가 예언자로 자처하면서 주님의 종들을 미혹하고 간음하게 하며,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게 하였다. 그 여자는 구약의 열왕기에 나오는 아합 왕의 부인이었던 이제벨을 연상케 한다. 바알을 섬기던 이제벨은 야훼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몰살시켜버리고 바알의 예언자들을 자기 식탁에 불러 모았다(1열왕 18,19). 그런 이유로 인해서 이제벨이라는 여인은 탕녀인 것이며(2열왕 9,22), 그녀의 후손은 죽음에 처해지게 될 것이다(1열왕 21,20-24).
  그리스도는 승리한 자에게 두 가지 상급을 내리실 것이다.

  첫째는 민족들을 다스리는 권한을 주시겠다는 것이다(2,26).
  이 약속은 승리를 말하는 것으로 시편 2,8-9에서 빌려왔다.
  둘째는 샛별을 주시겠다는 것이다(2,28).
  다른 별들보다 더 찬란한 빛을 발하는 샛별을 구약성서에서는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바빌론을 상징하기도 했고(이사 14,12), 벤 시라에게서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대사제를 나타내기도 했다(집회 50,6). 그러나 여기서는 민수 24,17에 나오는 메시아적 의미의 샛별이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그래서 요한 묵시록에서 샛별은 예수 이외에 어느 누구도 지칭하지 않는다(묵시 22,16).

 ⑤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3,1-6)

  a. 사르디스 도시
  티아티라에서 남쪽으로 70㎞ 지점에 고대 리디아 왕국(기원전 680-546년)의 수도였던 사르디스 폐허가 있다. 이 도시는 고대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의 하나였으며, 화려하고 매력적인 도시였다. 트몰루스(Tmolus 해발 1237m)라는 산꼭대기에 있는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졌기에 난공불락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누구라도 침공할 수 없다고 방심하였기에 한밤중에 급작스런 침공을 받고 두 번이나 함락되었었다. 첫 번째가 기원전 546년에 페르시아 왕 키로스에 의해서, 두 번째는 기원전 218년에 안티오쿠스 3세가 위험을 무릅쓰고 깎아지른 듯한 트몰루스 산을 타고 올라와 한밤중에 이 도시를 점령하였다. 기념비적인 건물들이 몇 있는데 서기 193-235년에 세운 체육관이 다 무너진 것은 1965-1973년에 복원되었고 체육관 옆에 있는 4세기 말엽의 유대교 회당은 복원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도시 남쪽 2㎞ 지점 트몰루스 산 자락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에페소에 있는 아르테미스 신전과는 달리 사르디스에 있는 이 신전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도시는 기원 후 17년 지진으로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다.

  b. 내용
  먼저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로 나타나신다(1,4; 1,16 참조). 이 교회는 어떤 특정한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활기를 잃고 지리멸렬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래서 한시바삐 신앙의 잠든 상태에서 깨어나라는 것이다. 그 도시가 경계를 소홀히 하여 두 번이나 정복당했던 것처럼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나태해지고 잠들어 있으면 그리스도가 도둑같이, 불시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묵시 16,15; 마태 24,43-44 참조). 그러나 놀랍고 희망이 있는 것은 이 교회에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 몇 있다’는 것이다(3,4). 이 교회에 보낸 편지에 3번이나 ‘옷’을 언급한 것은 이 도시에 방직공업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옷을 더럽히지 않고 승리한 자에게 두 가지 상급이 약속된다: 흰 옷을 차려 입을 것과 생명의 책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지 않을 것이다. ‘흰 옷을 입게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닐 것’이라는 의미는 그리스도의 행동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의 책’은 구약성서에서 빌려 온 개념이다(시편 69,28; 다니 7,10; 12,2; 탈출 32,32-33). 생명의 책에서 믿는 이들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그 이름을 장엄하게 증언하신다는 의미이다.

 ⑥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3,7-13)

  a. 필라델피아 도시
  ‘형제애’라는 뜻을 가진 필라델피아 도시는 사르디스에서 남동쪽으로 약 45㎞ 떨어진 곳에 있다. 필라델피아는 옛날 리디아인들의 마을터에 세워졌으며(B.C. 1,000년경) 원래의 이름은 칼라테부스(Callatebus)였다. 그러다가 그 도시는 쇠퇴하였다. 페르가몬 왕이었던 아탈 필라델프스 2세(B.C. 159-138년 통치)가 이 도시를 재정비해서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본따서 필라델피아라고 했다. 이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계곡은 매우 아름답고 비옥했다. 그러나 그곳에 정주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도시에는 자주 지진이 일어났다. 가장 강렬했던 지진은 기원후 17년과 23년에 일어났는데 이때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14-37년 통치)는 이 도시는 재건하여 그 이름을 신(新) 가이사리아(Neocaesarea)라고 했다. 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시절에 다시 필라델피아라고 했다.

  b. 내용
  요한 묵시록의 그리스도는 일곱 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 교회와 필라델피아 교회만 나무라시지 않았다. 오히려 필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하셨다(3,8). 7절에서 그리스도 환시를 묘사하고 있는데 1장의 환시내용을 앞의 다섯 개 편지에서 1-2개씩 다 사용했기 때문에 저자는 여섯째와 일곱째 편지에서는 새로운 묘사를 하고 있다. 여섯째 편지에서의 묘사는 이사 22,22의 간접 인용문이다. 그리스도를 ‘거룩한 이’라고 부른 것은 묵시록에서 여기 밖에 없다. ‘거룩하신 분’이란 원래 하느님뿐이시다(4,8; 6,10).
  앞의 편지, 즉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편지가 그리스도와 성령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면,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내적 친교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더 강조하고 있다.. 안병철, p.149.
 
  문이신 그리스도께서는(요한 10,7)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서 필라델피아 교회를 위해서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8절). ‘문을 열어 두었다’는 것은 히브리적인 표현으로(1코린 16,9 ; 2코린 2,12 ; 골로 4,3) 천상 예루살렘의 문이 열려 있음을 나타낸다.
  승리하는 자에게 그리스도께서 세 가지 보상을 약속하셨다:
    첫째, 하느님 성전의 기둥으로 삼을 것이고,
    둘째, 하느님의 도성,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참조. 21장),
    셋째, 그리스도의 새로운 이름을 그 위에 새기겠다.

 ⑦ 라오디케이아 교회(3,14-22)

  a. 라오디케이아 도시
  라오디케이아는 필라델피아 남동쪽 65㎞ 지점에 위치한 도시로서 히에라폴리스(북쪽으로 61㎞)와 골로사이(동쪽으로 10㎞)에 근접한 도시였다. 묵시록 저자는 일곱 도시를 나열하면서 하나의 원을 그리고 있다: 에페소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올라가고 페르가몬에서 다시 동쪽으로, 티아티라에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지진 지대에 위치한 라오디케이아에서 끝난다. 로마의 역사가 플리니(Pliny)에 의하면 약 기원전 250년경에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가 새 도시를 세우고 그 도시의 이름을 그의 아내 라오디게(Laodice)의 이름을 본따서 라오디케이아라고 했다. 이 도시는 상업, 농업, 그리고 극도로 활발했던 은행의 중심지였다. 뿐만 아니라 검은 색의 윤기나는 모피제품(양털에서 얻은 것)들이 만들어져 수출까지 했고, 모직 제품의 생산과 자주색 염색업의 중심지였다. 좋은 아마포 직물도 여기에서 생산되었다. 게다가 이 도시는 중요한 의료의 중심지였다. 라오디케이아 의료학교는 고대 세계에서 다음 두 가지 요인으로 유명했다. 하나는 귓병들의 치료와 치유 그리고 귓병들에 대한 제조약이고, 또 하나는 눈병들의 치료와 Koulorion이라는 이름으로 주변에 수출까지 했던 안연고이다.
  또 류마티즘 치료에 필요한 온천수를 풍부하게 가지고 있던 히에라폴리스(지금의 Pamukale)가 바로 근처에 있었기에 도시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목욕탕들은 실제적으로 육체적인 고통, 즉 피부 질환을 치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었다. 물은 매우 뜨거웠으며 석회질이 풍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물을 마시면 구토를 일으킬 수 있으므로 마시지는 못했다. 그런데 라오디케이아에는 중요한 원천수가 없었다. 그래서 멀리 떨어진 남쪽에서부터 물을 끌어 와야만 했고, 그를 위해 긴 수로를 만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종이 햇살이 따갑게 비추었기 때문에 수로를 통해서 오는 물은 미지근했다. 라오디케이아에 보내는 편지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미지근한 모습을 상기시킬 때 라오디케이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재빨리 이해했을 것이다.

