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시간이란...... 처음에는 멍석을 깔아줬다가 다음 순간 우리의 무릎을 꺾는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그저 무탈했을 뿐이었다. 자신이 책임감 있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다만 비겁했을 뿐이었다. 우리가 현실주의라 칭한 것은 결국 삶에 맞서기보다는 회피하는 법에 지나지 않았다. p.162
그리고 마침내 나는 그의 편지를 읽은 후에 내 본심을 감출 요량으로 보낸 엽서를 기억해냈다. 모든 것이 다 좋아, 이 친구야 운운하며 평정을 가장했던 문장들을. 그것은 클리프턴 수교 사진이 인쇄된 카드였다.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그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 p.171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을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p.173
평균치. 학교를 떠난 후 나란 인간은 줄곧 그랬다. 대학에서, 직장에서 평균치. 우정과 성실과 사랑에서 평균치. 섹스에서도 의심할 여지 없이 평균치였다. p.174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늘 그러잖아." 그녀가 말했다.
"날 떠난 게 내가 싫어서였어?"
"아니." 그녀가 말했다. "우리 둘 다 문제여서 떠났던 거야." p.177
한 관계에 승부를 걸었으나 실패로 끝난다. 계속해서 다음번 관계에서도 실패하고 만다. 이때 잃는 건 단순히 두 번 뺄셈을 하고 난 값이 아니라, 우리가 내걸었던 것의 배수이다. 아무튼 그런 기분일 것이다. 인생은 단순히 더하고 빼는 문제가 아니다. 상실의, 혹은 실패의 축적과 곱셈이다. p.180
에이드리언이 죽은 건 부럽지 않지만, 그 삶의 명징성은 부럽다. 그가 비단 우리보다 명징하게 보았고, 생각했고, 느꼈고, 행동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그걸 수 있었기 때문에 부럽다. p.182
젊을 때는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처럼 돼버린다. 충돌사고 현황을 기록하기 위해 비행기에 탑재하는 블랙박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 p.182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한 남자가, 밤이 늦어, 살짝 취한 나머지 전 애인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그가 편지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인 다음, 코트를 찾아 입고 우체통이 있는 곳까지 걸어가서 편지봉투를 밀어넣은 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잔다고 말이다. 그가 마지막 과정까지 일사천리로 행동에 옮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 그런 점에서 이메일에는 미덕이 많다. 임의적이고, 즉각적이고, 감정에 대해, 감정상의 결례에 대해서까지 진실되다. p.183
내 얘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p.186
베로니카의 시선은-방금 알아차린 것이지만-에이드리언을 향하고 있다. 그를 올려다보고 있진 않지만 카메라를 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날 보고 있지 않다. 그날 나는 질투를 느꼈다. ...그래서 베로니카가 에이드리언에게 줄곧 질문을 던질 때 나는 초조한 심정이 되었고, 나중에 호텔 바에서 에이드리언이 잭 형님과 그의 친구들에 대해 좋지 않게 말했을 때, 곧바로 마음이 풀렸다. p.188
젊었을 땐-내 얘기이다-자신의 감정이 책에서 읽고 접한 감정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감정이 삶을 전복하고, 창조하고, 새로운 현실을 규정해주길 바란다. p.191
아무래도 나는 서로 떨어져 있는 존재의 간극을 잘라낼 수 있다고, 각자의 삶이 기록된 마그네틱테이프를 잘라 양 끝을 이어붙일 수 있다고, 서로 인생이 갈라지기 시작한 지점으로 돌아가서 그 여정을 이전으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아니, 여정 같은 건 아예 없었던 걸로 할 수 있다고 현혹되었던 모양이다. p.224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 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p.242
...그러는 동안 나는 흔치 않은 회한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쳤던 인간이 비로소 느끼게 된 고통, 그리고 바로 그랬기 때문에 느끼게 된 고통이었다. p.243
문제시 예감 먹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