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티아서
1. 갈라티아 지역
‘갈라티아인’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 옛 골(Gaul)과 켈트(Keltai)족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을 그리스 말로 ‘갈라티아인’이라고 불렀다. 기원전 3세기 초에 그들은 이탈리아 북쪽, 유고슬라비아, 불가리아 지역을 지나 동쪽으로 이주하였다. 켈트족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지금의 터키 북부, 앙카라 부근(아나톨리나 평원의 중부지역, 안키라, 페씨누스 및 타비움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이주를 따라 그 지방을 갈라티아라고 불렀다.(북부지방) 세월이 지나면서 그들은 점차 그리스문화에 동화되었고 기원전 25년에는 갈라티아의 마지막 왕인 아민하스가 자기의 영토를 로마에 귀속시켰다. 그 때부터 로마의 속국이 된 것이다.
로마 제국은 그들의 본래 영토 이외에도 비시디아, 이사우리아, 리가오니아와 프리기아의 일부를 병합하여 갈라티아 주를 만들었고 수도를 안키라에 두었다.(남부지방,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 그 이후에도 이 주의 경계, 범위(면적), 소속 도시 등이 계속 바뀌었고 아무런 공식적인 이름도 갖지 못했다. 단지 로마 황제 시대의 저술가들(따치뚜스, 플리니우스 등)에 가끔 이 이름을 사용할 뿐이었다.
2. 수신인
갈라티아서를 쓴 당시에 갈라티아에는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여러 교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의 설립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 바오로는 갈라티아서의 수신인들을 막연하게 ‘갈라티아의 교회들’(1,2) 또는 ‘갈라티아인들’(3,1)이라고만 하기에 정확한 수신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바오로와는 언제부터 관련이 있었던가? 사도행전에 따르면 사도 바오로는 제 1, 2, 3 차 전도여행 때 항상 갈라티아 지방(넓은 의미로)을 지나쳤다. 제 1 차 전도여행(45-49년) 중에 그는 갈라티아 주의 남부지방인 피시디아, 리카오니아와 프리기아에서 복음을 전하였고 그 때에 안티오키아, 리스트라, 데르베 및 이코니온 교회를 세웠다.(13,14-14,25) 그러나 그 때에는 갈라티아라는 말이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다.
제 2 차 전도여행 때에(50-52년) 바오로의 일행은 ‘갈라티아 지방을 두루 다녔다.’ (16,6)고 되어있고 제 3 차 전도여행 때(53-58년) 시작에도 ‘갈라티아 지방을 거쳐가면서 모든 제자들을 굳세게 하였다.’(18,23)고 되어있다.
사도행전의 언급과는 달리 갈라티아서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두 번째 선교여행 시 바오로는 “육신의 병이 계기가 되어“(δι’ἀσθένειαν τής σαρκός) 갈라티아인들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하였다.(4,13) 즉 사도는 어떤 병 때문에 갈라티아에 오래 머물게 되었고 이 기회에도 그는 거기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그 때 갈라티아인들은 바오로를 따뜻이 영접했고, 바오로는 그 일을 애정에 찬 마음으로 기억한다.(4,12-15)
바오로는 사도 18,23에서 언급한 그의 두 번째 방문(갈라 4,13)후에 이 편지를 썼으며 아마도 57년 늦가을 마케도니아에서 쓴 것 같다.
3. 집필동기
제 3 차 전도여행(53-58년경) 초기에 바오로는 갈라티아 교회를 둘러 본 다음 에페소에 내려온 지 얼마 안 되어 갈라티아 교회들로부터 불길한 소식을 들었다.
갈라티아 교회에 떠돌이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바오로와 바오로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갈라티아 교회를 혼란에 빠트렸던 것이다.(코린토 2서처럼)
갈라티아 교회를 소란케하는 선동자 즉 바오로의 적들은 과연 누구이며, 또 이들이 무슨 일을 했던가를 규명하는 길은 쉽지 않다. 하지만 몇몇 본문을 토대로 이들의 정체를 추측해 볼 수 있겠다.
