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여성시대 다정한사이코
*직접적이진 않지만 영화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약간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영화를 보고 생각나는 대로 써봤어요. 비평문...어설프게 흉내냈습니다만....어슬프기만 할 뿐....ㅋㅋㅋ
<오피스>
1. 야근의 윤리학
아, 오늘도 정시퇴근은 글렀습니다. 회의에서 우리 팀은 또 된통 깨졌습니다. 우리가 몇 시간 더 일하는 것과 실적에는 사실 개연성이 없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부장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야근합니다. 일이 남아서, 부장이 퇴근하지 않아서, 또는 그냥. 야근합니다.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쥐꼬리 월급이라도 주는 이곳에 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요.
잘하고 싶습니다. 잘해서 정사원도 되고, 대리는 과장이 되고, 부장은 이사까진 못 되어도 정년을 채우고 싶습니다. 잘하고 싶어서 오래 남아 있습니다. 욕먹고 싶지 않아서 남아 있습니다. 불안하니까 남아 있습니다. 야근 마일리지가 쌓이고 쌓여 우리를 출세의 길로 이끌어 줄 거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야근을 해본 사람이라면, 사무실에 홀로 남아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등 뒤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그 기분을 이해할 겁니다. 시계 초침소리, 프린터 소리, 심지어는 내가 치는 타자 소리까지 다 지나치게 선명하게 섬뜩한 그 기분을요.
당신이 야근하는 이 건물에 살인용의자가 없어도 말입니다.
영화는 야근 시간대의 회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불안한 심리의 등장인물을 다루면서 확대되는 사무실 집기의 소리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기분이 나쁠 정도입니다.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는 영업2부의 사무실은 말하고 있습니다.
‘야근, 어디까지 해봤니?’
2. 을을 위한 파반느
갑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유행하는 데에는 갑질을 하는 사람보다 당하는 사람이 더 많아서일까요. 우리는 을. 대한민국은 을의 공화국입니다.
영화는 영업2부의 을, 김병국 과장의 공허한 시선에서 시작됩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 잔에서 더 이상 김이 피어오르지 못할 때까지 그는 앉아있습니다. 낡은 가죽 가방이 그의 연차를 알려줍니다. 아마 지금 입고 있는 저 정장도 몇 종류 되지 않는 것 중에 골라 입은 것일 겁니다. 그는 끝내 커피를 마시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는 집으로 들어가 노모와 아내, 아들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그는 회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의 대표 을, 인턴이 등장합니다. 서있기도 힘든 만원지하철에서 겨우 가방까지 챙겨 버스로 환승한 후 뛰어서 들어왔습니다. 네, 그래도 지각입니다. 눈치 보며 자리에 앉았는데 홍대리의 질책이 날아듭니다. 요즘 인턴은 지각도 하나보지? 누가 지각하고 싶어서 하나요. 그래도 암말 못하고 시키는 일 합니다. 을이니까요.
그러나 그 홍대리를 포함해 영업 2부의 모두는 을입니다. 부장은 임원진이나 본사의 압박을 받습니다. 부장이라는 위치가 다 그렇죠. 언제 잘릴지 모릅니다. 실적의 무게는 높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살벌하게 당신의 심장을 갉아 먹습니다. 정대리는 언제 결혼하냐는 여자친구의 말에 죽고 싶다라고 끄적입니다. 물론 끄적이는 순간에도 야근 중입니다.
홍대리는 부장의 심한 언사에 하루하루 지쳐가고 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살려고 일하는 건지 죽으려고 일하는 건지 헷갈립니다. 같은 직급의 정대리는 남자라는 이유로 과장진급에 한 발 더 다가가 있습니다. 그녀가 인턴에게 서슬 퍼렇게 날이 서있는 것도 이해 못할 범위가 아닙니다. 염하영이나 이원석도 마찬가집니다.
영화엔 많은 사망플래그가 있습니다. 부서원들이 이 사망플래그를 외면하고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유 또한 그들이 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그들은, 아니 우리는 을입니다.
3. 예의없는 것들
그러나, 한니발 렉터(<양들의 침묵>)가 가르쳐주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앞의 상대방이 어떤 사람일지 모르니 항상 예의를 잃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참을 수 있는 한계라는 게, 있는 겁니다. 너도 나도 을인 세상에 함부로 갑질하면 안 되는 겁니다.
영화가 이 예의 없는 것들에게 복수하는 방식은 실로 처참하기 그지없습니다. 가장 하찮게 여겼던 존재에게 하나둘씩 처리되는 과정은 공포와 쾌감이 공존합니다. 아, 싸가지 없는 염하영을 후려치는 평화 2공 펀치는 <원티드> F**k you 키보드에 맞먹는 카타르시르를 느끼게 합니다. 홍대리의 마지막은 또 어떻습니까. 정대리나 부장의 마지막은요. 아마 살아났어도 극한의 공포를 경험한 그들이 똑바로 살아갈 수나 있었을까요?
영화가 공포를 풀어내는 방식은 클리셰에 가깝습니다. 한 여름 납량특집으로 개봉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영화입니다. (저 스스로 공포영화에 대한 내성이 거의 없음을 실토합니다.) 침묵 후에 화면 어디선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얼굴, 손, 긴박한 음악 등, 스릴러가 아니라 차라리 공포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 이후에 남은 공포는 돌변한 직장 동료의 칼끝이 아니었습니다. 영화 이후에도 우리는, 누군가는 김부장, 누군가는 김과장, 누군가는 정대리, 홍대리, 누군가는 인턴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야근을 하는 을로 살아야 합니다.
영화의 결말이 다소 허무하다는 평도 있지만, 저는 결말이 아주 맘에 들었습니다. 충격과 공포다 이 그지 깽깽이들아!를 외친 등장인물이 다시금 평화(?)로운 일상 사이에 서 있는 모습이 화면에 담깁니다. 그/그녀는 다시 회사를 다니고 을이 될 것입니다.
어쩌면 영화 안에서의 일은 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회사일 하다 사람 죽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요?
안 그래요? =)
+) 박성웅 배우 때문에 본 겁니다만, 역할이 다소 한정적인 부분은 안타깝지만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최종훈의 캐릭터가 더 잘난 사람이었다거나 비중이 많아 의심을 후벼 팔 여건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영화의 이야기는 완전 다른 방향으로 흘렀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비주얼은 아름다웠습니다...화면을 가르는 그의 다리 길이....b
+) 전체적으로 배우들의 연기가 아주 돋보이는 영화였습니다. 고아성은 ‘크로놀?’이 다소 보이긴 하지만 후반부의 모습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의성아저씨는 왜 귀여우신 걸까요..ㅋㅋ
+) 제 후기 보고 오피스 더 안 보고 싶어지시면 어쩌죠? 콧멍방에 처음 글 써보는데 여시들의 영화 감상에 방해될까 두려운 마음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