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먼저 부산광역시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 "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4년 2월 19일(성종 5년)자의『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동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동국여지승람(1481) 』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 이라고 하였다. 그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동국여지승람(1481) 』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해사록』에 실려 있는「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도톰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바다에 임하여"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釜山鎭城)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鄭公壇)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詩文)에 나오는 산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변박이 그린「왜관도(倭館圖)」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동구 수정동에서 산을 넘어 부산진구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 하고「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로(古老)들을 증산을 시루산이라고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 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1-1 사상구 모라동
모라동에는 <운수사> 고찰이 있어 그 뒷산을 <운수산>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하천을 <운수천>이라고 부른다. 모라는 삼한시대부터 마을이 있었던 오랜 동네라는 것을 이곳에서 발견된 조개 무지 유적인 모라 패총이 증명해 주고 있다. 모라의 지명은 조선시대 동래부지에 사천면 상단 모라리와 뒤에 사상면 모라촌으로 나와 있다. 모라 지명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이라는 우리말의 고래어인 <모라>에서 연유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의 논고에 의하면 고대 사회 집회소의 명칭이 <마을>이며 이것이 촌락의 명칭과 함께 사용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양서제이전 신라전에는 성을 일러 <건모라>로 했다는 기록이 적혀 있는데 이는 <큰마을>이라는 뜻이므로 <모라>는 <마을>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모라의 지형을 살펴보면 산을 배경으로 저지대는 낙동강의 토사가 퇴적하여 쌓인 땅이므로 <모라>는 <몰개> <모래개>에서 유래하며 넓은 땅의 지명에 붙는 <라>와 함께 모래로 된 땅으로 <모라>가 되었다는 풀이도 있다.
1-2사하구 신평동
신평동은 원래 동래군 사하면의 지역으로서 망끼, 망후 또는 신평이라 불렀는데, 고종 33년(1896) 지방제도 개정에 의하여 부산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신평동이라 해서 다시 동래군 사하면에 편입되었는데, 1942년 부산부 구역확장에 의하여 다시 부산부(시)에 편입되었고, 1957년 구제 실시에 따라 사하에 편입되었다. 1992년 9월 1일 구 조례 제242호로 신평동이 신평제1동과 신평제2동으로 분동되었다.
망끼, 망후 : 신평동의 옛 이름
1-2서구 서대신동
서대신동(西大新洞) : 서대신동(西大新洞)의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또는 고분도리」이다. 딱박골 또는 딱밭골 등은 닥밭골을 말하며 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이라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로는 보수천가에 버드나무가 많았다 고도 한다. 고분도리란 마을 이름은「고불」·「드르」에서 온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블」은 고리짝을 말하며,「드르」는 들을 말하므로「고블드르」는 고리짝을 만드는 들이 된다. 닥나무와 버드나무 그리고 고리짝 들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이 일대에 부곡(部曲)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신동이란 마을 이름이 처음 생긴 것은 1914년으로 추정되며,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 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 「한」은 큰길을 한길이라 하듯이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인 주거지가 되기 이전까지는 부민포에 속하기도 하고, 대치리의 일부에 속하기도 하던 곳이 대신리라는 새로운 지명을 얻게 되었다. 서대신동은 1926년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 일제식 명칭만 바꾸어 서대신동 1,2,3가로 부르게 되었다가, 1959년 동명개정 때 서대신1,2,3동으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1970년 서대신3동을 3,4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 울산광역시
울산이라는 명칭의 유래
-----------------------------------------------------------------------------------------------------
3.경상북도 안동시
안동의땅이름 신라 말엽 당시 신라는 국운이 쇠약하여 곳곳에서 도적떼가 성했고, 특히 옛 백제 땅에서 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고 옛 고구려 땅에서는 고려가 일어나 날로 세력이 강성하였다.