① 이들은 이방 신도들에게 모세의 율법(3,2; 4,21; 5,4) 그 중에서도 할례를 강요하는 자들이었다.(5,2-3; 6,12-13) 또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가치를 부인하고 그와는 다른 복음을 전한 자들이며(1,6), 이와 관련하여 신도들과 바오로 사이를 이간시키는 자들이었다.(4,7; 6,12)
② 이들이 개인이었느냐 혹은 집단이었느냐? 또 유다인이었느냐, 혹은 비유다인이었느냐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그들이 유다 율법준수를 고집한 것을 볼 때 율법에 충실한 유다계 신도들이었던 것 같다. 또 이들은 개인이라기보다는 집단이었으며 예루살렘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만일 관계를 가졌다면 그들이 접촉한 인물들은 분명히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같은 교회의 기둥들(유력한 사람들)에 속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③ 이들의 주장은 무엇이었는가?
바오로는 ‘교회의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가르쳤다. 이들은 바오로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갈라티아의 이방 신도들도 유다인의 율법을 완전히 준수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기하신 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굳이 유다인이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5,2-3; 6,12) 인간은 신앙으로가 아니라 할례와 율법준수로써 의화된다.(2,15-16; 3,12) 또 유다인들의 월력을 지켜야 하며(4,10), 유다 풍습을 따라 살아야 한다(2,19)고 주장했다.
또 갈라티아인들이 바오로를 대단히 존경하는 것을 보고(4,14-15) 바오로의 약점을 찾아 공격했다. 바오로는 예수님을 직접 본 적도 없고 접촉한 적도 없다. 그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같은 대사도들과는 달리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되지 않았고-따라서 사도도 아니고- 다만 사도들의 심부름꾼에 불과하다고 했다.(1,11-12)
이들의 선동 때문에 갈라티아 신도들은 매우 동요되고 혼란에 빠졌다. 바오로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데 있어서 주저하는 등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1,6; 3,1-2)
누가 이런 소식들을 바오로에게 전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을 전해들은 바오로는 즉각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됨을 알았다. 마음 같아선 갈라티아로 바로 달려갔으면 좋겠지만(4,20) 이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편지를 쓰게 되었다.
바오로는 이 문제를 단지 갈라티아 교회에 국한시키지 않고 새로 탄생한 교회들의 전반적인 문제로 보았다.
이 편지는 어떠한 환경이나 시기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경고이며, 그들의 행위가 과연 복음정신에 부합하는가를 묻는다.
바오로는 반대자들의 오류를 꺾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문제, 복음의 진리에 대해 진술한다. 바오로는 반대자들을 신랄하게 공격한다. 그들을 가리켜 ‘혼란케 하는 자들’(1, 7), ‘선동하는 자들’(5,12) 이라고 하면서 할례를 갖고 자랑하는 무리를 ‘스스로 거세해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지독히 비꼬는 말을 한다.(5,12) 바오로는 대단히 격앙되어서 유다계 그리스도 신자들을 사정없이 공격하고, 또한 갈라티아의 신자들이 그처럼 빨리 바오로의 가르침을 버리다시피 하고 다른 복음에 귀를 기울인 것을 책망한다.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 이처럼 분노와 정열을 담고 있는 것은 없다. 이 편지 안에 편지 서두의 감사나 인사나 마지막 인사가 없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 편지에서 갈라티아 신자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그 때문에 고심하는지 역력히 나타난다.
4. 구성
갈라티아서는 편지 양식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A. 도입양식 : 1,1-5
B. 감사 부분 : 나오지 않음
C. 몸말 : 1,6-6,10
1) 1,6-2,10 :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
① 1,6-10 : 도입부
② 1,11-12 : 주제제안
③ 1,13-2,14 : 논증
a. 1,13-1,24 : 바오로의 회심
b. 2,1-10 : 예루살렘 사도 회의
2) 믿음과 율법에 관한 논쟁
① 2,11-21 : 상황서술(Narratio)
a. 2,11-14 : 안티오키아 논쟁
b. 2,15-21 : 바오로의 복음
② 3,1-4,31 : 여섯 번에 걸친 논증
a. 3,1-5 : 첫 번째 논증
b. 3,6-14 : 두 번째 논증
c. 3,15-25 : 세 번째 논증
d. 3,26-4,11 : 네 번째 논증
e. 4,12-20 : 다섯 번째 논증
f. 4,21-31 : 여섯 번째 논증
3) 5,1-6,10 : 여러 가지 훈화
① 5,1-12 :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라
② 5,13-26 : 육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라
③ 6,1-6,10 :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라
D. 마침양식 : 결론(peroratio) : 6,11-18
5. 내용
A. 도입 양식 (1,1-5)
- 인사 부분에서 이미 두 가지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① 바오로의 사도성
②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으로 구원됨
- 감사 부분 : 감사 부분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바로 몸말에서 갈라티아인들을 질책하며 논증을 시작한다.