  b. 내용
  그리스도는 라오디케이아 교회에게 당신을 ‘아멘’이라고 소개하신다(14). 이 호칭은 유일한 것으로 특이하다. 이 호칭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께 충실하게 동참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은 참된 증인이시다(15절).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물질적으로나 외적으로는 풍부한 교회였지만, 영적으로는 가난한 교회였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열기가 사라져 버렸고, 믿음에 있어서 조금도 칭찬할 것이 없다. 그보다 더한 것은 그 교회가 미지근했다는 것인데 그것은 오히려 죽은 것보다(3,1) 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 교회 구성원들이 그 도시에서 생산되는 금, 옷, 안약을 자랑하나 금은 불순물이 섞여 있을 뿐이고, 옷이나 안약도 쓸모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의 표상이 정련된 금(21,18.21)과 새로운 창조를 단장케 하는 의복(3,5)과 하느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안약은 그리스도에게서 사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경고나 질책을 하시지 않고 두 가지 권고를 하셨다:
    첫째, 열성을 다하고 회개하라는 것이고(3,19)
    둘째, 문을 열라는 것이다(홀만 헌트의 그림).
  그리고 승리한 이에게 세 가지 약속이 주어진다:
    첫째, 함께 있겠다(들어간다),
    둘째, 기쁨과 교제를 나누겠다(그와 함께 먹고),
    셋째, 승리와 영광을 베풀겠다(내 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승리자는 어좌를 상징하는 특권을 그리스도와 아버지와 함께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시선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가 자리하고 있는 천상 도시로 향하게 하는(22,3) 마지막 편지가 종결되고 있다.

IV. 4,1-22,5 : 미래에 일어날 일들(현세의 종말과 내세의 도래)

  4장부터 묵시록의 두 번째 부분이 시작된다. 앞부분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까지는 전체 작품의 구성으로 보아 별도의 서론에 불과하며 4장부터 최초의 현시가 시작되기 때문에 4장에서부터 고유한 의미에서 묵시적이고 예언적인 부분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4,1-22,5까지에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환시를 보여준다. 4,1-5,14에서 세 가지 현시(하늘에 열린 문, 어좌에 앉으신 분, 어린 양)가 나타나고 이어서 여섯 묶음의 현시들이 계속 나타날 것이다.

1. 4,1-5,14 : 묵시록 현시들을 미리 보여주는 현시
  4장과 5장은 “하늘에서 열리는 전례”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 마치 하나의 단락처럼 일체성을 이루고 있다. 4장과 5장은 ‘창조와 구속’을 기리는 전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는 유대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으로 창조주 하느님을 흠숭하는 전례이고(4장), 다른 하나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등극을 경하하면서 거행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론적 중요성을 띠고 있는 전례이다(5장).. 안병철, p.171.


 1) 어좌에 앉아 계신 분에 대한 현시(4,1-11)
  묵시 4장은 5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5장에서 소개될 봉인된 두루마리와 어린 양의 출현을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4장 시작부터 그 첫머리는 무척 평온한 분위기이다. 4장 전체를 하늘의 어좌(θρόνος)를 중심으로 해서 펼쳐지고 있다.
  요한은 탈혼의 경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조용히 있는 가운데 한 가닥 섬광이 스치며 하느님의 처소인 하늘에 한 문이 열림을 보았다. “하늘에 열려져 있는 문”은 에제 46,1-12와 비교할 수 있고. 에제키엘이 묘사해 주고 있는 미래의 성전에서 백성들이 접근할 수 있는 첫 번째 현관과 번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는 두 번째 현관 사이에 있는 문은 축제를 지내는 동안 열려져 있어야 한다. 백성들은 첫 번째 현관에서 여러 동물들, 특별히 어린 양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즉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 양’의 환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창세 28,17의 베델에서 야곱이 환시로 본 ‘하늘에 열려 있는 문’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요한이 본 환시 속에서는 에제키엘이 전해 주는 성전에서의 환시와 베델에서 본 야곱의 환시가 포개져 나타나고 있다.”. 안병철, p.174.
 부활하신 그리스도 음성을 듣고 요한은 하늘로 불려 올라간다. 요한에게는 분명히 하나의 은총이며 초대였다. 하늘의 문이 열려져 있다는 것, “이리 올라오너라”라는 음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음성은 요한이 첫 번째 환시 속에 들었던 그 음성이었다(1,13). 그는 즉시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었다”(2절). 이것은 하느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지고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요한은 하늘에 어좌가 놓여 있고, 그 어좌에 어떤 분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어좌 둘레에 있는 것들, 스물 네 개의 어좌, 스물 네 명의 원로(4절), 그리고 네 생물(6-7a절)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구원의 경륜 안에 들어있는 자들이었다(2-6a절). 스물 네 명의 원로들과 네 생물은 이 전례의 주인공들처럼 나타나는데 이것은 이어지는 두 찬미가(8절과 9-11절)에서 드러난다: 하느님은 인간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함을 지니고 계시는 분이다. 하지만 그분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시어 만물을 창조하셨다.

① “이 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4,1)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계시의 대상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순서적으로 일어날 일, 사건이다. 그것들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고 종말에 가서 완성될 것이다.

  4,2-8은 요한이 본 환시의 내용이다. 요한은 “성령에 사로잡히게 되어” 자신이 어떤 방식으로 환시를 보았고, 어떤 체험을 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먼저 하늘에 놓여 있는 한 어좌를 본다. 어좌는 묵시록에서 무려 41번이나 사용된 것으로 그 이미지를 구약성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늘을 하느님의 어좌(이사 66,1)로, 그리고 하느님의 천상 어좌(시편 11,4)로 표현한다. 그 이외에 이사 6장의 현시나 1열왕 22,19-23에 나오는 미카야의 현시도 볼 수 있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어좌는 왕권의 상징이니만큼 여기서도 어좌는 왕권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어좌에 어떤 분이 앉아 계셨다(καθήμενος). 어좌에 앉아 계시는 분이 틀림없이 하느님이시지만 그분을 소개함에 있어서는 전통에 따라서 베일에 가려 두고서 소개하는 어법을 쓴다. 그분의 형상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그분은 요한이 보고 있는 환시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어좌 둘레에 있는 존재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묵시록 저자는 그 ‘어떤 분’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신체적인 모습으로 형용할 수가 없으니까 다른 방법으로 묘사한다: “앉아 계신 분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이셨고,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다”(3절).
  에제 1,26.28에서도 이와 비슷한 묘사를 볼 수 있다.
  “벽옥과 홍옥” 푸른 색과 붉은 색을 띠는 보석이다. “하느님은 빛이시다”는 요한의 명제를 시각화한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어좌 둘레에는 취옥같이 보이는 무지개가 있었다”가 말하는 것은 후광처럼 보이는 무지개를 말한다다. 비취옥은 푸른 색의 보석이다. 창세 9,8-17에서 무지개는 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결정적으로 맺으신 계약의 표징이었다. 무지개는 화해와 자비의 표지이기도 하다. “어좌 앞에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다”(6절). 이 모든 것은 탈출 24,10의 “그분의 발 밑에는 청옥으로 된 바닥 같은 것이 있었는데, 맑기가 꼭 하늘 같았다”는 묘사를 연상시킨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사물을 표현하는 전통적인 영상들이다.
  그런데 두 무리가 하느님을 숭배 · 찬양하고 있는데 ‘스물 네 명의 원로’와 네 생물들이다.

② 스물 네 명의 원로
  이 인물들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성조들, 하느님께 충실했던 백성의 지도자들, 역사상으로 하느님의 경륜을 해석해 준 인물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24는 12+12이다. 즉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과 사도들의 숫자인 열 둘이 합쳐진 숫자이다. 구약교회를 상징하는 열두 부족과 신약교회를 상징하는 열 두 사도를 합한 것이다. 이들은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기저가 되는 숫자다.. 묵시 21,13-14에 새 예루살렘에서는 열 두 지파의 이름이 열 두 대문에 씌어져 있고 열 두 사도의 이름은 성벽의 주춧돌에 씌어져 있다. 열 두 부족과 열 두 사도가 천상의 도시, 새 예루살렘의 근본이 되고 주춧돌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흰옷은 구원을 상징한다. 또 금관을 쓰고 있었는데 이것은 승리를 상징하는데 이제 그들이 금관을 쓰고 있으니 그들은 분명히 승리자이다.

  ‘번개와 천둥’은 구약성서에서 전통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 수반되는 사물이다. 이것은 인간을 두려워 떨게 한다기보다 웅장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특별히 ‘번개와 천둥’은 시나이 산에서의 사건을 특징적으로 묘사해 주는 것인데 그것은 계약사상을 상기시켜 준다(탈출 19,16; 에제 1,13; 시편 77,18).
  또 “일곱 개의 횃불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시다”(5절)고 한다. 이것은 1장과 2장에 나오는 일곱 등경과는 다르다. 에제 1,13에서도 횃불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것은 하느님 어좌 앞에 자리하고 계신 성령이 당신 위격 전체로, 당신 능력 전체로 현존하신다는 것이다.

