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아직 남았으면, 수아에게
수아야. 요즘 네 얼굴에 활기가 차오르는 것 같아, 나도 미소짓게 된다. 오늘 난 동네 근처 극장에서 영화를 막 보고 왔어. 슬리퍼를 끌고 편하게. 내일 출근이 걱정이긴 하지만 말이야. 가벼운 로맨스였어. 너무 졸아서 스토리도 잘 기억이 안나.
저녁에 갑자기 좀 숨이 안 쉬어지고 할 일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답답했거든. 지금은 새벽 3시. 부엉이와 콜드 브루라도 나눠 마시고 싶은 그런 밤. 정신이 제법 초롱초롱하다.
요즘 우리가 극단에서 연습하고 있는 ‘대머리 여가수’ 말이야. 너도 편지에 썼듯, 참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인 것 같아. 내가 헝가리에서 봤던 작품은 약간 각색된 작품이었어. 원작의 이야기 순서를 좀 바꾸고 생략된 부분이 있었어. 마틴 부부 이야기가 먼저 나오고, 메리, 소방관이 등장하고 스미스 부부는 나오지 않았어. 물론 배우들이 헝가리어를 썼기 때문에 하나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배우들 의상이 좀 화려했고, 동작도 좀 과장된 면이 있었어. 아마 야외무대여서 그랬던 것 같아. 내가 어릴 때 희곡으로 봤던 그 느낌이 들지 않았어. 난 부조리극이 가진 그 팽팽한 긴장감을 좋아했어. 헝가리에서 봤던 작품은 그 긴장감이 생략되어 있었어. 아마 의도적으로 연출가가 배제한 것 같아. 배우들끼리의 긴장보다도.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관객들과 사라지는 야경 속에서 외로움과 미래의 긴장을 더 느낀 것 같아.
이오네스코는 철저하게 예술과 인간의 삶을 분리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생활로 돌아왔을 때 그 작품으로 인해 사람들의 정신이나 삶이 변화되거나 성장되는 걸 극도로 제한하며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참 신기하지? 명작들은 볼 때 마다 작품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 같아. 그게 좀 신기하다.
하여튼, 나도 너처럼 요즘 우리 0000극단에서 같이 ‘대머리 여가수’ 작업하는 게 좋아. 물론 나는 조명 보조를 맡았지만, 배우들 연기를 더 자세히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아. 특히 스미스 역할을 맡은 성진님과 스미스 부인 역할을 맡은 희수님의 표정을 오래 봤어. 너도 혹시 알고 있니? 그 분 있잖아. 무슨 식품회사에 다니신다는 키 크고 마르신 분. 내 조명 담당 선배가 알려준거야. 요즘 난 조명 위치와 시간, 밝기 조절에 대해 배우고 있어. 저번 주엔 스미스 부부는 그냥 모른 척 하라구. 아무도 그 둘의 연기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무슨 말이냐고 계속 물어봤어.
그랬더니 그 둘, 스미스와 스미스 부인을 맡은 성진님과 희수님은 10년 동안 사귄 사이였대. 둘 다 헤어졌지만, 연극을 넘 좋아하다보니, 여길 떠나지 못하고 있대. 서로 사적인 대화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연극 속에서만 만난대. 난 좀 이해가 안돼. 성진님은 두 달 전에 새 여친도 생겼고 곧 결혼한다는데, 여기서 둘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게 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야. 직장인 극단은 여기 말고도 많은 데 말이야. 쉿. 이건 비밀이야. 너만 알고 있어. 나도 극단에선 모른 척 할 거니까.
그래서 그런지, 스미스와 스미스 부인의 연기를 볼 땐 참 많은 생각이 들어. 좀 전에 극장에서 봤던 그 로맨스 영화와 달라. 남녀가 가진 현실적인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는 이야기였는데, 영화는 낙천적이고, 우리 연극은 참 현실적인 건지. 그런데 정말 궁금해. 성진님과 희수님은 진짜로 끝난 걸까? 스미스와 스미스 연기는 진짜 일까? 지금 저들은 행복할까? 연극이 끝나면 저들은 어떤 마음일까? 이별이 끝을 정해주는 게 맞는 걸까? 사람들 사이가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면 그리움도 아쉬움도 억울함도 없을텐데.
수아가 들려준 가족 이야기. 난 정말 아프게 들었어. 어릴 때의 수아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동생과의 문제도 그렇고. 첫째들은 그런 것 같아. 가족의 불행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그 불행으로부터 가장 멀리 도망가고 싶어하는 것 같아. 나도 그랬거든. 수아가 힘들었던 거, 수아의 한계는 정말이지 정직한거야. 당연한 거야. 나도 그랬을 거야. 우리는 그 비겁함을 견디며 멀리 가지만, 사실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지.