1데살과는 달리 바오로는 자신을 인간이 파견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파견 받은 사도로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다른 편지와는 달린 “어떤 이를 통해서도 파견된 것이 아니라”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갈라티아 공동체에서 바오로의 사도성에 대하여, 곧 그가 전한 복음의 가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고, 이 점에 대하여는 1,6이하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이어서 바오로는 인사를 하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구원하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이었다. 그리고 이점에 대하여 2,15이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도입 양식 이후에 바오로는 감사 양식을 생략하고 즉시 편지의 몸말로 바로 넘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가 갈라티아 교회의 상황에 대해 아주 분개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 번역 성경에서는 “나 바오로”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그냥 “바오로”라고 표현되어 있으며 화가 난 바오로의 이미지를 첨가하기 위하여 번역가가 의도적으로 “나”라는 용어를 삽입한 듯 하다.
C. 몸말 (1,6-6,10)
1) 1,6-2,10 :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호
바오로의 반대자들은 바오로의 사도직 자체를 문제로 삼았다. 즉 바오로는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열 두 제자단에 끼인 자도 아니기에 참 사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가 전하는 복음은 진짜 복음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그의 사도직과 복음은 어느 사람으로부터 받은 게 아니라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받았음을 밝힌다. 그래서 1,1부터 ”사람들에게서도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파견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 파견된 사도인 나 바오로“라고 거창하게 밝히고 있다. 그래서 바오로는 처음 1-2장을 할애하며 자신의 자세한 내력을 밝힌다. 그리하여 이 두 장은 바오로의 생애를 아는 데에 매우 귀중한 사료이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전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쓴 것이기 때문에 정확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1) 1,6-10 : 도입부
- 감사 부분 대신에 질책이 등장함
- 지금 다루고자 하는 이슈, 반대자, 그 이슈가 지닌 심각성에 대해서 다룸
- 여기서 이슈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하는 이들을 따라 갈라디아인 들이 돌아선 것.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 시킨 이들의 내용은 2,11 이후에 등장함
아주 실망적인 어조로 날카롭게 다루고자 하는 이슈, 그리고 반대자들, 또 상황의 심각성을 언급한다. 야고보로 대표되는,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치는 이들(2,15-21)이 갈라디아에 와서 바오로가 가르친 것과 다른 가르침을 가르치며 사람들에게 할례와 율법을 가르치자,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바오로는 예수를 직접 만난 제자가 아니고, 그가 전하는 복음도 유효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 듯하다. 뿐만 아니라 바오로는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인기를 얻으려고 지키기 어려운 율법 등을 무시한다는 소문을 낸 듯하다. 이에 대해 바오로는 인사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며, 자신이 받은 복음은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며, 이 외에 다른 복음은 있지도 않다고 설파한다. 그리고 그와 다른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을 옭아매어 율법에 매이게 하는 이들은 오히려 저주를 받으라고 이야기 한다. 감사 부분 대신 저주 부분이 등장하는 점은 갈라디아서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하겠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가 얼마나 격해 있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1,11-12 : 주제제안
- 자신이 받은 복음이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 라는 주제를 말함. 이것이 증명되면 그의 사도성도 증명됨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점은 바오로가 이 편지에서 법정 변론 때 사용하는 수사학적인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먼저 법정에 들어서 있다고 상상해 본다면 갈라디아에 와서 바오로와 다른 복음을 설파한 이들은 고소인일 것이고 바오로는 피고인으로서 재판관인 갈라디아 교인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1,6-10에서 이미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1,11-12에서 바오로는 앞으로 자신이 구체적으로 반론하고자 하는 주제를 제시한다. 앞에서 살펴 본 것 처럼 구체적으로 변론하거나 증언하기 위해 주제를 밝히는 것을 ‘주제제안’(propositio)이라고 한다. 여기서 바오로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받은 것이라는 점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다음 단락에서 자신의 체험과 연관시켜서 밝히게 될 것이다.