③ 네 생물
  에제 1,5-10과 이사 6,2로부터 묵시록의 저자는 영감을 받아 앞뒤가 눈들로 가득한 네 생물을 그리고 있다. 날개가 여섯이라는 것은 빠른 움직임을 표상하고 눈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은 성령의 무한한 능력과 활동을 상징한다(참조. 5,6). 에제키엘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생물들은 각각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황소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묵시록에서는 그 네 가지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만을 취하고 있다. 네 생물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우주, 세상이다. 우주의 네 가지 기본 요소를 상징한다(사자-불, 송아지-흙, 사람-물, 독수리-공기). “네 천사가 땅의 네 모퉁이에 서서 땅의 네 바람을 붙잡고 서있다”(7,1). 넷이라는 숫자는 전통적으로 우주를 지칭하는 숫자다. 에제키엘서에서 하느님의 어좌를 받치고 있는 네 생물들은 창조된 세상을 대표하는 것이다. 요한은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보고, 뒤이어 우주를 대표하는 네 생물을 보고 있다.
  네 생물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었다:
i. 민수기 2장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각 방향으로 세 지파씩 네 기를 들고 행진했는데 이 기에 네 짐승들이 있었다 한다.
ii. 예수의 네 성품을 상징한다: 사자-왕, 송아지-야훼의 종, 사람-참 인간, 독수리-하느님의 아들
iii. 교부 이레네오, 아우구스띠노 등은 네 복음사가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사자는 왕으로서 예수님을 묘사한 마르코 복음사가를, 송아지는 종으로서 예수님을 묘사한 루가 복음사가를, 사람은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묘사한 마태오 복음사가를, 독수리는 신성을 가지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묘사한 요한 복음사가를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이런 해석들은 묵시록 작가의 의도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생물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三聖誦=trishagion)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계 전체의 사명과 존재의의를 표시하고 있다. 네 마리 생물들은 찬미, 찬송을 드리면서 다른 피조물들을 그들의 합창에 끌어들이며 특히 하느님 백성의 성자들을 나타내는 스물 네 원로들도 이 노래에 합류한다는 것이다 마지막 노래는 하느님이 모든 것이시고 만사가 하느님께로부터 오며, 그분이 만사를 다스리시며 구원하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2) 어린 양에 대한 환시(5,1-14)
  묵시록 저자는 자기가 본 환시의 두 번째 장면을 5장에서 묘사한다. 5장은 창조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담겨져 있는 한 두루마리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5장에서 새로운 사물로 등장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것은 두루마리이고, 두 번째 것은 어린양이다.
  먼저 두루마리에는 안팎으로 글이 씌어 있었고 일곱 개의 봉인 찍혀 있었다. 이 이미지는 에제키엘에서 온 것이다(에제 2,9-10). 하지만 5장은 책은 에제 2,9-10과는 별개의 것이다. 차라리 10장의 환시가 에제키엘서 내용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봉인된 책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이사 29,11; 다니 12,4). 그런데 그 두루마리가 하느님의 오른손에 들려 있다고 한다. 오른손은 하느님의 힘, 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그 두루마리가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은 나타내는 것이다. 이제 관심의 촛점은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원로들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말하였다: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사자와 어린 양
  바로 직전에 언급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는 창세 49,9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표상이며, 사자의 상징적 이미지를 따서 용감하고 힘세고 반드시 싸워 이기는 전사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다윗의 후예인 사자가 곧 이어서 어린 양으로 나타난다.
  묵시록 저자는 탈출기의 파스카 희생양(12-13장)과 제 2 이사야의 야훼의 종(이사 53,7)의 표상을 빌려서 어린 양으로 등장하신 그리스도의 네 가지 모습을 소개하고 있다: i. 만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신 분(“살해된 거처럼 보이는
”), ii. 서 계시는 분(ἑστηκός, ἵστημι의 완료, 분사, 중성), iii. 일곱 뿔을 가지고 계시는 분, iv. 일곱 눈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다.
  힘센 사자에서 어린양의 형상으로 바뀐 변천이 흥미를 끌고 있다. 이 양은 똑바로 서 있고(어린양은 여러 그림에서 나타나듯이 누워 있는 모습이 아니고 네 발로 똑바로 서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곱 개의 뿔과 일곱 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서 계셨다고 소개하는 것은 승리와 부활 사상에 연계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분은 지금 ‘서 계시고’, 하늘에 서 계시며, 하느님의 어좌 한 가운데 서 계신 분으로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살해 된 것처럼 보이는” 모습을 하고 계신다. 이것은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의 수난의 표징이다.. 안병철, p.199, 참조.

  구약성서에서 뿔의 전통적 이미지는 권세와 위력이다(민수 23,22; 신명 33,17; 1열왕 22,11). 입문에서 본 바와 같이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 내지 완전함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묵시록에 보면 뿔을 가진 동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일곱 뿔을 가진 동물은 오로지 어린 양 밖에 없다. 이렇게 볼 때 어린양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하느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입고 계신 분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같은 맥락에서 일곱 눈도 하느님의 전지하심을 나타낸다(즈카 4,10).

  ”어린양“(ἀρνίον)은 요한 묵시록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그리스도께 대한 호칭이다. 28번 나온다. 어린 양, 즉 메시아이신 예수는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만인을 구원하셨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만백성의 왕이 되셨다. 예수께서 달려서 죽으신 십자가의 전능 때문에 어린양은 네 생물에게서 찬미를 받고 스물 네 명의 원로에게서 예배를 받는다.
  5장 9절 이하에서의 구속찬가는 앞의 4장 11절 이하의 창조찬가에 대한 응답인데 4장에서 성부께 드리는 경배를 5장에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 드리고 있다(1,2,3,4주간 화요일 저녁기도 찬가).
  어린양이신 예수만이 두루마리의 봉인을 떼고 펴기에 합당한 분이시다(ἄξιος εἶ). 이제 봉인(일곱)이 개봉되는 6장이 시작될 것이다. 

2. 여섯 가지 상징의 첫째 묶음 : 봉인들

  6장에서 16장은 일련의 재앙들에 대한 언급으로 되어있다.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미래에 대한 환시 부분에서 여러 가지 재양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것은 일곱들이다. 즉 일곱 봉인(6,1-8,1), 일곱 나팔(8,2-11,19), 일곱 대접(16,1-21)이다. 그런데 이 세 일곱들은 비슷한 양식으로 되어있고 재난도 비슷하다. 특징적인 것은 일곱 봉인을 뗄 때 여섯째 봉인을 떼고 나서 일곱 봉인의 개봉까지 저자는 마치 숨을 돌리려는 듯이 휴지를 두었다(7장이 들어있다). 그리고 일곱째 봉인에 대한 재난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뒤에 일곱 나팔이 나온다). 일곱 나팔도 마찬가지이다. 여섯 번째 나팔을 천사가 불고 난 후 바로 일곱 번째 나팔이 나오지 않고 10.11장이 있고 나중에 일곱 번째 나팔이 나온다. 이렇게 볼 때 일곱 봉인, 나팔, 대접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일곱 봉인  ㊞ ㊞ ㊞ ㊞ ㊞ ㊞ ㊞ ◉
                            일곱 나팔 󰁠 󰁠 󰁠 󰁠 󰁠 󰁠 󰁛
                                              일곱 대접 ◐ ◐ ◐ ◐ ◐ ◐ ◐

1) 일곱 봉인(6,1-8,1)
  일곱 봉인 이야기 중 처음 여섯 봉인은 6장에서 끝나고 다른 봉인(일곱째 봉인)은 8장에 가서 천사가 제단 불을 가득히 담은 금향로를 던졌을 때와 일곱 천사들이 차례대로 나팔을 불 때 실현된다. 일곱 봉인은 각각 떼어질 때 마다 어떤 불길한 재앙을 몰고 올 조짐을 예감케 한다. 여기서는 크게 처음 네 봉인과 다른 두 봉인(다섯째와 여섯째)을 구분해서 보겠다.

