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1.
어느날은 한없이 냉철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 되다가도 , 어느날은 한 없이 나약해져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런 마음 속에서는 정말이지 내 곁에 누군가 있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나 혼자 이겨낼 수 있어, 괜찮아. 수없이 다짐하고 감정을 잊은 채로 새로운 아침을 맞지만 사실은 괜찮지 않은 순간들이 태반이라고, 내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었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걸 바라는 게 아닌데….”
영은 자신이 연애 상대에게 바라는 마음은 많은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영이 바라는 것은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는 마음이라고, 영이 원하는 건 오직 그것 뿐이라는 말을 했다. 마치 빗속에 잠겨 홀로 길을 걷는 사람처럼 ,영은 조용히 생각 속에 잠겨 있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날 떠나간 사람들은 모두 한결같이 그렇게 말했어. 넌 누구 없이도 혼자서 잘 헤쳐나갈 사람이라는 말. 하지만 어느 누가 혼자서 모든 걸 잘해? 그런 말을 들으면 정말 나를 몰라도 한 없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매일 새벽 끝나지 않는 고독 속에서 내가 얼마나 눈물을 흘리는지 모르면서……”
영은 한없이 공허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영의 그런 표정에는 그 누구도 담아내지 못할 고독이 서려있었다. 고개를 왼쪽으로 젖힌 채로 말없이 다른 곳을 바라보는 영이 특유의 표정. 그 표정을 보면 마음이 크게 아려왔다. 그동안 영이 끝나지 않을 고독 속에서 혼자 새벽을 버텨냈을 생각을 하니 생각지도 못했던 눈물이 흘렀다. 영아. 우리는 마침내 수많은 고독의 시간들 속에서 서로를 알아본거야. 비로소 이 어둠 속을 혼자가 아닌 함께 걸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영원의 약속. 그 순간 나는 영에게 만큼은 상처주지 않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확신을 가졌다. 비로소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생긴 것. 영이 이 새벽 속에서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생겼다.
2.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름 모를 누군가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다.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언젠가는 만나게 될 인연을 생각하는 일, 내일은 기쁘지 않을까 . 좋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괜스레 기대해보는 일. 그렇다면 생각해본다. 나는 도대체 누구를 기다리는 거지?
“영아, 아픔에도 덜 아파하고 기쁨에도 덜 기뻐하게 되는 그런 시간들이 우리에게도 올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는 어쩐지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슬퍼져. 삶이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한다고, 반짝이는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내가 그런 감정 속에서는 모든 것을 져버린 채로 우울에 잠기고는 하거든. 그런 생각들 속에서는 차라리 삶이 그만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 겉잡을 수 없는 감정 속에 휩싸이고는 해. “
어느 순간에는 모든 것이 다 공허해지고 쓸쓸하게 다가오는 시점이 있겠지. 그럴 때 나는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해야 하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정말로 마음이 이상해졌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 수록 모든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 되어버린다. 그런 내가 밉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세상 물정을 알아서 다행이기도 하다는, 양가 감정에 휩싸이는 일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차례 차례 올 한 해 나를 스쳐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린다. 애틋하고 좋은 기억이 가득한 사람이 있는 반면, 밉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던 기억이 있는 사람이 있다. 안 좋은 기억은 훌훌 털어버리고 , 좋은 기억은 간직한 채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게 되는 마음. 내게는 1월이 그렇다.
떠나간 인연들은 감정은 지운 채로 기억을 남겼다.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에는 우리가 서로의 미숙함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될 날이 오기를, 그때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채로 쿨하게 웃게 되는 날이 오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