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 신전건축의 발전
기원전 12세기 미케네문명이 멸망한 이후 시작된 소위 그리스의 '암흑기'는 기원전 7-8세기경에 끝나고 예술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부흥을 주도한 것은 신전이었습니다.
신전은 지역민들이 선호하고 지방에서 전통적으로 모시던 다양한 신들의 거주지였습니다. 그리스는 종교적으로 신과 인간을 동격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의 신전은 신의 주거 개념을 기본으로 주거 형식을 발전시킨 형태였습니다.
<초기 그리스 신전 형태>
크소아논(Xoanon)이라고 하는 원시적인 목조 신상(神像)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원시 오두막에서 그리스 신전이 비롯되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거의 대부분의 신전은 동서방향으로 놓여있어 떠오르는 태양이 크소아논을 비출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초기에 신전은 햇볕에 말린 벽돌로 벽을 두른 방 하나로 된 오두막의 형태였고 외부에 동물을 제물로 바치던 제단이 있었습니다. 점차 기둥이 신전 건물 내부에 도입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입면에도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기원전 7세기 후반에 들어 지성소 중심부의 주위로 1열의 기둥이 둘러싸게 되는 페리스타일의 형식이 정립되었습니다. 페리스타일은 그리스 건축 고유의 것으로 후에도 가장 특징적인 요소로 남게 되었습니다. 기원전 7세기 후반에 기본적인 신전평면 형식이 나타난 이후 그 형태와 구성요소들은 거의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건축의 기본적인 원리는 가구식 구조였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기둥이 수평보의 하중을 받칩니다. 이 수평보(목재인방)가 무거운 대들보를 받치고 있었고, 그 위로 버팀목과 경사진 서까래가 놓였습니다. 내부에 기둥을 더 두지 않는 이상 경간을 넓히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리스 고전건축을 특징짓는 대부분의 세부형태는 목조건축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후에 이러한 목조건축의 요소들은 석재로 전환되었습니다.
아르카이크기의 그리스 신전
그리스의 신전 건축은 미케네 건축의 메가론과 사자문, 그리스 본토의 장례용 성소나 빌리지 채플 같은 재래 종교 시설, 그리스 토속 건축의 목구조와 석구조 등 세 가지 선례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수많은 피드백과 정밀한 조절 과정을 거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암흑기에는 신전에 대한 기본인식이 형성되면서 원시적 상태의 선례들을 통합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르카이크기에 들어와 초기 수준의 다소 엉성하지만 구체적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점차 다듬어져서 아르카이크기 후반부쯤 되면 제법 완성된 상태에 이르고 고전기에 절정에 이르게됩니다.
그리스 신전의 완성에 대한 기준은 오더와 평면의 두 방향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더는 각 부재가 비례 체계를 갖추어가면서 그에 합당한 구조, 기능과 맵시를 확보하는 것이 관건이었습니다. 초기 신전의 오더는 짧고 둔탁했으며 주두는 가분수처럼 커서 맵시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기술과 과학이 발달하면서 주신이 점차 높고 두꺼워졌으며 비례에 의해 다듬어지면서 안정적이고 보기 좋은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오더 형식> <그리스신전 평면의 발전과정>
평면은 처음에는 사각형 윤곽조차도 갖추지 못했으며 사각형으로 다듬은 뒤에도 실내 중앙을 기둥열이 가르고 지나가서 신상을 놓을 자리가 없거나 기둥에 가려졌습니다. 실내에 아예 기둥이 없기도 했는데 이 경우는 건물 자체가 너무 작아서 신전으로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컸습니다. 건물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고 기둥이 두 열로 늘어나 양옆으로 갈라지면서 중앙에 신상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 신전의 정형이 확립된 것은 목재와 흙으로 이루어진 신전이 석재 신전으로 발전한 기원전 7세기 이후에서입니다. 그 형식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신전유적으로는 그리스 남부 테르몬의 아폴로(Apollon) 신전이 있습니다. 아폴로 신전(기원전 7세기)은 극히 좁고 긴 본당을 지닌 주익식(周翼式)의 신전으로서 신실 내부에는 보받침 기둥이 중심 축선상에 일렬로 늘어서 있으므로 정면구도는 5주식(五柱式)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 신전에는 기둥, 보, 엔타블레이처를 장식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테라코타의 메토프와 코니스 선단 부분이 출토되었습니다. 후에 석재로 만들어진 도리아식 오더의 각 부재는 이 신전에서는 대부분 목재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폴로 신전, 테르몬, 기원전 630년경>
테르몬에서보다 한층 더 발전된 형식을 지닌 옛 신전은 올림피아의 헤라이온(Heraion) 입니다.