(1) 네 봉인
  어린양은 차례대로 네 봉인을 개봉한다. 하나의 봉인이 열릴 때 마다 네 생물(네 명의 보좌 천사) 중 하나가 차례대로 ”오너라“(Ἔρχου)하고 외친다. 그러면 말 탄자들이 나타난다. 이들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땅 위에서 활동하고 땅에 어떤 영향을 끼친다. 네 생물과 네 기사는 서로 4인조로 짝지어져 있다.
  처음 6장에 나오는 네 개의 봉인은 각 봉인마다 색깔이 서로 다른 말들(첫째 봉인-흰말, 둘째 봉인-붉은말, 셋째 봉인-검은말, 넷째 봉인-푸르스름한 말)이 등장하는데 이 대목은 즈카 1,7 이하의 말에 대한 환상과 즈카 6,1 이하의 병거(마차)에 대한 환상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즉 즈카 1,7-17에도 서로 다른 색깔의 말들(붉은 말 2필, 잿빛 말, 흰 말)을 탄 기마대가 나오고, 또 즈카 6,1-8에도 각각 색깔이 다른 말들이 끄는 네 대의 병거가 나오는데 첫째 병거는 붉은 말들이, 둘째 병거는 검은 말들이, 셋째 병거는 흰 말들이, 넷째 병거는 짙은 점박이 말들이 끌고 있었는데 1장의 기마대와 6장의 병거는 온 세상을 순찰할 임무를 띠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묵시록과 즈카르야서가 비슷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이점은 드러내고 있다. 즈카르야서에 나오는 말(기마대)과 병거는 세상을 순찰할 임무를 띠고 있지만 묵시록에 나오는 말들(기마대)은 세상에 공 닥칠 재앙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차라리 묵시 6장이 봉인(6개)이야기를 종합해서 보면 마르 13,7-9.24025(병행 마채 24장, 루가 21장)의 내용과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은 공관복음의 소묵시록으로 불리는 것으로서 거기서 전쟁(난리), 지진, 기근, 하늘의 불길한 징조, 그 밖의 묵시 6장에 나오는 내용들과 거의 같은 세말의 재앙 이야기들을 묵시문학적 표현으로 전하고 있다.

①흰 말을 탄자(6,1-2)
  첫째 말 탄자의 술어는 이러하다. 말은 흰색이고 기사는 활, 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오로지 승리자이며 그의 흰말을 통해 이것이 드러난다. 그의 관은 개선장군의 승리의 월계관이다. 성경에서 흰색은 ‘결백, 승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흰말을 탄자의 모습은 묵시 19,11이하에 기록된 재림하실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는 두 가지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활이요, 다른 하나는 관이다. 성경에서 활은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고(시편 45,5), 따라서 활이란 영혼을 정복하는 복음의 능력을 말한다. 이 말탄자를 통하여 표현되는 재앙은 전쟁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전쟁’이다(소규모의 전쟁으로 보기도 한다). 패전은 두 번째 말 탄자가 가져오는 재앙이다.

②붉은 말(6,3-4)-전쟁
  말의 붉은 색은 피와 피흘림을 의미한다. 그의 임무는 “땅 위에서 평화를 거두어 가는” 일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살육하도록 하는 권한’이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강자들에 의한 약자들의 살육, 강자 상호들 간의 투쟁을 말한다. 저자 시대나 오늘날에 있어서 패배한 전쟁에서 피흘림과 사형과 살인이 어떠했는지를 체험했으며 또 체험하고 있다.

③검은 말(6,5-6)-기근
  둘째 말 탄자와 같이 셋째 말 탄자도 둘째 말 탄자 뒤를 따라서 나온다. 그가 탄 말은 검은 색이었고 그는 저울을 들고 있다. 검은 색은 흉년과 배고픔을 의미하며 저울도 배고픔, 배급을 상징한다. 하루 품삯(한 데나리온)으로 밀을 사면 반 되 밖에 안되고 보리를 사면 한 되 반이라고 했으니 극심한 흉년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되” 번역한 코이닉스(κοινιξ)가 용량이 얼마냐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약 1 리터 남짓하니 200주년 번역에서는 한 코이닉스를 반 되, 세 코이닉스를 한 되 반으로 했고, 성경에서는 코이닉스를 ‘한 되’로 계산해서 한 코이닉스를 한 되, 세 코이닉스를 세 되로 번역했다. 당시의 물가로 계산하면 한 데나리온으로 12 코이닉스의 밀을, 24 코이닉스의 보리를 살 수 있었기에 그만큼의 어려운 물가고를 말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문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에는 해를 끼치지 마라”이다. 공동번역에는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는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라”라고 했다. 그 뜻을 보면 하루의 품삯으로 근근이 밀이나 보리를 살 수는 있을지언정 올리브 기름이라든지 포도주 같은 고급 음식은 살 생각지도 말라는 것이다.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는 생활의 풍요, 향락을 표시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고생을 하지만 일부 사람들은 풍요와 향락을 누린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심판은 지금 하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하겠다는 것이다(참조 야고 5,1-3). 그러나 직역을 통해서 보면 뜻은 달라진다. 밀과 보리는 일년생 농사이고 올리브나 포도는 다년생 과수 농사이니 일년생 곡물 농사는 당장 결단이 나고, 다년생 과수 농사는 그대로 계속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④푸르스름한 말(6,7-8)-죽음
 이 색깔은 죽음과 지옥(Hades)을 나타낸다. 넷째 말 탄자는 앞의  기사와는 달리 명확하게 해석되어 있다. 문제는 8ㄴ절이다. 그들은 칼, 굶주림, 흑사병, 들짐승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한을 받았다. 첫째 말 탄자가 승리자로 묘사되기는 하지만 살인자로 묘사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떤 죽음의 방식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4인조 도식을 맞추기 위해서 ‘들짐승’이라는 것을 덧붙였다. 에제 14,21과 관련이 있다(참조, 에제 5,12, ⅓의 환난을 말함; 예레 14,12-칼, 굶주림, 흑사병; 예레 15,3-네 가지 재앙; 칼, 개, 공중의 새, 땅의 짐승).

(2) 다섯째 봉인
  다섯째 봉인은 종말이 전개과정을 차라리 늦추고 있다. 이 봉인은 어떤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고 아직도 의인의 수가 채워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①순교자들의 거처는 제단 아래이다.
  그 이유는 희생 짐승들의 피가 제단 바닥에 쏟아져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은 죽임을 당한 사람들인데 앞에서 어린양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에(5,12) 그렇게 표시된다. 마태 23,35의 말대로 아벨이 하느님께 쌓았던 제단 위에서 죽었고 베레크야의 아들 즈카르야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었다는 것이 사망한 의인들이 거할 장소를 제단 아래로 줄 근거로 삼았을 것이다. 하여튼 확실한 것은 유물을 제단 아래에 보관하고 제단 아래 납골당을 둔 초기 교회의 풍습에서 이것이 나왔을 것이다.
②순교자들의 복수의 탄원
  순교자들의 복수의 외침은 시편 79를 모방한 것이다. 참조 시편 79,5; 79,10.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모순된다. 참조 루가 23,34-십자가에서의 용서. 마태 5,43-48-원수에 대한 사랑; 사도 7,60-스테파노의 용서.
③희고 긴 겉옷. 휴식, 순교자들의 수가 참
  저자는 머지 않아 순교자의 숫자가 채워지리라 대망한다. 더 심한 박해가 있으리라는 예상이다(종말론적 박해).

(3) 여섯째 봉인
  저자는 일곱째 봉인에 앞서 여섯째 봉인에서 그의 모든 목록을 다 써버린다. 그리고 차라리 일곱째 봉인에서는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 효과를 증진시킨다. 아마 6이라는 숫자는 7개로 된 계열에서 볼 때 절정을 의미한다. 여섯째 봉인은 천체와 지상의 대변동을 말하고 있다. 마태 24,29이하(마르 13,24이하)에서 예수께서도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요엘 2,30-31(공동번역 3,3-4)에서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하나의 두루마리처럼 말려있는 하늘로부터 별들이 떨어지는 것은 이사 34,4에서 에돔에 대한 하느님의 전조로 나타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폭풍을 나타낸다. 산가 섬이 하나도 없다. 섬이 움직인다는 것은 에제 26,15에서 띠로의 멸망 때문에 섬들이 떨고 있다. 15절에서 일곱 계급의 사람이 나오는데(땅의 임금, 고관, 장수, 부자, 권력가, 종, 자유인) 저자는 이 일곱 계급으로써 전 인류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심판이 사회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아무도 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높은 지위의 사람들을 먼저 열거하고 그 다음에 “종과 자유인”이란 말을 보충하여 7조 계열을 유지했다.

(4) 구원의 현시(7,1-17)
  7장은 여섯째 봉인가 일곱째 봉인 사이에 나오는 보충계시이며 일곱째 봉인 계시는 8장에서 계속될 것이다. 8장에 계속되는 일곱째 봉인의 재앙은 너무 극심할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가 나타나기 전에 누가 그것으로부터 보호받을 지를 언급한다. 즉 7장은 8장에 앞서 신자들을 위로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앞의 여섯째 봉인 끝에서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라는 물음으로 끝난다. 그래서 이제 그 해답이 주어지는 것이다.
  본문에는 많은 상징들이 나타난다. 먼저 바람인데 예레 49,36-39, 51,1등을 보면 전쟁 수단과 형벌이며 혹은 신의 현현을 뜻한다. 이 ‘바람들’에 관해서는 묵시록의 어느 대목에서도 다른 언급이 없다. 또 나무들은 바람의 잠잠함이나 폭풍우에 대한 가시적 표징으로서 성서에서 인간은 나무에 비유되므로(시편 1; 이사 10,18-19; 에제 31,3) 여기서는 여러 계급의 사람들을 말한다.

