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록: 마카베오기 역사적 배경
헬레니즘 시대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더 대왕이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사망하자 그 부하 장군들이 제국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 중 이집트의 프톨로마이오스 왕조와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가 막강했다. 알렉산더의 장군이었던 셀레오코스는 기원전 312년 알렉산더의 제국 가운데 동부 지역인 시리아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고, 기원전 301년에는 지금 터키 지방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를 건설해 수도로 삼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땅은 이집트 왕조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페르시아의 행정 조직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페르시아 시대 때와 마찬가지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는데, 대사제는 이집트 임금에게 공물을 바칠 책임을 지게 됨으로써 점차 세속 군주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처음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유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유다인들은 평화로운 시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는 동안 이집트의 유다인 수는 크게 증가했다. 당시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는 흩어져 살던 유다인들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무렵 팔레스티나 밖에 사는 유다인들이 본토에 살고 있는 유다인들보다 훨씬 많았음이 틀림없다(디아스포라 상태). 그리고 이집트의 유다인들은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채택했기 때문에 유다인들 상당수는 히브리어로 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B.C. 3세기에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착수되었고, 이렇게 해서 탄생한 칠십인역 그리스어 성경은 이후 유다교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신약성경 저자들, 바오로 사도는 이 성경에서 구약성경 구절들을 인용한다).
그런데 안티오코스 3세(Antiochus III, B.C. 223-187)가 셀레우코스의 왕위에 오르고 왕국이 안정을 찾게 되자, 그는 이집트를 몰아내고 팔레스티나를 자신의 제국으로 병합한다. 유다인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에 따르면 유다인들이 이 이러한 변화를 반기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인데, 그가 유다의 난민들을 귀환시켰으며, 포로를 석방해 주었고, 또 예루살렘의 세금도 면세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 때에도 역시 유다인들은 이전 시대와 같은 특권과 지위를 누렸으며, 율법에 따라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고, 제의에 대한 지원도 약속 받았다. 또한 성전 수리도 국가의 도움으로 완료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그리스 문화에 젖어들게 된 유다인들은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급속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디아스포라 상태에 있던 유다인들을 중심으로 유다 사회 안에 헬레니즘 문화가 급속도로 확산되어 갔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던 지배 계층의 유다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스식 문화와 사고방식에 흡수되지 않으려 했던 경건한 유다인들도 있었기 때문에 유다인 공동체는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대개 이 시기를 즈음해서 유다교 내에 지혜문학이 확고히 자리잡은 것으로 보는데, 지혜문학에 관해서는 강의록 마지막 부분에 조금 더 설명해 두었다.
3. 안티오쿠스 4세와 마카베오 전쟁
로마 제국이 점점 부강해 진 뒤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셀레우코스는 사양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를 이어 등극한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Epiphanes, B.C. 175-163)는 이집트와 로마에서 오는 외부적인 위협과 동부 지역의 반란 등과 같은 내부적인 혼란을 제거하기 위해서 제국 전체를 정치적으로 통일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제우스와 그리스의 만신들을 숭배하는 정책을 펼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유다인들을 큰 혼란에 빠뜨리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미 헬레니즘 문화에 젖어들었던 유다인들이 많았는데, 이제 그 문화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지가 문제의 초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예루살렘은 이미 여러 갈레를 갈라져서 대사제직을 두고 암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사제가 이미 세속 군주와 같은 정도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실에 돈을 받치고 비위를 맞춰 대사제직을 얻고자 했고, 또 안티오쿠스 역시도 자신에게 협력하는 이들에게만 대사제직을 내어 줌으로써 그동안 인정받아 왔던 종교적 자유는 크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사제 오니아스 3세를 밀어내고 대사제가 된 야손이라는 인물은 본격적으로 헬레니즘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는데(2마카 7-22),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경기장을 건립하여 여러 운동 경기를 장려하기 까지 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팔레스티인에는 그리스식 복장이 유행하였고, 유다인들은 나체로 운동 경기에 참여했기 때문에 할레 자국을 거북하게 여기고 이를 숨기려고 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경기에 나서기 위해서 헤라클레스와 헤르메스 등 그리스 신을 인정하기도 했다. 경건하고 보수적인 유다인들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명백한 배교 행위에 해당되었다. 대사제 야손은 3년도 못되어 메넬라오스에게 쫓겨나게 되었는데, 대사제 메넬라오스가 임금에게 더 큰 돈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돈을 조달하기 어려워지자 성전의 기물을 팔아 뇌물로 바치기 까지 한다(2마카 4,23-38). 이로 인해 경건한 유다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되었다.
