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언니. 소식 들었어요. 그러니까 그게 다 무슨 일이에요. 잘 지내는 줄 알았던 사람이 알고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을 때 제가 느낄 죄책감이 얼마나 클지 언니는 모를거예요. 언니의 감정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언니 보다 제가 감정을 느끼는 데는 더 탁월했으니까요. 그게 다예요.
기차를 타고 브루타뉴 지방으로 여행을 갔던 날 기억해요? 저는 아직도 그 날을 종종 되뇌이고는 해요. 언니는 긴 롱치마에 청바지를 덧대입으면서 추워서 이렇게 입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죠. 저는 요새 이런 옷 스타일이 유행이라 말하며 언니는 뭐든 잘 어울린다고, 그리고 언니가 한 배우를 닮았다고 말했어요. 언니는 그런 이상한 옷스타일도 정말 아무렇지 않게 소화하고는 했잖아요. 종종 언니의 프로필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그렇게 독특한 옷차림을 고집하는 것 같아보여요. 하지만 어울린다면 무슨 상관이에요? 그렇게 자유로운 모습이 언니에게는 참 잘 어울려요. 쿨한 모습, 웃기고 털털한 모습.
처음 우리가 파리에서 만난 날, 언니가 자기보다 더 큰 캐리어를 들고 온 날이 기억나요. 프랑스라는 나라에 홀로 가서 적잖이 외로움을 느끼고 있던 제게 언니는 첫 친구였어요. 건축을 전공하는 언니는 바르셀로나를, 로마를, 부다페스트를. 차례 차례 돌아본 뒤 마지막으로 파리를 왔다고 했죠. 돌아가서는 원래 공부하고 있던 건축 공부를 마무리 짓고, 그 후로 뭘 할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어쨌든 일을 할 거라고 했어요. 언니는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죠. 어떤 회사든 언니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모나고 구겨진 부분이 없었거든요. 전 그게 참 부럽고 신기했어요. 닮고 싶기도 했고요.
우리는 한 멕시코 풍 식당에서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죠. 인간관계로 고민하는 제게 언니는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사람 마음은 유동적이야. 당장 취향하나도 이리 저리 변하는데 사람에 대한 마음은 어떻겠어? 그냥 널 사랑하는 사람 단 한 명만 존재해도 세상은 살만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없어.” 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본인은 절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노력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죠. 저는 겁이 많아서 미움 받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언니는 당당한 사람이었어요. 언니는 가장 아름다운 인연은 어찌됐든 지금을 행복하게 해주는 인연이라고, 그리고 헤어진 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더욱 반갑고 향기가 남아있어 잔향을 떠올리게 되는 인연이 가장 아름다운 인연이라는 말을 하면서 지금 우리의 인연도 어쩌면 그런 향수같은 인연이 아니냐는 말을 했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 언니가, 그리고 이 대화가, 이 분위기가. 앞으로도 마음 속에 오래도록 잔향이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언니는 무화과향이 어울려요. 독특한데 계속 기억에 남는 향. 톡쏘면서도 부드러운 향. 그건 언니의 향이에요.
언니. 그렇게 당당하고 멋졌던 언니가 우울증으로 밖을 나오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는지 몰라요.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표를 끊고 달려가 언니를 만나고 싶었어요. 언니는 멋진 사람이다, 내가 그걸 안다. 언니는 혼자서 이곳 저곳 여행을 다니며 심지어는 강도를 스스로 물리치기까지 했다. 그런 말들을 해주고 싶었지만.. 어쩌면 언니에게 그런 말 조차 들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동굴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설상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하지만 언니. 언니가 제게 그런 존재이듯 다른 사람들에게도 짙은 잔향으로 남아있는 사람일거예요. 언니의 향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분명 언니를 그리워할거예요. 언니가 그리워요. 무화과를 닮은 언니의 향이, 당당한 목소리가, 독특한 에고가.
조만간 여름에 한국에 휴가를 갈 예정이에요. 그때는 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언니의 향을 닮은 향수를 우편으로 함께 부쳤어요. 언니 고향인 부산으로 갈게요. 꼭 볼 수 있기를 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