(3) 1,13-2,10 : 논증
바오로가 어떻게 사도직을 받게 되었는지 그 상황을 서술(narratio)함으로써 자신의 사도성의 정당성을 옹호함
① 1,13-24 : 바오로의 회심
이를 통해 자신의 사도성이 예루살렘 사도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계시에 근거함을 밝힘
바오로는 자신의 편지에서 좀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의 급선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에 관한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그는 그가 전한 복음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신의 과거사, 즉 회심 전의 생활과 회심 후의 생활을 들려준다. 그러면서 그의 사도직이 어느 인간 특히 예루살렘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자립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② 2,1-10 : 예루살렘 사도 회의
사도 15,1-21에서도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나오는데 갈라티아서와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입문 부분에서 이미 살펴 본 바가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어쨌든 이를 통해서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전교할 권한이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오히려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기로 한 유다계 지도자들이 괜히 사람을 보내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대한 불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듯 하다.
2) 2,11-5,12 : 믿음과 율법에 관한 논쟁
(1) 2,11-21 : 상황서술
현재 다루게 될 문제에 관해서 소개하고 있다.
① 2,11-14 : 안티오키아 논쟁
신앙과 율법에 대한 논쟁에 관해 다루기 전에 베드로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두 번째 논쟁 주제를 꺼냄. 여기서 바오로는 안티오키아에 와서 자신과 반대자가 된 이들에 대해 언급함. 바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 이를 통해서 갈라티아에서 활동하던 유다계 그리스도교 설교자들과의 대화를 시작한다.
갈라 2,1-10에서 바오로는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한 것과 그 결의 사항을 기술하고 나서 안티오키아에서 있었던 논쟁사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사건인즉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가 있은 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다. 당시 그 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다인들이었고,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같이 모여 음식을 나누었다. 여기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도 두 부류의 신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곤 했는데, 마침 예루살렘에서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거기로 오자 베드로는 그들을 두려워 한 나머지 이방인 신자들과 교제를 끊었다. 이런 영향을 받아 유다계 신자들과 바르나바까지도 이방계 신자들과 교제를 끊었다. 말하자면 베드로 때문에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던 것이다. 바오로는 이러한 베드로의 행동이 매우 위험스러운 것임을 알고 분명히 일어서서 그 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4). 곧 유다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서는 안된다는 율법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즉 이방계 신자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회의의 규정에 따라 바오로는 교회일치의 논리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안티오키아 이 사건은 그 내용으로 보아서 사도회의 이전의 사건이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서 바오로가 결코 베드로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그의 권위에 대한 가장 힘찬 인정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케파’(바위)는 복음을 가르침 위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하며 그 가르침과는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형제들을 잘못 인도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볼 때 예루살렘 사도회의와 안티오키아 논쟁은 초대 교회의 역사 중 교회의 획을 긋는 중대한 두 사건이다. 이 두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명실 공히 유다교의 틀에서 해방되었으며 동시에 유다인만의, 유다인 중심의 교회에서 모든 이의 교회, 진정한 의미의 가톨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② 2,15-21 : 바오로의 복음
“우리는 본디 유다인이므로 율법을 안다. 그러나 또한 우리는 율법에 따른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찾으면서 우리 모든 유대인들 자신도 죄인임을 우리는 발견하였다. 그래서 나는 율법에 죽었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었고 지금은 내 안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되었다.”