자살케 하고 왕비를 능욕하며 재물을 함부로 빼앗아 그 피해가 막심하였으나 힘이 약한 신라로서는 막을 수가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려 태조 왕건은 군사 5천명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으나 오히려 대구 부근의 공산 동수싸움에서 대패하여 신숭겸, 김락 등 많은 장수와 군사를 잃은 채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돌아갔다. 고려 태조 12년 견훤은 승승장구한 여세를 몰아 의성, 풍산 등의 여러 고을을 빼앗고 안동을 공격하여 왔다. 10년전 공산싸움에서 해한 이후 군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던 고려 태조도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남하하여 안동에서 고려와 후백제의 두 군사는 생사를 건 대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진을 치고 후백제군은 맞은 편의 석산(안동시 와룡면 소재)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지금까지 승리를 거듭한 견훤의 군대는 병력도 많고 사기도 충천하였으나 고려 태조의 군대는 그렇지 못하였으니 대상(大相) 홍유 같은 이도 전쟁이 불리하면 후퇴할 길을 먼저 닦아야 한다고 태조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일신의 안전만을 위한다면 마땅히 견훤에게 항복하는 것이 옳겠으나 돌아가신 경애왕의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로 알고, 또 포악무도한 견훤으로부터 이 고장을 수호하기 위하여 고려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크나 큰 힘을 얻게 되었고, 이 고장 지리에 밝은 세 분 태사는 강대 하고 사나운 견훤의 군사와 정면 대결을 하여서는 승리하기 어려움을 알고 고을민을 이끌고 고려 군대와 힘을 합하여 저수봉(猪首峰:현 안동시 뒷산)으로부터 밤중에 견훤의 군을 뒤에서 습격하였다. 8천명의 군사를 잃은 채 패주하고 말았다. 이로부터 고려의 병력은 날로 강성해지고 청송을 비롯한 안동 주위의 30여 고을과 동해 연안의 여러 고을 등을 합하여 100여 고을이 모두 고려에 귀순하였다. 대광(大匡), 행과 길은 대상(大相)을 삼고 태사(太師)의 벼슬을 내렸다. 또 태조는 원래 경주 김씨인 세분에게 선평은 金, 행은 權, 길은 張씨의 성을 내려 주고, 고창군을 안동부 (安東府)로 승격시켜 삼태사의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였다.
-----------------------------------------------------------------------------------------------------
4. 대구광역시
大邱의 옛 이름은 多伐(다벌), 達伐(달벌), 達弗城(달불성), 達句伐(달구벌), 達句火(달구화). 大丘(대구)등으로 바뀌었다. "불"과 "벌"은 우리말의 모음접변에 의한 것으로서 같은 말인데 평지, 평야, 촌락, 성읍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達(달)"의 뜻은 圓(원), 周(주)등 넓은 공간을 뜻하므로, 결국 達句火(달구화)와 大邱는 서로 같은 뜻이 된다. 大丘(대구)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에 나타나기는 신라 757년(경덕왕 16년) 주, 군, 현 의 명칭을 중국식 이름으로 고친 때부터이다. 그러나 이 개칭은 다음 혜공왕 이후의 기사에 옛 명칭인 달구벌 그대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한 동안 양쪽이 함께 쓰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達句伐(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통일 이후 唐(당)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신라가 모든 제도 문물을 중국식으로 정비해 가는 변화의 한 산물이다. 종래 여러 가지로 불리던 벼슬 이름이나 지방 이름을 원칙적으로 2자의 한자로 개칭하였다. 개칭의 방법은 음을 딴 것, 뜻을 따르는 것, 아름답게 고치는 것, 글자를 줄이는 것 등이 있는데 달구벌이 大丘(대구)로 바뀐 것은 음을 딴 경우에 해당한다 하겠다.
『丘』자가 『邱』로 바뀐 것은 조선왕조 영, 정조 시대부터이다. 1750年(영조 26) 『丘』자를 다른 자로 고치자는 상소가 있었다. 『丘』자가 孔子(공자)의 이름자인 까닭에서였다. 영조는 이것을 신기를 좋아하는 경망한 풍조의 소산이라 하여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대구 사람들은 점차 達(달)자 대신 脚(각)자를 쓰기 시작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처음으로 大邱로 나오기는 1779년(정조 3)5月 부터이다. 그러나 그 후에도 『丘』와자가 『邱』가 혼용되다가 철종이후는 1850년(철종 원년)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大丘를 쓰지 않고 大邱로 쓰게 되었다.
