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1편 / https://m.cafe.daum.net/subdued20club/LxCT/305088?svc=cafeapp
한 번은 정말 굉장한 나르시스트를 만난 적이 있다. 잘 교육 받고 잘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강남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자부심이 대단한 엘리트 집단이었다. 그 대단한 엘리트 집단에 걸맞게 그는 어린 나이에 유학길에 올랐고 그렇게 그 나라의 최고의 수재들이 간다는 대학의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쓰는 향수 마저도 고작 샘플 7Ml에 10만원이 넘는 가격대를 자랑하는, 프랑스의 최상위 조향사가 온 힘을 기울여 조향했다는 최고급 니치 향수였다. 그가 가장 좋아한다는 책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책이었다. 휴대폰 배경화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죄다 바흐가 장식하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남들과 배타적인 취향을 가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런 중산층들의 특징은 눈에 띄게 티내지는 않지만 본인과 같은 길을 겪어 오지 않은 사람들에게 상당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을 뿐더러 선량함 마저도 연기한다는 것에 있다. 그런 나르시스트들은 세상에 기적 따위는 없다고 착각한다. 그리고 기적을 설사 기적이 있더라도 본인이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으며 조소한다. 왜냐하면 기적이란 그들이 인지할 수 없는 외부 세계가 존재한다는 증거이고, 그 같은 중산층의 나르시스트들은 그런 외부 세계를 온 몸을 다해 거부하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상해 그런 걸 받아들이지 못한다. 본인의 뛰어난 머리와 자본이 결합함으로써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업적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감히 한국에서 모든 걸 누리고 살아온 엘리트인 본인이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알량한 자존심과 똥줄이 타오르는 조급함. 그렇게 다시 본인을 채찍질 하며 온 세상에 조소를 던지는 그를 보는 것은 참으로 재밌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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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스스로 경제적인 독립을 일구어 내야 한다고 생각해. 부모님 돈 쓰는거, 진짜 부끄러운 일이거든 ”
그와 생활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티내지 않는 연기를 하고 있던 나는 그 시점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밤새도록 영어로 과외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나는 이미 경제적인 독립을 이루어낸 셈이었다. 그러니 이는 매일같이 엄마의 신용카드를 태연하게 쓰고 있는 그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절실한 사람들은 그걸 열망하지 않아도 일구어 내야만 해. 자신이 마치 대단한 말이라도 내뱉는 듯 매일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를 보고 실망했지만 그쯤은 그냥 중산층 나르시스트들의 일반적인 특징이라 생각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부잣집 아들이지만 부모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성공하고 싶어하는 나 자신’에 취해있는 그를 보는 것은 자주보기에는 역겨운 일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갖고 싶은 물건을 전부 사줬어. 외동이라 그런가?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손에 들어 오는거야. 재미없게.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것이 지루해졌어. 그리고 고민했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기는 한데.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면 반드시 어떤 업적은 남기고 죽어야 한다고 생각해. ”
나는 조소했다
“아, 그래?“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넌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걸. 은연 중에 본인의 집안을 자랑하는 그의 의도가 뻔히 보여있는 말이었다. . 넌 네가 진짜 그 물건들을 소유했다고 생각해? 그건 어쩌면 네가 진정 소유한 것이 아니라 환상이었을지도 몰라. 남들과 조금이라도 비싼 물건을 소유함으로써 본인이 중산층임을 확신하고자 하는 그 알량한 환상... 네가 정말 부자였다면 이런 말 자체를 했겠느냐는 말들을 톡 쏘아 붙이고 싶었다 과시가 녹아있는 그의 말은 오히려 그가 돈에 대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의중을 확신하게 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마치 세상에 본인보다 돈이 많은 사람은 없는 것 같이 말하는 오만한 말들을 자주 뱉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사정을 뻔히 알고 있는 나는 네가 그런 말을 뱉을 정도는 아닌 사람같은데, 라며 웃어주고 싶었지만 그 말을 실제로 뱉지는 않았다. 그의 광적인 나르시즘이 어디까지 치솟을까 궁금했다.