B.C. 169년에는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안티오코스가 성전을 약탈하여 성전 벽면의 금박까지 벗겨가는 일이 벌어졌다(1마카 1,17-24; 2마카 5,15-21). 왜냐하면 야손이 병사를 이끌고 메넬라오스를 공격했기 때문인데, 이를 계기로 유다인들은 안티오쿠스를 유다교의 원수로 삼게 되었다. 거기다 안티오쿠스는 대사제를 도와 헬레니즘 정책을 추진할 감독관 필리포스와 용병대장 아폴로니우스를 파견하였는데, 아폴로니우스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삼았으며, 도성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게다가 성전 남쪽 옛 다윗 왕궁 터나 그 맞은 편 서쪽 언덕에 acra라는 성채를 세웠다. 그곳은 헬레니즘화한 이교도들과 배교한 유다인들이 사는 그리스식 도시 국가가 되었으며, 성전은 유다인의 소유가 아니라 이 도시 국가의 성소가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지켜본 유다인들은 극렬하게 저항했으며, 안티오코스는 유다인들의 비협조적인 태도가 종교 때문임을 알고 이전 임금들이 허락했던 특혜를 폐지하고, 유다교 전례를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B.C. 167). 번제와 안식일, 절기를 지키는 것이 금지되었고, 율법 사본은 파기되었으며, 할례도 금지되었다. 유다인들은 신인 임금을 경배해야했고, 돼지고기를 먹어야 했으며, 이교 제사와 디오니소스 축일에도 참여해야했다. 그리고 제우스 신을 경배하는 예식이 성전에 도입되기까지 했다(1마카 1,41-64; 2마카 6,1-11).
B.C. 166-165경 안티오코스 박해 때 편찬된 다니엘서는 이와 같은 위기 상황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곧 하느님께서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개입하리라는 확신 속에서 율법과 신앙, 곧 유다인으로서 정체성을 고수하기위해 왕의 정책에 저항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다인들은 독립전쟁을 벌이게 되었는데, 마타티아스를 이은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 아래 유다인들은 안티오코스의 군사들과의 몇 차례 전투에서 거듭 승리를 거둔 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이 모독된 지 3년 만에 정화작업에 착수하게 된다(1마카 4,36-59). 이로서 유다인들은 다시금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자취권을 획득하게 된다.
마카베오 독립 전쟁 이후부터 기원전 63년 로마가 침략하기 전까지 유다는 실제적으로 독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새로운 비극의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였는데, 바로 왕권과 대사제직을 뺏고 뺏기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마카베오에게서 시작된 하스모네아 가문은 과욕을 부림으로써 왕권과 대사제직을 독점하려했다. 곧 마따티아의 넷째 아들 요나단(기원전 160-143년 통치)은 독립군 사령관직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대로 대제관을 배출한 사독 가문을 제치고 기원전 152년 대제관직까지 겸직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사독계 사제들 일부가 불만을 품고 예루살렘을 떠나게 되는데, 이들이 에센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더렵혀졌다고 믿었으며, 자신들 만이 참된 하느님의 성전이라 믿고, 광야 생활을 해 나가게 되었는데, 세례자 요한과 사해 근처의 꿈란 공동체 역시 대표적인 에센파의 한 부류로 보인다.
이후 하스모네아 가문은 서로 갈라져서 왕위와 대사제직을 두고 서로 암투를 벌이게 되었고, 결국 그런 가운데 기원전 63년 자신에게서 왕권과 대사제직을 빼앗으려 했던 아리스토불루스 2세(67-63)에게서 다시금 권력을 찾기 위해 이두메아의 안티파텔, 나바테아의 아레테스, 로마 세력의 도움을 끌어들였던 히르카누스가 대사제직을 차지함으로써 그 암투는 끝을 맺는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인물이 바로 이두메아의 안티파텔인데, 그는 로마로부터 총독이라는 호칭을 얻어 팔레스티나 전체를 통치하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헤로데 대왕은 바로 이 안티파텔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