4-1 달서구
달서구(達西區)는 1988년 1월 1일 서구와 남구의 성서 ·월배지역 전역과 기존의 일부를 분리 · 병합하여 총면적 59.69㎢로 인구 285,217명, 14개 행정동으로 달서구(達西區)가 개청되어 1988년 5월 1일 자치구로 승격하였다.
4-2 달서구 성당동
성당동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문화예술회관 자리와 대성사, 독산부근(성당못 서편)이며, 상댕이 또는 성댕이라고 불리다가 1910년부터 성당동이라 불리웠는데 그 유래는 성당못을 중심으로 한 산의 모습이 용이 승천하는 형상으로 명당자리라 하여 유래되었다는 설과 또 하나는 지금으로부터 80-90여년전 현 대성사 위쪽에 천주교 성당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4-3 달서구 용산동
본래 용산동은 대구부(大邱府) 성서면(城西面)에 속한 행정구역으로서 와룡산 (臥龍山)밑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용산동이라 이름지어 졌다.
5 광주 광역시
5-1 광산구
광산구는 광주광역시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광주광역시의 문호이다.
동쪽으로는 서구ㆍ북구, 서쪽으로는 함평군, 남쪽으로는 나주시와 남구, 북쪽으로는 장성군과 접하고 있어, 항공교통, 철도교통과 고속도로 및 국도 등의 육상교통이 발달한 교통의 요충지이다.
이러한 광산구는 동부에는 비옥한 평야지를 흐르는 극락강을 경계로 광주시의 서구, 북구와 인접하고 남부는 황룡강, 극락강 유역의 광활한 평야가 나주평야에 이어지면서 나주시 및 남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북부는 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이 뻗어있어 산악 및 구릉성 산지를 이루며 장성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고, 서부는 비교적 완만한 산악지대나 구릉지와 함께 함평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어 인근의 3구 1시 2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 무진주(武珍州) 통일신라: 무주(武州) 1895: 광주군(光州郡) 1935. 10: 광산군(光山郡), 광주부(光州府) 승격으로 분리 1937. 07. 01: 송정면의 읍 승격 1949. 08. 10:군청사 이전(광주시->송정읍), 나주군 구역 3개면(평동, 삼도, 본량) 편입-1읍 14면 1955. 07.01: 4개면 광주시 편입(효지, 석곡, 극락, 서방) 1957. 11.06: 3개면 광주시 편입(지산, 대촌, 서창) - 1읍 7면 1963. 01.01: 6개동 광산군 편입(대촌, 서창) - 1읍 9면 1986. 11. 01: 송정읍이 송정시로 승격(송정시와 광산군으로 분리) 1988. 01. 01: 송정시, 광산군이 광주직할시 광산구로 편입, 광산구 신설 1988. 05. 01: 자치구 승격 1989. 03. 10: 3개 행정동명 개칭(원동-송정1동, 중앙동-송정2동, 호남동-송정3동) 1989. 04. 01: 2개 법정동명 개칭(도촌동-도천동, 도촌동-도금동) 1990. 04. 01: 1개 법정동명 개칭(오산동-오선동) 1993. 12. 01: 하남출장소를 하남출장소와 월곡동으로 분동 1995. 03. 01: 월곡동을 월곡1동, 월곡2동으로 분동 1995. 04. 20: 서창출장소, 대촌출장소가 각각 서구와 남구에 편입 1997. 07. 01: 비아 출장소를 비아동, 신가동으로 분동, 첨단지소를 설치(10개동, 7개출장소) 1998. 10. 15: 출장소를 동으로 전환, 송정 2,3동을 송정2동으로 용운,소촌동을 어룡동으로 통폐합(16개동) 2002. 03. 25: 비아동을 비아동, 첨단동으로 분동(17개동) 2003. 06. 30: 첨단동을 첨단1동, 첨단2동으로, 신가동을 신가동, 운남동으로 분동(19개동)
-----------------------------------------------------------------------------------------------------
(2)는 다음시간에 ...
아 그리고
제가 시의 구/군를 하나하나 유래 다 찿았는데 써보니까 너무 길어서 몇개만 뽑아서 썼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