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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문화생활]]하루 10분씩 코펜하겐식 이별실력

작성자행복한 라짜로|작성시간21.06.02|조회수8,054 목록 댓글 6

출처 : 여성시대 행복한 라짜로





 시월에는 비교적 촌스러운 냄새가 났다. 신발 밑창에 스민 은행 과즙. 현관 안을 비집고 들어온 단풍잎이야말로 가을의 바탕. 그러므로 내게 시월은 가을이라는 굳은 믿음이 있었다.

 화살 같은 장대비는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어보인다. 시월의 나무는 여전히 푸른 잎을 비추고, 자고 일어나면 목뒤에 동그랗게 땀이 맺혔다. 모두가 지치는 계절. 여름은 끝났다고 생각할 때 천천히 마지막 힘을 냈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젖은 벌레 시체 냄새가 났다. 방충망을 가른 쿰쿰한 향. 창문 틈 사이로는 파리들이 배를 뒤집고 있다.

 바깥은 조금 나을까.

 비가 멈춘 대신 꾸덕꾸덕한 마개가 피부 위에 씌었다. 열대야와 모기향이 새어 나오는 방충망을 지나 걸었다. 머리가 물렁해질 것 같다. 비 온 뒤 흐림은 개뿔. 긴 팔을 입은 것을 후회하고 상박까지 소매를 걷어 올렸다.

 공원 입구에 말뚝 박은 하얀색 벤치. 칠이 조금은 벗겨져 있다. 희재가 불법으로 도색한 것이었다. 그곳에 앉아 땀을 식혔다. 허벅지로 어긋난 나뭇결이 느껴졌다. 희재는 종종 사비로 제 것이 아닌 것들을 보수했다. 대표적인 예가 공원 벤치였다. 폼과 맞지 않는 사포를 꺼내 모서리를 마감하고, 벗겨진 곳은 신중히 색을 골라 페인트칠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했다. 누가 부러 의자를 망가트려도 보수가 자신의 일이라도 된 듯 묵묵히 원상복구했다. 알 수 없는 다정한 눈빛과 함께. 희재의 마음이 미묘하게 나를 빗겨 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바보. 누가 벤치를 좋아해.

 희재는 가을이 굼뜰 때마다 붉은 계열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 단풍 대신이라며 푸른 나무 앞에 우뚝 서 두 팔을 벌려 보였다. 어떤 이유가 되기 위한 사람처럼. 기뻤지만 바람은 보란 듯이 물 비린내를 우리 앞에 던졌다. 여전히 땀이 났고 축축했다.

 그러나 헤어질 무렵 희재가 입은 선홍색 옷은 마치 동물들이 강한 색을 이용해 적들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래 비어있는 의자가 누군가 맡아놓은 자리처럼 느껴질 때, 헤어짐을 정의할 수 있었다. 희재는 어디에서 여름을 떠나보내고 있을까. 희재는 여름이 지겹지 않았을 지도. 이제는 제 것이 아닌 것들에 관심을 갖지 않아도.

 벤치는 언젠가 인부들에 의해 페인트가 덧칠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수의 흔적을 감출 것이다. 어디선가 촌스러운 냄새가 왈칵 쏟아졌다. 식은땀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천천히 변하고 있었다. 발밑으로 나뭇잎이 서걱서걱 밟힌다. 붉게 물든. 떨어진 것을 일일이 셀 수는 없을 것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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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사랑해사랑해 | 작성시간 21.06.02 글 잘 읽었어! 이렇게 생생하게 쓰인 글 너무 좋은 것 같아ㅠㅠ
  • 작성자둘둘셋셋치킨 | 작성시간 21.06.02 좋다... 희재는 잘 지낼까
  • 작성자배고프지만 | 작성시간 21.06.03 와 영화한편 봤다... 생생해...
  • 작성자코렉트아워 | 작성시간 21.06.03 하 너무 좋다
  • 작성자순례자의길 | 작성시간 21.08.03 희재가 나를 떠올릴 계절은 여름일까 가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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