오늘날 남아있는 요석(腰石)은 과거 건물의 세장형(細長形) 평면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고대 시대로부터 고전시대에 걸친 다양한 에키누스를 보여주는 석재의 주두가 출토되어 건물의 목재기술이 점차 석재기둥으로 대체되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고대의 올림픽 제전이 열리던 올림피아의 이 신전은 오늘날 근대올림픽의 성화를 채화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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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 신전, 올림피아, 기원전 600년경> |
<헤라신전 복원도> <88서울올림픽 성화 채화 장면> |
아르카이크기 후반에 해당하는 기원전 6세기가 첫 번째 중요한 분기점으로 코린트의 아폴로 신전(기원전 540년경), 메타폰툼(Metapontum)의 헤라 신전(기원전 6세기말), 아그리젠토(Agrigento)의 올림포스 제우스 신전(기원전 480년경), 파에스툼(Paestum)의 바실리카(Basilica, 기원전 530년경)와 케레스 신전(기원전 500년경), 아이기나(Aegina)의 아파이아 신전(기원전 500년경) 등에서 위의 기준에 따른 발전과정을 거치면서 그리스 신전건축의 초기 골격이 잡혀갔습니다.
코린트의 아폴로 신전(기원전 540년경)은 전면 6주 주익식의 완전한 도리아식 신전입니다. 건설 당시에는 53mx21m의 대좌를 38개의 기둥이 감싸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7개의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그 기둥은 하나의 거대한 돌로 만들어져 굵고 짧으며 엔타시스가 돋보이고 주두는 크고 에키누스도 둥근감이 있는데, 기둥 간격은 좁고 전체적으로 고풍스런 둔중한 강력함을 표현합니다.

<아폴로 신전, 코린트, 기원전 540년경>
반면 아이기나의 아파이아 신전(기원전 500년경)은 세련된 세부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미 고전 시대의 작품이라 해도 좋을만큼 성숙한 모습입니다. 이 신전은 파르테논신전, 포세이돈 신전과 함께 그리스의 3대 신전으로 일컬어 집니다.
32개의 돌기둥 중에 지금은 24개가 남아있는데, 이들 기둥은 아이기나 섬에서 생산된 석회암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그 대부분이 하나로 된 바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점입니다. 이런 하나의 바위로 돌기둥을 만드는 방법은 아르카이크 시대의 특색이기도 했습니다. 그리스에 남아 있는 신전중에 내부의 모습이 남아 있어 과거 신전의 모습을 추이해 볼 수 있는 신전입니다.
<아파이아 신전, 아이기나 섬, 기원전 500년경>
아파이아 신전은 신전 자체의 건축사적 의미도 매우 크지만, 신전의 박공에 세워진 조각군(群)은 특히 아르카이크기로부터 고전기로의 전환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이 신전의 양쪽 페디먼트(pediment : 박공)에는 아테나 여신의 가호 아래 에게 해의 영웅들이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은 투구와 방패등 무구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착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체를 통해 그리스인을 이방인으로부터 차별화하는 표현 방식은 아르케익기에 이미 관행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신전의 동쪽 페디먼트 조각은 서쪽보다 약 20년 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두 군상을 비교해 보면 짧은 기간 그리스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 양식상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특히 페디먼트 끝에 배치된 <죽어 가는 전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쪽 모두 치명상을 입어 쓰러진 전사들이지만 서쪽의 전사는 왼쪽 팔에 상체의 무게를 실은채 몸통과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있습니다. 몸통에 박힌 화살을 움켜쥔 오른팔과 곧추세운 오른쪽 무릎 역시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무엇보다 얼굴의 근육이 경직되어 있는데. 양쪽 입매가 당겨진 전형적인 '아르카이크 미소(Archaic smile)'로 인해 죽어가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이에 반해 동쪽 페디먼트의 전사가 보여 주는 자세는 물 흐르듯이 유연합니다. 몸 전체의 힘이 빠진 상태에서 오른손으로 땅을 짚느라 어깨와 머리가 기울어져 있으며, 방패 고리에 왼팔을 끼워 겨우 버티고 있지만 손끝은 이미 풀려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땅바닥으로 시선을 떨어뜨린 모습에서 강한 애수가 느껴집니다.
