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엄마. 나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주방에 있는 낡은 후라이팬이든 뭐든 다 갖다 버리고 옷장에 있는 옷도 다 버리고 싶어. 과거의 나를 다 지워버리고 싶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채우고 싶어. 지금 난 너무 정신이 없어. 뭐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모르겠어. 사람도 모르겠어. 누가 진짜야? 누가 가짜야? 그런 것도 다 모르겠어. 그냥 리셋. 어. 그러고 싶어. 그게 맞는 것 같아. 우리 가족도 다 리셋. 아팠던 기억들 다 리셋하고 처음부터 남인 것처럼. 누군진 모르는데 우리가 가족이래요. 그렇게. 그럼 왠지 서로 더 친절해질 것 같아. 조심스러워질 것 같아. 가진 기억이 너무 많은 건 고통스러워. 차라리 다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언제 내가 남친한테 그런 말 한적 있어. 난 사랑을 끝내고 나면 차라리 좋은 기억 사라져도 좋으니까 그 사람을 아예 지우고 싶다고. 왜냐면 너무 아프니까.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니까 그게 나을 것 같다고 그랬거든. 근데 걔가 그러는거야. 그러면 똑같은 실수를 또 저지를 거래. 이터널 선샤인에서 클레멘타인이랑 조엘이 다시 사랑에 빠진 것 처럼 또 그럴거래. 그러니까 본디 인간이라는 존재가 실수를 통해서 뼈저리게 반성하고 다시는 안 저지르겠다는 결심을 하는 건데 그런걸 함부로 거슬러서는 되겠냐는 거야. 하여튼 걔 진짜 보수적이었지? 그런 생각 할 수도 있는거 아니야? 걔는 꼭 그랬어 . 항상 자기 논리에서 어긋나는 건 절대 안 봐줘. 재수 꼴통. 짜증나. 엄마가 그랬잖아 애가 너무 똑똑한게 남편감은 아니라고.뒤에서 무슨 짓 하고 다닐지 모른다고. 응. 그래서 헤어졌어. 그것때문은 아닌데 여튼 헤어졌어.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다 지우고 싶다. 걔도 다 지우고 나도 다 지우고 싶다. 진짜 그냥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어딘가 망가진 애같아. 인생에 초기화 버튼이 있으면 몇 번이고 눌렀을텐데 왜 없는거야. 하여튼 엄마있지, 내가 뿌리던 향수 향도 갑자기 다 질려버렸어. 옷들도 불과 엊그제 입은 건데 싫어. 그냥 다 질려. 미친듯이 질려버려. 그냥 인생이 질린 것 같아. 지금까지 내가 모았던 옷들 물건들 가방들 그냥 다 버리고 처음부터 시작해도 되니까 진짜 그러고 싶다. 모든 기억들 잊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텅 빈 방안에 있고 싶어. 호텔처럼. 자꾸만 회상하게 만드는 물건들이 아무것도 없었으면 좋겠어. 아무 생각도 안 할 수 있게. 진짜 그랬음 좋겠다. 근데 엄마 내 얘기 듣고 있어? 엄마?
엄마 인생도 다시 시작하면 좋을텐데. 엄마 애초에 아빠랑 결혼한 게 인생 최대 실수였지. 어렸을 때부터 생각했어. 엄마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저런 남편을 만났나. 7살 때 씽크대 앞에서 엄마가 술먹고 누워서 소리지르는 거 봤어. 막 울면서 그러는거야 내 인생 잘못됐다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면서 갑자기 캐리어에 짐싸서 집나갔잖아. 한 일주일 동안 엄마가 안들어왔는데. 몰라. 그냥 그때 느낀게 뭐냐면 그냥 우리 가족은 그냥 잘못됐다. 탄생 자체가 그냥 어딘가 어긋나고 이상하다는 거. 남들이랑 진짜 다르다는 거. 그랬어. 체념했어. 차라리 되돌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그것도 아니지? 아무튼 엄마는 머리가 좋아서 진짜로 결혼 안 했으면 더 잘 나갔을텐데. 어쩌면 부잣집 남자 만났을 수도 있었을텐데. 그럼 울더라도 이렇게 추운 바닥이 아니라 나름대로 럭셔리한 바닥에서 울고 그랬을텐데. 엄마도 그런 맘 느끼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근데 되돌릴 수 없어서 존나 원망하고 그랬지? 다 알아. 엄마 일기장 읽은 적 있거든. 엄마가 그런 말을 적었잖아 지금은 다 지나간 일인데 그때는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매일 같이 내 인생이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그래. 엄마 불쌍해. 나도 불쌍하고. 다 불쌍해. 진짜 다 리셋하고 싶어. 그러면 좀 나아질 것 같다. 세상이 살만 해질 것 같다. 요샌 그냥 계속 바닥을 닦았어 하염없이.이러면 아무 생각도 안 들고 좀 기억이 지워지는 것 같아서. 매일 같이 생각해. 지우고 싶다.. 지우고 싶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럴 수 없으니까 사는거지. 뭐 어쩌겠어 살아야지. 살아야지.
그래도 살으려고. 리셋한 것처럼 다시 살으려고. 사실 세상 좆같은데 살아보려고. 뭐 어떡해 태어난 이상 좋게 살다가야지. 어. 그래서 나 지금 공항이야. 티켓 끊고 숙소 잡아둔지 오래야. 오랫동안 안 돌아와. 그러려고 돈 모았어. 엄마 잘 있어. 나도 잘 있어. 다 잘 있어. 나도 행복해질거야. 잘 지내. 내가 좀 달라졌으면 좋겠어서. 그래서 떠나는거야. 여기서 있던 구질구질한 모습도 다 버려버리고 감쪽같이 밝은 애처럼 연기할거야. 존나 좋은 집에서 살다가 온 애처럼 마냥 철부지같이. 행복하게. 그렇게 살다가 돌아올게. 아프지 말고 잘 지내. 엄마도 엄마 인생 잘 살아. 행복했음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