사실 수아야. 나도 고백하자면, 1년 전에 헤어진 사람이 있어. 수아에겐 말을 못했어. 힘들었거든. 스미스 부부 역할을 맡은 저 연인들이 부럽더라. 공통 관심이 있었던 거잖아. 그래서 이별 후에도 공통 관심과 공간을 버리지 않고 유지할 수 있고. 생각해 보니 난 그 사람과 공통된 뭔가가 없었어. 나와 아주 다른 사람이었거든. 그 사람은 참 조용했고 나는 언제나 활발했어. 난 언제나 새로운 여행이나 체험을 하고 싶었고, 그 사람은 여행 갔던 곳에 다시 가는 걸 좋아했어. 완전히 헤어지기전까지 우리는 서로 합의도 하지 않은 채 4개월 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어. 시간을 갖자, 내가 미안했다. 뭐. 등등 이런 말도 하나도 없이. 난 그래서 이별을 결심했어. 그 사람은 날 평생 외롭게 만드는 사람이구나. 아직도 그 사람이 생각나지만 사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통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무서운 거야.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거. 내가 상대를 듣지 않는 거.
난 그냥 스미스 부부 연기를 하고 있는 저 연인들이 부럽고 그래. 이것도 나의 환상일까? 그런데 알고 보니 저 둘, 헤어지고 나서 극단 탈퇴하려고 생각하니, 내가 왜 그만 둬야 하지? 하는 그런 생각으로 떠나지 않는건가? 좀 복잡하다.
어쨌든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는 독특한 작품인 것 같아. 읽으면 읽을수록 소용돌이가 다시 만들어져. 지금도 희곡 대본을 보고 있는데, 그게 뭘까. 갑자기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 오히려 어릴때는 그대로 실험적인 자체로 받아들여졌는데, 내 삶과 연결되니 더 모르겠어.
부조리극은 소설가 카뮈가 썼던 ‘부조리’라는 용어를 가져와 활용한 것이라고 해. 삶의 부조리. 그런데 이오네스코의 부조리는 삶이나 현실의 부조리보다 더 본질적인 걸 건드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틴 부부나, 스미스 부부의 연결되지 못하는 대사들, 하녀의 개성, 소방관이 찾는 불... 마치 진짜 실제하는 대머리 여가수처럼 느닷없고 당황스럽고, 모멸감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이오네스코는 아무렇게나 말이 안되는 대사를 곳곳에 둔 것 같지만, 사실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면, 그 자체로 생동감이 느껴져.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대중의 소통과 이해의 맥락들이 세상에서 참 중요한 일이지만, 오늘은 그런 일반적인 서사의 개연성이나, 논리성 이런 것들이 참 힘없는 그물처럼 느껴진달까. 아무런 논리나 이성 없이도 인간의 감정이, 불안이, 무의미한 대화들이 분명 세상에 존재하잖아. 그리고 인간은 이런 것들 때문에 힘들고. 언어가 가진 부조리. 이오네스코는 그거에 몰입했던 것 같아. 다른 작품 ‘의자’ ‘수업’도 난 읽긴 읽었는데, 그래도 ‘대머리 여가수’보단 쉽고 무슨 일인지, 무슨 사건인지 선명해. 참 난 '코뿔소'는 재밌게 읽었었어. 그렇지만 이오네스코 작품엔 공통적으로 좀 깊은 허무와 고독이 깔려있어. 아마 극이 가진 유머, 블랙유머들 때문인 것 같아.
이번 작품이 무대에 오르려면, 1달이나 더 기다려야 해. 많은 사람들이 보러 왔으면 좋겠다. 참 기대된다. 너랑 같이 이 극단에 있는 게 참 기뻐. 따뜻한 알 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아. 어른이 된 후로, 한 번도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극단이 우린 보호해 주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난 서른 살이 넘어도 그렇더라. 갑자기 아이에서 집 나간 아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야. 연극이 날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수아야. 참. 기억나? 우리가 넘 좋아했던 작품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우리 같이 이 연극을 보고 나와서 길에서 환호성을 쳤잖아. 난 정말 펑펑 울었지. 넌 펑펑 웃었고. 생각나니? 그 시절은 정말 다시 오지 않는 걸까?
가끔은 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사를 뱉고, 아무렇지 않게 특별한 사건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인물처럼 살고 싶다. 나의 하찮은 말이나, 행동도, 나의 하찮은 하루 하루도 희극처럼 미소짓게 만들고 싶어. 그렇다면 부조리극은 비극보단 희극과 더 가까운 것 같아. 인간은 울 수도 있지만, 웃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하품이 계속 나온다. 낼 2학년 애들 현장실습이 있어. 얼른 자야겠다. 수아야 잘자렴.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