일찍이 고대 시대로부터 그리스 본토와 나란히 활발한 건축활동을 함으로써 도리아식 신전의 풍부한 유적을 남겨놓은 곳이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 : 대 그리스)라 불린 남부 이탈리아와 시실리 지방의 도리아인의 식민지였습니다.
다른 지역은 기원전 490년에서 480년까지 벌어진 페르시아 전쟁으로 인해 크게 파괴되었지만 이 지역은 살아남아 그리스 신전의 흥미로운 초기형태가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
그 유적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셀리누스(Selinus)의 신전군 중 C신전(기원전 570년경) 일 것입니다.
이 신전은 전면 6주, 측면 17주로 세로로 긴 세장형(細長形)의 건물과 전면에 2중 열주를 갖춘 넓은 익랑을 지닌 특이한 형식의 주익식 신전입니다.
<셀리누스 신전군>
<신전 C, 셀리누스, 기원전 570년경>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포세이도니아(Poseidonia)라고 불렸던 파에스툼(Paestum)의 도심지역에는 기원전 6세기 중반~기원전 5세기 중반에 걸쳐 건립된 바실리카(Bascilica) 신전, 포세이돈(Posedion) 신전, 케레스(Ceres) 신전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파에스툼의 신전들>
파에스툼의 바실리카(기원전 540년경)라 불리는 신전은 보존 상태가 좋아서 과거의 형태를 잘 전해주는 신전입니다.
18세기 발굴하면서 고대 로마시대 건물 인줄 알고 이름을 지은 건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리스시대 건축인 헤라 신전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평면 24.5m×54.3m, 기둥 9×18개 규모입니다. 이 신전은 특이하게도 정면에 9개의 기둥이 있는 9주식으로 홀수의 기둥은 중심축 상에 열주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기둥이 굵고 짧으며, 주두가 크고 그 정상부에는 당초 문양으로 장식되어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줍니다.
<바실리카(헤라 I) 신전, 파에스툼, 기원전 540년경>
파에스툼의 케레스 신전(기원전 500년경)도 그 기법이 앞서 언급한 바실리카와 유사하게 과거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는 전면 6주 주익식 신전입니다. 아테나 신전으로도 불리는 이 신전은 평면 14.5mx33m, 기둥 6×13개 규모입니다.
<케레스(아테나) 신전, 파에스툼, 기원전 500년경 >
메타폰툼(Metapontum)은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타란토만의 서쪽에 위치하였습니다. 기원전 700년경에 아카이아의 식민지로 건설된 도시였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말년을 보낸 곳이라고합니다.
메타폰툼의 헤라신전(기원전 6세기말)은 전체 넓이는 길이 35.69m, 폭 18.46m의 크기였으며, 기둥은 전면 6주식으로 6X12 형식으로 전체 32개의 열주가 있었지만, 현재는 15개의 기둥만 남아 있습니다.
<헤라 신전, 메타폰툼, 기원전 6세기말>
시칠리아 남서쪽에 위치한 아그리젠토는 기원전 582년에 건설된 고대 그리스의 도시로 고대의 예술과 문화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매우 잘 보존되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부분의 고대 도시 건축물들과 문화 유산은 '신전들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에 집약돼 있습니다.
<아그리젠토 '신전들의 계곡' 전경>
아그리젠토의 올림포스 제우스 신전(기원전 480년경)은 도리스식 신전 중 가장 큰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히메라 전투(기원전 480년~기원전 479년)에서 카르타고에게 승리를 거둔 기념으로 세웠으며, 지금은 비록 폐허가 되어 돌무더기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아그리젠토 자부심의 근원입니다. 신전의 기단은 길이 113m, 너비 56m로 4만2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406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받았을 때에는 이 도시의 전 주민이 신전 안에서 방어를 했습니다. 이 건물은 기둥들이 독립적으로 서있는 것이 아니라 벽에 부착되어 있는 의사주주랑식(Pseudoperipteral)으로 세워졌습니다. 이 기둥들은 자이언트 오더(giant order)로서 2층 이상의 높이로 솟아 있었으며 도리스 오더이지만 특이하게도 주초가 있었습니다. '아틀란티스(Atlantes)'라고 불리는 남상주는 남성의 모습을 조각한 지지용 기둥으로 로마인들은 텔라몬(telamon)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대한 반원기둥이 뒤섞여 있는 거대한 높이의 신상들이 건물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올림포스 제우스 신전, 아그리젠토, 기원전 480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