이 단락에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화된다. “그러나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2,16) 로마 3,28에서도 역시 같은 구절이 있다: “사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어쨌든 이 주제는 갈라티아서에서 아주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아마도 초대 교회 때 이 주제로 많은 논쟁이 있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점은 야고보서 2장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4QMMT(p.209)에서도 이점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꿈란 공동체는 바오로와는 달리 “우리는 네 백성이 율법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그것은 너에게 의로운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네가 그분 앞에서 정직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에 말이다”라고 말한다. 곧 꿈란에서는 의로움이 율법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오로의 적대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루터에게 종교개혁의 싹을 길러준 책은 로마서였지만, 갈라티아서도 그에게 무척이나 소중했다. 이 두 서간, 특별히 직전에 본 이 두 단락이 루터의 중심사상인 오직 신앙(sola fide)을 통한 의화를 부르짖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여기서 또한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은총(sola gratia)을 통한 의화 사상의 발판으로 삼았다. 20-21절은 갈라티아서의 중심테마이며 특히 20절은 바오로뿐 아니라 전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생활의 최고 목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표현과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애쓰는 우리 자신”이라는 표현을 다루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안에 사는 그리스도”라는 두 가지 상반된 개념이 서로 공존을 한다. 먼저 바오로는 17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고 애쓴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의롭게 된다”는 것을 뜻 한다.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온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변화의 결과로 “이제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갈라 4,19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모습을 갖추실 때까지 나는 다시 산고를 겪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1데살 2,13은 “하느님의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라고 전한다. 곧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죄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게 되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바오로는 자신이 여전히 육신을 지노고 살아간다는 점을 인정한다(2,20). 그러나 이제 바오로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으로써(2,17) 자신의 의로움을 지켜나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2,21)으로 주어진 것이다.
(2) 3,1-4,31 : 여섯 번에 걸친 논증
갈라 3-5장은 로마 1-8에서 더 심오하게 다루고 있다. 갈라 3-5장의 의화 문제는 로마 1-3장에서, 갈라 3장의 아브라함의 믿음과 축복의 약속을 로마 4장에서, 갈라 3-5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로마 5-8장에서 다시 볼 수 있다. 또 갈라 5-6의 훈화부분(그리스도인 생활에 대한 권고)은 로마 12-15장에서 다시 보게 된다.
① 3,1-5 : 첫 번째 논증 :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바오로는 매우 강한 감정적 어조로 첫 번째 논증을 시작하고 있다. : “아, 어리석은 갈라티아 사람들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으로 여러분의 눈앞에 생생하게 새겨져 있는데, 누가 여러분을 호렸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율법에 따른 행위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까? 여러분은 그렇게도 어리석습니까? 성령으로 시작하고서는 육으로 마칠 셈입니까?”. 바오로가 주장하는 것은 갈라티아인들이 성령의 은혜를 입은 것은 복음과 신앙에 의해서이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바오로는 “의롭게 되다”라는 표현 대신 “성령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변화시켜주는 힘이며 그 삶을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이끌어주는 힘이다. 바오로가 볼 때 율법은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했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지도 못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행위가 시작된 것이다.
② 3,6-14 : 두 번째 논증 : 아버라함의 믿음
이 주제는 유다인들이 종종 사용하던 주제들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주제는 창세 15,6에서 “아브라함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라는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아브라함은 할례 전에(창세 17,10,14) 이미 모든 민족들이 아브라함 안에서 축복받으리라는 약속을 받는다(창세 12,3). 여기에 착안하여 바오로는 아브라함의 할례(창세 17,10.14)를 주장하는 설교자들에 반대해서 하느님의 약속(창세 12,3)은 할례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것임을 밝힌다. 따라서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을 통하여 성령이 주어짐으로써 하느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움으로 인정하였다”(창세 15,6)는 말처럼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셨다. 바오로가 자신의 논조를 전개하는데 사용한 방식은 꿈란이 성서를 해석하는데 주로 사용하던 “페셔 방식”임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예언서와 성문서들 역시 사용하는 방식인데 현재 공동체에 필요한 것들이나 중요한 문제를 해설하고 설명하는데 구약성경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약성경의 내용은 결국 현재 공동체의 사건과 역사를 다루는 것임을 밝히고자 한다. 꿈란 공동체와 그리스도교는 현재 우리는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특별히 공동체에 경고를 하기 위해 적혀 있다고 본다. 흥미로운 점은 꿈란 공동체에서는 이 마지막 시대와 관련된 모든 해석의 새로운 열쇠를 “의로움의 스승”이 쥐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스승이 오기를 기다리지만 바오로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 해석의 열쇠를 지고 있으며 구약의 모든 말씀은 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이것은 1고린 10,1-13에서 더욱 분명하게 찾아 볼 수 있다.