다른 한 천사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인장을 가지고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오고 있었다(7,2)
  묵시록에 보면 두 종류의 낙인이 있는데 하나는 그리스도의 적들의 추종자들에게 오른손이나 이마에 찍는 낙인이요(묵시 13,16), 다른 하나는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찍는 낙인이다(묵시 7,3). 낙인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진다. 하나는 소유권을 말하고(참조, 인호), 또 다른 하나는 소유자의 보호를 의미한다. 여기서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여기에 대한 배경은 에제 9장에 있다: 에제 9,4: “너는 저 도성 가운데로, 예루살렘 가운데로 돌아다니면서, 그 안에서 저질러지는 그 모든 역겨운 짓 때문에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이마에 표를 해 놓아라.........너희는 저 사람 뒤를 따라 도성을 돌아다니며 쳐 죽여라.... 그러나 이마에 표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묵시록의 본 대목에서도 이스라엘 12지파에서 의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각 지파마다 일만 이천 명씩 뽑혀 도합 십사만 사천 명이 이마에 도장을 받았다. 이들은 곧 닥칠 징벌에서 면제될 사람들이다.
  왜 그 천사는 해 돋는 쪽에서 오는가? 그 천사는 봉인의 운반자로서 다른 네 천사들보다 서열이 높기 때문에 그에게서 그리스도의 모상을 볼 수 있다. 이 천사는 해 돋는 쪽에서 올라옴으로써 자신이 의의 태양인 그리스도를 암시한다. 여기서 이 천사는 구원하고 보호하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낸다. 구약성서의 모본들은 이사 41,25과 말라 3,20이다.

①열두 지파
  성서에서 열두 지파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우선 요한 당대에는 12지파 백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주석가들은 12지파가 하느님 백성에 대한 유비(유추-알레고리)적인 해석이라 생각했다. 요한은 종말에 12지파 백성이 되돌아와 회복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 다음 이례적인 것은 그 목록이 루우벤이 아니고 유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메시아가 유다지파에서 나올 것이라는 유다적 대망이다(참조, 창세 40,10). 또 하나는 창세 46,8, 49장, 민수 13,4, 에제 48장, 신명 33,6이하, 1역대 2,1이하 등에서 12지파 목록을 볼 수 있는데 여러 가지 복잡한 점이 있다(참조, 박찬용 p.116이하). 여기서는 단 지파가 빠지고 그 대신 므나쎄 지파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a. 어떤 필사자가 단(ΔAN)을 잘못 보아 만(MAN)-므나쎄(MAN<AΣΣH>)의 축약어-으로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b. 단 지파에서 초기 그리스도교를 반대하는 이단이 출현하리라는 대망 때문에 므나쎄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저자 요한은 메시아가 유다지파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창세 49,10(유다에 대한 예언)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했다. 그 다음에 그는 창세 49,17에 나오는 단 지파에 관한 예언도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했다. 창세 49,17: “단은 길가의 뱀, 오솔길의 독사, 말 뒤꿈치를 물어 그 위에 탄 사람이 뒤로 떨어진다.” 이것을 창세 3,15과 연결시켰고 그리스도는 묵시 19,11이하에서 말 탄자로 나타난다. 많은 학자들이 여기에 따른다(Kraft 등).
②십사만 사천 명
  낙인을 받은 사람의 숫자는 십사만 사천 명이다. 묵시 14,1에 이 숫자가 다시 한 번 나타나며 그 이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여러 해석이 있다.
a. 유대계 전승에서 온 것이다.
b. 일반적인 해석은 하느님의 숫자 3에다 세상의 숫자 4를 곱하면 12가 된다. 완전수이다. 여기에 다시 12를 곱하니 144가 된다. 완전에 완전을 곱한 수이다. 더 할 수 없이 완전하다. 다시 완전 수 1,000을 곱한다. 이 숫자는 구원받은 모든 신자들의 수를 상징한다. 처음 12는 구약의 12지파를 의미하고, 나중의 12는 신약의 12사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1,000은 하느님께 속한 무한한 숫자를 상징한다. 그러기에 144,000의 의미는 구원을 받은 사람의 수가 무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구적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다.


3. 여섯 가지 상징의 둘째 묶음: 일곱째 봉인가 여섯 나팔을 가진 천사(8-10장)

4. 여섯 가지 상징의 셋째 묶음(11-14장)

1) 여인과 용(12장)
  일곱째 나팔, 성전의 열림(11,19)등의 종말사건의 전개과정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저자 요한은 차라리 묘사하기를 중단하고 신화적인 전역사로 돌아가 거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종말사의 세속적인 부분을 도입하는 결정적인 사건은 사탄의 몰락이다. 처음에 사탄의 몰락은 신화의 한 사건으로 시작하므로 그 시작은 시간 밖에 있다(하늘에서의 전쟁). 그러나 하느님과 사탄과의 싸움이 사탄의 몰락으로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사탄은 다시 땅위에로 내려왔고 거기서 또다시 몰락함으로써 이제 전 역사(신화)에서 역사(시간) 안에서 몰락함을 나타낸다. 메시아와 그리스도의 적들이 하느님과 사탄의 대표자로서 역사에 등장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박해하고 대적하는 중요 특징들은 12-14장에 나타나는데 그들은 용,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나온 짐승(13장), 큰 바빌론 도성(14장), 짐승의 낙인을 받은 자들(14장)이다. 연이어 나오는 환상들은 탕녀 바빌론과 두 짐승(17-19장), 끝으로 용(20장)에게서 나타날 일에 대해서 보여준다.

①하늘의 표징(12,1-4)
  묵시 12장의 첫 구절부터 저자 요한은 두 개의 표징, 즉 웅대한 빛으로 둘러싸인 한 여자와 끔찍스런 모습의 용에 대해서 말한다. 그러나 나타난 것은 표징이라기보다 하나의 실재였다.
  먼저 한 여자가 등장한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쓰고 있다(12,1).38) 이 여인은 메시아의 어머니이다.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은 교회의 이상적 모습으로서의 여인을 구세주를 낳으신 성모 마리아에게서 발견하고 있다. 그래서 성모승천대축일 미사 때 묵시 12장의 첫 부분이 제 1 독서로 읽히고 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가끔 여자들의 특징으로 비유되고 있다: “처녀 이스라엘”(아모 5,2; 예레 18,13), “딸 시온”(이사 1,8; 10,32), “딸 예루살렘”(미카 4,8; 즈카 9,9), “처녀 딸 시온, 딸 예루살렘”(2열왕 19,21; 이사 37,22). ‘한 여자가 태양을 입고’의 표현은 시편 104,2에서 볼 수 있다. 12개의 별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킨다. 이 여자는 메시아의 어머니다. 즉 박해받는 교회, 주 하느님의 백성이다. 묵시록에서 여자는 임신을 했고 해산의 고통을 겪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을 여자에 비유했을 때 가끔 분만의 고통에 관해 말한다. 이것은 뜻밖에 오는 고통들, 특히 유배와 추방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아들의 탄생에 대한 표징: 이사 7,14
-출산의 진통을 겪는 여인의 비명은 메시아의 고난 혹은 예언자의 고통을 표시한다; 이사 26,17, 미가 4,9-10
  묵시록 본문에 가장 영향을 준 구절은 이사 66,6-8이다.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붉은 용이다. 구약성서는 용, 뱀, 레비아탄을 신화적인 하느님의 적대자로 알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하느님이 그 괴물에 대해 승리할 것을 기대한다: 이사 27,1. 용이 붉다는 것도 이사 14,29에서 유래한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12-17장의 짐승에 대한 묘사는 상술한 것은 다르더라도 다니 7장의 환상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묵시 17장에서 여기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온다(17,10.12).
  다니 7장에 나오는 일곱 머리를 가진 짐승들은 그 머리들로 세상 나라를 대표하므로 머리에 왕관을 지니고 있다. 일곱과 열은 둘 다 완전을 상징하는 숫자다(1,4; 5,1; 13,1). 그러므로 이 용에 대한 묘사에서 하느님과 그의 교회를 대항하여 지상에서 투쟁을 벌이는 충만하고 완전한 세상의 힘을 보고 있다. 또 머리마다 왕관이 씌워져있는데 왕관은 군주를 상징하는 것으로써 이 세상 임금으로서의 권세를 표시한다. 머리와 뿔과 왕관의 배치에 관한 기술은 주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은 필요치 않다. 아마 묵시록의 수신인들은 이 상징은 당시 교회를 억압하고 있던 로마의 권세를 특별히 언급하는 것이라 이해했을 것이다. 용이 하늘에 있는 별들을 휩쓸어버렸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다니 8,10에서 유래한다. 그리고 하늘의 별들의 삼분의 일이 하늘에서 휩쓸려 간 것은 넷째 나팔에 의해 야기된 상황과 유사하다(8,12). 용은 장차 그를 정복할 아이의 탄생을 불가능하게 하려고 애쓴다.