*
그와 본격적으로 이별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일주일 간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애를 함으로써 나의 무료한 일상이 재밌어진다는 것은 좋았지만, 내 인생에 피해를 끼칠 정도로 심각한 훼방을 놓는 인간은 뒤돌아 보지도 않은채로 단칼에 끊어냈다. 중산층 나르시즘에 도취한 그였지만 나름대로 순수하게 사랑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경이로워 그와의 만남을 승인한 것이었다. 점점 어떤 일도 손에 들어오지 않을정도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은 마음으로 하루 종일 불안해하며 그의 연락만을 기다린 나는 일주일 후 그로부터 기가 찬 답변을 받았다.
“있지, 내가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연애 할 때가 아닌 것 같아. 주변을 보니까 나 빼고 다들 잘 나아가고 있는 기분이야. 같이 고등학교 나온 남자애가 롤스로이스를 끌고 다니는데.. 야. 걔가 나보다 공부 못했어. 걔는 대학도 안 간 애라고. 근데 어떻게 걔가 그렇게 성공했지? 도저히 못 참겠어. ”
그때 알았다. 그가 사랑했던 모습은 내 모습이 아닌 ‘얼굴 좀 예쁘장 하고 똑부러지고 어딘가 특이한 여자’를 사랑하는 본인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멘사의 회원이었다는 그는 자신보다 멍청하면서 돈을 잘 버는 친구들을 보고 심한 열등감을 느꼈다. ‘어떻게 네가 나보다 성공할 수 있어’ 라는 알량한 그만의 엘리트 주의 오만함. 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 볼 수록 그보다 멍청하고 가난했던 친구들이 더 성공해서 그를 미쳐버리게 만들었으면 했다. 그는 한 마디로 본인이 무슨 엘런 머스크라든지, 스티븐 잡스라든지, 빌게이츠라든지 그런 천문학적인 자산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나르시스트의 끝판왕이었다. 그 부터는 그가 정신병을 가진 것이라 확신했다.
“순 뻥이네. 니체 좋아한다는 말. 니체를 좋아한다면 너같은 사고 방식 못 가지지. 누가 롤스로이스를 끌든 어쩌든.. 걔는 걔고 너는 너야.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하나 열등감 느끼고 부들거리면서 어떻게 살았어? 거기서 넌 이미 틀렸어. 니체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도 없어. 니체는 너의 허영을 장식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이야. ”
그렇게 안개가 걷히듯 오만하고 열등감에 가득찬 그의 모습만이 남았다. 니체를 좋아한다는 말? 순 뻥이 아니겠는가. 그 순간 커다란 회의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중산층 중 결핍을 지닌 이들은 모두 이런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 자신이 좀 배웠다고 생각하고 야망을 가진 남자들은 다들 왜 모양인 것인가? 이제는 확신을 하고 다음과 같은 가치를 일반화 하게 되었다. 본인만이 잘났다는 엘리트주의 야망가들은 싹 다 걸러버려야 한다는 것을. 차라리 똑같은 중산층을 만나더라도 야망이 없는 놈을 만나는 것이 안 그대로 복잡한 내 머릿속에 훼방을 놓는 일은 좀 덜하리라는 것을.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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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라비린쓰 작성시간 22.01.12 글로만 봤는데도 남자놈 재수없어 ㅠㅠ ㅋㅋㅋㅋㅋ 진짜 저런 사고방식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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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퇴사꿈나무열매 작성시간 22.01.12 글잘봤어!!! 저놈뭐야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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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미나리야 작성시간 22.01.12 아 내가 23살에 만났던 반포자이 살고 대원외고 나와서 해외대 나온 남자애랑 헤어졌을때랑 똑같네....ㅋㅋ 여시 글 잘쓴다 고마워 잘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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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아지는 야옹해 작성시간 22.01.13 홀린듯이 1편부터 읽고왔네 이것은 .. 소설일까 경험담일까 궁금해지는 글 뭐가 진짜더래도 .. 간만에 느끼는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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