다음의 논증에서도 중요한 주제로 등장하는 것처럼 바오로는 필립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아브라함의 예를 자주 사용한다. 특별히 15,6의 구절, 곧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다”는 구절을 종종 사용하면서 창세기와 율법에 대한 나름의 주석을 한다. 로마 4,1이하에서는 이 주제를 다윗에게 까지 확장하여 다윗도 하느님께서 행위와는 상관없이 의로움을 인정해 주시는 사람의 행복을 노래한다고 전한다. “행복하여라. 불법을 용서받고 죄고 덮인 사람.” 그러면 왜 바오로는 아브라함을 자주 인용하는 것일까?
꿈란 공동체의 다마스커스 문헌 CD III 2(3권 p. 285)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브라함은...하느님의 규정들을 지키고 자기 영의 욕망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친구로 여겨지게 되었다.” 흥미롭게 야고 2,21-23은 창세 17장을 다루면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단에 바칠 때에 실천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도 보다시피, 믿음이 그의 실천과 함께 작용하였고, 실천으로 그의 믿음이 완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그것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는 성경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어찌보면 야고보서의 견해가 꿈란 문헌의 생각과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바오로는 로마 4장과 이곳 갈라 3장에서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았음을 분명하게 밝힌다. 그러면서 그는 앞에서 살펴 본 것 처럼 창세 12,1-3과 15,1을 인용한다.
③ 3,15-25 : 세 번째 논증 : 이미 확증된 뜻은 후대의 첨가로 결코 취소될 수 없다. 율법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보다 430년 뒤에 주어진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인해 우리가 누리게 된 상속이 어떻게 율법을 지키는 것에 의존할 수가 있겠는가? 율법은 그리스도가 우기 전까지 일시적인 관리자에 불과했다.
④ 3,26-4,11 : 네 번째 논증 : 세상의 정령들 아래서 종살이하던 갈라디아 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에 의해 속량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어서 하느님의 아들들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도 왜 다시금 율법의 요구에 종살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⑤ 4,12-20 : 다섯 번째 논증 : 처음에 갈라디아인들은 바오로를 천사처럼 극진히 대우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설교자들의 말을 듣고 그를 원수처럼 대할 수 있는가?
⑥ 4,21-31 : 여섯 번째 논증 : 설교가들은 아브라함, 하가르, 사라를 끌어들여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가르침을 주었다. 여종인 하가르는 이방인들의 후손들을 가르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지상의 예루살렘, 곧 시나이 산에서 받은 율법의 계약에 종살이 하는 이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자유의 여인 사라는 천상 예루살렘, 곧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이라는 계약을 의미한다. 곧 사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모든 이들의 어머니이다.
3) 여러 가지 훈화 (5,13-6,10)
(1) 5,1-12 :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라
5,6에서 바오로는 매우 중요한 단언을 한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오로가 할례나 율법을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이 이방인들에게 의화를 가져다 주는 힘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또한 바오로는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의 결과를 받아들이려는 믿음은 신앙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율법”은 시나이의 율법이 아니라 서로 서로의 짐을 지어주는(6,2) 사랑이다.
(2) 5,13-26 : 육에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라
그리스도인에 있어 참된 자유는 육체의 욕정에 따르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봉사하기 위한 자유라고 하면서 성령과 욕정의 상반되는 현상을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
-욕정의 열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
-성령의 열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
(3) 6,1-6,10 :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라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법은 생명을 주는 성령의 법이며, 이웃에 대한 사랑의 법이다. 따라서 신자들의 새 생활을 영위하는 기본적인 요소이다. 6,7이후부터는 욕정과 성령의 열매를 설명한 뒤 종합하여 결론을 내린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 자기의 육에 뿌리는 사람은 육에서 멸망을 거두고, 성령에게 뿌리는 사람은 성령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6,8)
D. 마침양식 : 결말 : 6,11-18
여기서 바오로는 결론을 맺으면서 전체적인 요약을 하며 앞의 주제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것을 수사학적으로 결말(Peroratio)이라고 한다. 이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오로가 다룬 주제를 기억에 새기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약 설교자들이 이스라엘의 우월성을 찬양했다면 바오로는 “하느님의 이스라엘”, 곧 할례받은 자나 아닌 자나 모두 똑같은 그 이스라엘을 주장한다. 그리고는 앞으로 아무도 자신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낙인”을 몸에 지니고 있다고 말하면서 할례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에둘러 비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