②아이의 탄생(12,5-6)
  아이는 탄생하자마자 하느님에게로 올라갔다. 저자는 마치 예수께서 탄생하시자마자 승천하신 것 같이 말한다. 용은 그 아이가 장차 자기를 보좌에서 쫓아내고 그 대신 왕들의 왕이 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아이와 만나려고 애쓰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하느님이 개입하여 그 아이를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한다(참조, 마태 2장의 헤로데의 번민). 아마도 저자 요한은 그리스도는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오는 어떤 해(害)로부터 절대적으로 면제되셨다는 것과 이제 마귀의 공격의 대상은 그리스도의 교회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래서 그 여자(교회)는 광야로 도망친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지내는데 이것은 14절에 다시 반복된다. 이 표현은 다니 7,25에 나온다: “일 년, 이 년, 반년 동안”. 이것은 묵시 11,2의 ‘마흔두 달’이나 여기서의 ‘천이백육십 일’이나 12,14의 ‘삼년 반’은 같은 것이다. 이것은 묵시문학적 시간이다.
 빈들로 도망가는 여인의 도주와 그의 기적적인 섭생은 그릿 개울가에 있던 엘리야를 연상시킨다(1열왕 17,1-7). 그것은 또한 메추라기와 만나로 그 백성을 먹인 놀라운 사건(탈출 16장)을 연상케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호세 2,16-17을 회상케한다.

③용의 몰락(12,7-10ㄴ)
  저자는 여기서 무대를 하늘로 옮겨 천사들의 반역과 혼동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투쟁에 관한 설화를 이야기한다. 하느님편 사령관으로 천사 미카엘이 나타나는데 다니 10,13.21에 따르면 그는 유대 백성의 수호신이다. 전쟁에서 용은 참패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내어쫓긴다. 악마들을 나타내는 이름들의 목록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악마의 명칭들을 총괄하고 있다; 용, 악마, 사탄, 옛날의뱀. ‘옛날의 뱀’은 창세 3장과 관련이 있다. 그 용은 땅에 떨어졌지만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며 심판의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러기에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워 악마를 이겨낸”(12,11) 사람들처럼 저자는 요한 묵시록을 읽는 사람들에게 참되게 살기를 원한다. 저자는 요한 묵시록 전체를 통해 추구한 희망의 메시지를 여자와 용의 비유로 되풀이하고 있다.

④하늘의 찬양노래(10ㄴ-12)
  이 찬양노래는 11장 15절에 직접 이어진다. 여기서 메시아는 새로 태어나 하느님께로 불려 올라간 아이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에 사탄을 멸망시키고 그의 권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이 찬양노래는 순교자들을 ‘우리 형제들’이라고 부르고 있다(10절). 이 형제들은 이미 6장에서 언급된 형제들, 구약성서에 나오는 형제들이며, 또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약성서의 형제들이다. 그들은 순교자의 수를 모두 채웠고 그래서 이제는 그 어느 것도 더 이상 구원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들의 순교는 사탄에 대한 승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환성(12절)은 이사 44,23과 49,13과 관련이 있고 특히 그  환성 배후에는 시편 96,10-13이 깔려있다.
  여기서 하늘의 환성과 지상의 고통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이 구절에 의하면 사탄이 내던져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은 권세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계속 싸우도록 하기 위해 내려왔다고 한다.

⑤여인의 도주(13-18)
  여기 비유는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야기 실마리는 이제 사탄의 몰락에 관한 보도를 삽입하기 위해 중단되었던 6절로 소급된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대항하려는 마귀의 시도는 패배로 끝났고, 또한 아들(남자)-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공격도 좌절되었다. 그래서 이제 ‘여인’, 즉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그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여인’은 독수리 날개를 받아 가지고 있었기에 광야에 있는 자기처소로 피신한다. 독수리 날개는 탈출 19,4를  해석하는데 사용되었다(참조, 신명 32,11; 이사 40,13).
 이것은 성급하고도 성공적이었던 공동체의 탈출을 표현했다. 뱀이 강물처럼 물을 토해 그 여인을 휩쓸어 버리려 했지만 땅이 입을 벌려 그 강물을 마심으로써 그 여인을 구한다. 이와 관련되는 사건은 갈대바다의 통과이다. 하느님이 강물을 마르게 하신다는 것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권능과 하느님의 구원을 표현하는 드물지 않는 표현이다(시편 74,15; 이사 19,5; 42,15; 44,27; 50,2).
  용과 강물의 밀접한 관계는 에제 29,3(거대한 용)과 욥 40,25(레비아탄)에 표현되어있고 홍수로부터의 구원은 시편 32,6과 69,15에 있다.
  어쨌든 이 구절 배후에도 갈대바다의 통과에 대한 회상이 깔려있다. 분명한 것은 교회가 마귀의 분투로부터 놀라운 방법으로 심지어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보호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에 사탄(용)은 남자 아이, 즉 그리스도의 사명을 저지하려는데 실패했고 또한 하느님의 교회를 압도하려는 그의 시도가 좌절되자 그는 이제 교회의 각 지체들, 즉 그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싸우려고 한다. 즉 용은 지상의 원수들을 선택한다. 왜냐하면 초지상적 원수들에게 더 이상 해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그는 세계 역사에 개입하게 된다.

2) 두 짐승(13장)
  12장과 13장은 하나로 연결된 것이다(내용도 용과 연결된다). 12장에서 주인공처럼 나타난 것은 용인데 13장에서는 짐승이다. 특히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다. 그런데 이미 묵시 11,7에서 짐승에 관해서 언급된 바가 있다(11,7; “지하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서는 그들을 죽일 것이다”). 그것이 13장에서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해서 묵시록 저자는 교회를 박해하고 있는 로마제국과 인간(황제)을 짐승이라는 가상적 인물을 내세워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히 다니 7장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1) 바디에서 올라온 짐승(13,1-10)
  첫 번째 짐승은 바다에서 올라왔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 이 둘의 대조는 욥 40,15이하와 40,25이하에 나오는 ‘브헤못’ 거대한 바다 짐승(하마?)
과 ‘레비아탄’의 대조에서 유래된다. 다니 7,3에 의하면 짐승의 출현장소는 바다이다. 다니엘서의 이 네 짐승은 바빌론 제국, 메데스, 페르시아. 그리스를 뜻한다(7,17). 묵시문학에서 바다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다. 분명히 바다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과 함께 하느님의 피조물이지만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또 바다는 귀신(레비아탄, 용)이나 악령의 소굴로 여겨졌다 이 짐승은 겉으로 보기에는 용과 같다(뿔이 열 개, 머리는 일곱). 그러나 용과 차이점을 지니고 있다. 용은 그의 일곱 머리에 왕위를 나타내는 일곱 왕관을 지니고 있지만(12,3) 그 짐승은 열 뿔에 각각 왕관이 씌워져 있다. 일곱 머리들은 저자가 일곱이란 숫자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다니엘서의 네 짐승의 머리 수를 전부 합친 것이기도 하다(표범같이 생긴 짐승의 머리는 네 개이고 사자, 곰, 넷째 짐승의 머리는 하나다).
  묵시 17,9-10에 따르면 일곱 머리는 일곱 왕을 가리킨다. 열 뿔도 다니 7,7에서 유래한 것인데 거기에서 열 뿔은 열 왕을 가리키니 이것은 묵시 12,3에 나오는 용의 열 뿔과 관련시키는 것이 좋겠다. 다니엘서의 네 짐승들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단 한 마리에 집약되는데 관념상의 구성물이다. 그 예로 저자는 일곱 머리에 한 입(단수)이 도대체 어떻게 어울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3절에서 묵시문학의 개념을 들어 철저히 이원론적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적인 짐승은 사탄과 동일할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형상이듯이 그리스도의 적은 나름대로 그리스도의 악마적 모상으로 나타났다. 어린양이 맞아 죽은 후 부활했던 것처럼 그 짐승의 머리 가운데 하나도 치명상을 입었지만 그 짐승은 다시 소생하였다. 그 짐승을 경배하도록 자극한 기적적인 치유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필적한다.
  치명상을 입고도 소생한 이 짐승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첫 번째 머리’(머리 가운데 하나)라는 표현으로 멀리 소급해서 시이저의 암살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건이 그 후 백 년 동안 과연 흥미를 끌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네로의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이 시기에 적당한 것은 도미티아누스의 암살 사건으로 본다. 그리고 기적적인 치유는 상처를 심하게 입었던 제국의 소생으로 본다. 하여튼 인간들은 그 짐승을 미신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
로 숭배한다. 사람들은 그 짐승에게 구현된 권세를 찬양하는데(4절) 이것은 송가(찬미가)의 한 면으로 되어있다. 이 송가는 탈출 15,11의 모세의 노래에서 나온 것이다.
  이 짐승은 용에게 권세를 받아서 하느님을 모독하며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마흔두 달 동안 다스릴 권세를 가지고 있다. 참조, 다니 7,25; “일 년, 이 년, 반년 동안 그의 손에 넘겨지리라.”
  뭇백성들은 그를 따르고 숭배하고 신으로 섬기겠지만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어떤 무기도 손에 잡아서는 안되며 오직 인내와 믿음으로 박해를 극복하라고 격려한다. 저자는 13,9-10에서 예레 15,2; 43,11을 인용하면서  “사로잡혀 갈 사람은 사로잡혀 가고, 칼로 죽을 사람은 칼로 죽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참조. 마태 26,52: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2) 땅에서 올라온 짐승(13,11-18)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구약성서적 모본은 욥기 40장이다. 다른 한편 저자가 둘째 짐승을 첫째 짐승 다음에 올라오게 한 것은 나름대로 구상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저자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적대자로서 사탄과 그리스도의 적을 대립시켰다. 그런데 앞에서(11장) 두 증인과 예언자를 하느님의 편에서 싸우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그래서 이제 그 예언자는 어린양의 탈을 쓰고 있었고(참조, 마태 7,15) 인간을 움직여 타락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그 거짓 예언자는 그에게 영감을 준 사탄처럼 말한다. 그 짐승은 첫째 짐승으로부터 전권을 받았고 첫째 짐승은 사탄으로부터 위임을 받았다. 그 짐승은 기적도 하고 우상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을 정도로 큰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4장에서 십사만사천명이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아버지의 이름을 새긴 것 같이, 모든 사람들에게 오른 손이나 이마에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표시하는 숫자의 낙인을 받게 했다. 16절의 백성의 계층의 열거는 다니 3,2-3에 의존한 것이다.
  문제는 숫자 666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안병철, 묵시록 I, 367-370과 민병섭, 요한의 묵시록 166-168에 상세히 소개하고 있으나 참조하라. 이 강의록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들을 간추려 요약한다.


3) 어린양과 속량된 자들, 심판의 고지(14장)
  14장은 12-13장과 같이 일곱째 천사의 나팔과(11,15) 그 내용인 일곱 대접 재앙(16,1-21) 사이에 있는 보충계시로서 환난에서 승리한 교회의 영광과 악인의 심판을 보여준다. 저자는 앞서 7장에서 취급했던 자료로 이야기를 되돌린다. 13장의 자료는 17장에서 다시 전개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중단되고 다양한 사료들이 복잡하게 얽히는 이유는 앞의(13장) 이마에 낙인을 받은 자들과 이마에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있는 자들과 대립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을 것이다.
 
(1) 십사만 사천 명이 부르는 노래(14,1-5)
  지금까지 나타났던 하느님의 적대자들에 대해 이제는 하느님의 신봉자들이 대립하여 나타난다. 어린양은 시온산에 서있다. 시온은 묵시문학적 문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온은 부동의 산으로서 하느님 나라를 상징한다.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 설 수 있다고 했다(35,9-10). 참조. 시편 24,3-5.
  그러나 시온산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요엘 3,5의 예언이 있다. 즉 시온산은 세계 멸망을 가져오는 자연의 파국을 피할 수 있는 장소이다. 어린양과 함께 십사만사천명이 서있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다. 그 숫자는 7장의 이마에 하느님의 도장을 받은 자들에게서 비롯된다(에제 9,4에서 나온 것이다). 7장에 의하면 그것은 12지파에서 나온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 단락에서 시온산에 오를 수 있는 자격에 대해서 일곱 가지로 말하고 있다:
①그들의 이마에 어린양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씌어져있는 자(1절),
②새 노래를 부르는 자(3절). ‘새 노래’라는 말은 5,9에서 비롯된다. 거기에서는 그 새 노래를 어좌 앞에 있던 네 생물과 원로들이 부르는 반면 14,3에서는 그들이 그 노래를 듣는 자로 언급된다. 그 찬양노래가 ‘새롭다’는 까닭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아 울려나기 때문이다(시편 40,2-3). 참조, 시편 144,9.
③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 숫총각이다(4절). 문제성이 있는 구절이다.
-독신자들(동정을 지키는 자들), 실재적으로.
-마태 25,1-12의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의 비유에서 ‘처녀들’이란 신랑의 도착에 대해 준비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를 의미한다. 2코린 11,2 “사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한 남자에게, 곧 그리스도께 바치려고 그분과 약혼시켰습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 공동체 자체를 순결한 처녀에 비기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여자와 더불어 몸을 더럽힌 일이 없는 사람들, 숫총각들”의 표현은 우상숭배로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는 사람, 또는 그 행위를 뜻한다. 곧 신앙의 절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④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이들(4절), 주님을 따르는 자이다. 참조, 요한 10장.
⑤하느님과 어린양을 위한 맏물로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된 자들. 구원을 뜻한다. 또 앞으로 있을 큰 추수(14,14이하)를 의미한다.
⑥그의 입에 거짓을 찾아볼 수 없는 자. 참조, 1요한 2,22; 스바 3,13; 시편 32,3; 이사 53,9.
⑦아무런 흠이 없는 자들. 그리스도의 정결한 피로 씻긴 자를 말한다. 참조, 콜로 1,22.

(2) 심판의 고지(告知) 14,6-13
  요한 묵시록의 진행에 있어서 문제점을 어느 정도 내포한 단락이다. 아직도 재난이 남아있는데(15-16장) 종말과 심판에 대해서 말한다. 이것은 14,14-20을 심판으로 보고 6-13절은 그 고지이다. 그리고 천사는 그것을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기쁜 소식)이라고 한다. 심판의 고지에서 세 천사가 등장하는데 순서상(연대기적 순서)으로 맞지 않는 점이 있다. 즉 셋째 천사의 외치는 소리가 현재와 관련이 되어있는 반면 첫째 천사의 외치는 소리가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종말사의 정점과 관련되고, 둘째 천사의 외치는 소리가 그 중간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것도 나중에 18장에 가서야 나올 것이다(바빌론의 패망). 자연스런 순서라면 첫째 천사의 외치는 소리가 마지막에 위치하고 셋째 천사의 외치는 소리가 맨 앞에 놓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은 현재와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요한 묵시록은 강력한 종말론적 유혹에 직면하여 위협받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 기록되었다. 그래서 모든 고지와 위로는 현재와 관련되는 데서 그 정점에 달한다.

5. 여섯 가지 상징의 여섯째 묶음(19,11-22,5)

1) 새 하늘과 새 땅(21,1-27)
  앞의 긴 단락(4장-20장)에서 묵시록 저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환시를 묘사하였다. 종말론적인 심판에 대한 묘사다. 여기서 일곱 개의 봉인, 나팔, 대접을 통해서 수많은 고통과 환란이 주어졌고, 또 수많은 상징들, 예를 들면 짐승, 용, 여인, 탕녀 등을 통해서 이 세상 끝날에 주어질 환시를 나타내 보였다. 이제 마지막 두 장, 21.22장에서 저자는 희망에 찬 요소를 보여준다. 즉 그리스도 신자들이 그토록 염원해왔던 새로운 세상의 재건에 대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과 그 안에서 행복에 찬 삶을 기술하고 있다.

(1) 새 하늘과 새 땅, 새로운 세상(21,1-8)
  최후의 심판이 끝난 뒤 이제 성도들이 차지할 영원한 행복이 소개된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나는 또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21,1). 이 사상은 이사 65,17; 66,22에서 왔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는 무로부터 하느님의 새 창조인지, 옛 피조물의 갱신인지 알 수 없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저자는 완전한 새 창조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그리스어 καιος라는 단어를 쓰는데 질적으로 전혀 새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가 지금까지 보아온 세계는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부패된 세계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묵시록의 중심교리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라는 말이다. 첫 번째 창조에서 분명히 바다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었다. 그러나 악의 세력이 존재하는 곳으로 이해되었기에 더 이상 바다는 구원의 장소가 아니라 악과 위험이 존재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 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다.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은 마치 자기 남편을 위해 단장한 신부처럼 묘사되고 있다. 그 모습이 대단히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표현이다. 보통 예루살렘은 신부나 여인으로 의인화된다. 두 가지 비유적인 화법이 있는데 첫째는 예루살렘이 종말 시에 하느님을 통해서 갱신된다는 대망이고(이사 52,1), 둘째는 공동체를 하느님의 신부로 보는 호세아와 관련된 상징이다. 그런가 하면 에제 16,11-13에서는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영광으로 감싸신 예루살렘을 묘사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한 여인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이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내면생활이 나타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당신 백성들이 되게 하시어 당신 영광의 전통적인 처소인 당신의 장막 아래 한데 모아 놓으신 사람들과 함께 계신다. 하느님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눈물이라는 것에 고통의 표현이나 다른 표현들이 연결되어있다. 죽음, 슬픔, 울부짖음, 고통이 없을 것이다. 이것은 창세 3,8이하에서 아담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렸던 하느님의 친교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는 것은 이사 43,18과 65,16과 관련지워져있다.
  어좌에 앉으신 분, 곧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①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이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한다.(참조, 2코린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②이것을 기록하여라. 이 말은 확실하고 참된 말이다.
③다 이루어졌다. 이 말은 히브리어 ‘아멘’을 재해석하려는 것이고 앞의 16,17에서 나왔고(“다 되었다”) 요한 19,30에서도 나온 말이다(“다 이루어졌다”). 사실 이 말로써 계시는 끝난다. 뒤에 나오는 하늘나라에 대한 환상은 후대에 첨가한 것으로 본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을 인용함으로써 본서의 첫머리로 되돌아간다(1,8). 하느님은 역사의 근원이요 종국이시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물에 대해 시초와 종말을 부여하신다.
④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1,8에서 말씀하신 것, 22,3에서 그리스도께서 같은 말씀을 하신다.
⑤둘째 죽음에 대한 언급.

(2) 새 예루살렘의 묘사(21,9-22,5)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다. 이 부분은 17장에 상응하는 것으로 되어있고 21,2에서 언급했던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대해서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저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아주 높은 산에 올라가서 그 도시를 보았다고 한다.

①새 예루살렘의 외모(11-14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묘사하는 요소들은 새로운 것들이며 규모는 매우 큰 것을 되어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있다고 한다. 하느님의 영광은 그분 현존을 가시적으로 빛나는 모습으로 표명하고 있다(참조, 탈출 16,7-10). 이런 표현은 에제 43,2-4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에제키엘서에서 말하는 영광은 하느님의 실체를 말하지만 묵시록에서는 그 도시에 스스로 거하시는 하느님의 광채를 말한다. 그 도성은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다”고 한다. 묵시록에 등장하는 벽옥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단지 사소한 돌이 아니다. 벽옥은 푸른색을 띤 보석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대사제의 가슴받이를 만들 때 거론된다(탈출 28,20). 성서에서 푸른색은 식물이나 나뭇잎, 그리고 풀들의 색으로 활기차고 건강한 모습, 번영과 생명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영광은 진귀한 것으로 생명의 색으로 나타난다. 또 도성의 크고 높은 성벽, 열두 대문, 4방위, 열두 대문에 열두 지파의 이름이 적혀있는 것 등은 에제 48,31-35에서 기인한 것이며 특히 성벽은 에제 40,5에서 유래한다. 동시에 파수꾼으로서의 천사는 이사 62,6에서 예언되고 있다. 동서남북에 문이 3개씩 나있다는 것은 천하의 동서남북 각국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들 것을 의미한다. 그 도시는 흩어졌다가 되돌아오는 구원받은 자들이 이주해 들어오기 위해 마련된 장소이다(이사 49,12). 루가 13,29 참조. 이렇게 하늘의 도시는 흩어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사람들을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에 창세 7장의 바벨탑과 상치된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을 대적하는 인간들의 일로서 실패하고 말았지만 여기서는 하느님의 은사로 현실화된다. 이것은 하느님의 교회상이다. 4방위는 성서에서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묵시록에서는 동-북-남-서의 순서로 되어있고, 에제 42,16-17은 묵시록과 같다. 에제 48,31에서는 북-동-남-서, 이사 49,12에는 먼곳-북-서-동, 루가 13,29에는 동-서-북-남으로 되어있다.

②크기와 형태(15-21절)
  도성의 크기와 장식은 하나의 상징으로 되어있다. 도성의 길이, 넓이, 높이가 12,000 스타디온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도성은 정방형이다. 정방형은 성서적으로 완전성과 성의 균형과 성취를 의미한다(참조, 에제 48,30). 1스타디온이 185-200m이니 12,000스타디온(185/200×12,000)은 2,220~2,400㎞나 된다. 엄청난 크기다. 우리나라의 수십만 배가 된다. 이 안에 살 수 있는 인구는 530억이나 된다. 아마 묵시록 저자는 바빌론 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바빌론성의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120스타디온이었다고 하니 묵시록 저자는 새 예루살렘의 크기를 바빌론의 백만 배(100×100×100)로 확대하고 있다. 성서적으로 볼 때 4×3=12×1,000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성벽의 치수도 엄청나다. 성벽의 치수가 144 페퀴스(공동번역에는 척)이다. 한 페퀴스가 사람 팔뚝의 길이, 45-50㎝이니 성벽의 높이가 65-70m이다. 144는 144,000을 1,000분의 1로 축소한 것으로 이는 144,000을 보호하는 성이라는 뜻이다. 144=12×12. 18절 이하에서는 밖에서 본 이 도성의 호화찬란한 전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유다인들은 예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예루살렘이 시야에 들어오면 항상 감탄했었다.
  열두 개의 진귀한 보석들이 언급되지만 그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표명되고 있지 않다. 열두 개의 보석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탈출 28,17-20에서 제공해주는 대사제의 가슴받이에 관한 묘사 내용과 어느 정도 연관을 맺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묵시록 저자는 열두 개의 보석으로 전(全)이스라엘을 표상했던 대사제의 가슴받이를 모델로 사용함으로써 땅과 바위에서 끄집어낸 가장 값진 것들로 새로운 도성을 장식하려했었고, 그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보석들을 모아 도성을 꾸민 것은 그 도성에 대한 최고의 명예를 표명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단락 마지막에서(22절) 묵시록 저자는 도성 안에 성전을 볼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묵시문학은 예루살렘의 재건과 함께 성전의 재건을 기다려왔었다. 하지만 여기서 묵시록 저자는 새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 성전의 없었다고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종말론적인 희망이 유다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성서에서도 성전 및 성전 제의에 대한 적대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이사 66,1. 저자의 의도를 보면 21,3에서 본 바와 같이 하느님께서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 현존하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을 만나고자 하시는 그분의 뜻을 상징하고 의미하는 건물의 도움을 더 이상 받을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하느님과 어린양이 성전이시기 때문에 다른 성전이 필요없다는 것이다(요한 2,19-21; 4,23).

③성안에서의 생활(21,22-27)
  성안에서의 생활은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드러낸다. 대부분 이사 60,1-11의 예언을 반복한다. 영광과 빛이 이 부분을 지배하는 핵심적 용어다.
 23절-이사 24,23과 60,19; 24절-이사 60,3.11; 25절-이사 60,11ㄱ; 26절-이사 60,11ㄴ; 27절-이사 35,8; 52,1.(참조 에제 44,9).

④새 도성의 복락(22,1-5)
  여기서 묘사해주는 내용은 에제 47,1-12(종말론적 성전으로부터 물이 솟구쳐나와 사막으로 흘러내려 사해로 흘러들어가며, 기적적으로 나무들을 자라게 한다는 내용)과 창세 2,8-10(에덴 동산, 온갖 나무들이 돋아나고 거기서 강 하나가 흘러나와 그 동산을 적신 다음 네 줄기로 갈라졌다는 내용)으로부터 동시에 영감을 받은 것이다. ‘수정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라고 언급한다. 생명수는 초대교회에서는 ‘성세수’를 의미했고(디다케 7,1-2) 요한 7,38에서도 ‘샘솟는 생명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에 대해서 언급한다. 창세 2,9의 낙원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와 에제 47,12의 강 양편에 있는 나무들의 표상을 합친 것이다. 낙원의  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달마다 맺지만 에제키엘서의 나무들은 매달 새 열매를 맺어서 그 열매들은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중단없는 경신례가 언급되는데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고 앞의 반복이다. 단지 특이한 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뵈옵는다는 것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누구도 하느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죽기 전에 아무도 뵈올 수 없었던 하느님의 얼굴을 뵈옵는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향한 직접적인 관조는 이미 구약성서적 희망이며(시편 42,2), 신약성서적인 구원의 대망이다(1코린 13,12; 2코린 3,18이하).

결문(맺는 말 22,6-21)
  저자는 먼저 본서의 가치에 대해서 첨명하면서(6절: “이 말씀은 확실하고 참된 말씀이다”) 자신이 요한이라는 것을 다시 밝히고 있다(1,1; 4,9). 마치 다니 12,5과 유사하게 본서의 끝에서 자기 이름을 밝힌다. 동시에 저자는 시간의 촉박성을 강조한다. ‘오십시오’, ‘곧 간다’를 여러 번 반복하면서  “이 책에 기록된 예언 말씀을 봉인하지 마라. 그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22,10)라고 한다. 요한에게 내렸던 이 명령은 구약의 다니엘에게 내렸던 명령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다니 8,26; 12,4). 묵시록의 경우에는 다니엘이래로 기대되어온 마지막 때가 꽉찼다고 보고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당시 성찬식 때 드리던 기도-‘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를 드리면서 1,4-5에서와 같이 주 예수의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간구하면서 본서를 끝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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