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불에 절인 위스키
안녕 j
잘 지냈니
잠에서 깨니
나는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먼 곳에 와있었어
누군가와의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어진 것은 정말 오랜만인 일이었어
나는 너와의 기억 한 켠 한 켠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어서
너와의 기억 중 많은 것을 묻어두고 있었지
결국 나에게 너는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열고 싶지만 용기내어 열 수 없는 일기장
사실은 가장 아끼는 색이지만 마음껏 쓸 수 없는 유화 물감
여전히 네가 기억나
너는 기억조차 할 수 없을만큼 멀어지고 만거였어
어린 내게
너는 무엇보다도 큰 존재였고
될 수 있다면 네가 되고 싶기도 했는데
시간이 흘러도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헷갈리는 일이었어
그건 동경이었을까,
혹은 사랑이었을까
아님 둘 다였을까
적어도 네가 내게
계속 들여다보고 싶은 존재였다는 건 확실해
너를 만나고나서 나는
너를 닮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그 장소에 오래 머무는 습관이 생겼어
오래된 Lp바에서
고상하고 어려운 프랑스 독립 영화관에서
사진 작가들이 알음 알음 온다는 도서관에서
예술의 전당을 지나는 길에서
네가 아닐까
아닐거야
맞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너인 것 같아서
오랫동안 흘끗 살펴봐야 했는데
결국 그게 아닌 걸 알았을 때는
알 수 없는 텅 빈 감정에 휩싸여 가만히 서있어야만 했어
넌 자주 차분한 나를 내가 아닌 듯이 만들었지
자꾸만 절제하려는 나를 끄집어 내려고 했고
자꾸만 조력자가 필요하다는 내게
사실 너는 혼자서 무엇을 해나갈 힘이 있다고도 했는데
그때는 잠깐 뿐이지만 내가 정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어
하지만 너와 헤어지고 나면
그런 부풀었던 마음들도 이내 모두 가라앉아버리고는 했지
나는 자꾸 나를 부풀게 만드는 네가 너무 두려웠어
어느샌가부터 머리가 긴 사람을 볼 때마다
너인 것 같아서 흘끗 살펴보는 일이 늘었어
혹시나 너이지 않을까
사실 문자 한 통 넣으면 너와 맞닿을 수 있었지만
내게 그건 흐린 시야로 숨바꼭질을 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지
할 수 있다면 영원히 네 곁에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를 만나고 난 뒤 집에 걸어가는 길에는
그런 건 다 환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널 만나면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을 느끼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도화지가 돼
그건 안 되는 일이잖아
나는 너도 사랑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나를 사랑하고 싶었거든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모르겠는 안개 속에서
다만 그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본능적인 생존의 길이었어
그러니 네가 너무 서운해하지 않기를 바라
언젠가 나는 너의 고향을 간 적이 있어
그 날은 오래된 장마가 멈추고 해가 짙게 내리쬐던 날이었는데
너는 내게 15년을 넘게 살았던 고향을 구경시켜주겠다고 했어
나는 열차의 종착역인 그 역에 먼저 도착해 책을 읽고 있었고
잠시 아주 먼 마을으로 여행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하지만 정작 나보다 네게 자꾸만 감회가 새로운 순간들이라
너는 어린 시절과 너무나 달라진 그 동네의 풍경을
카메라로 담고는 했어
너는 혼자 왔다면 이 감정과 기억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면서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번 하고는 했는데
솔직히 말해 네가 왜 그렇게까지 그 일을 좋아했는지는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어
언젠가 아주 깊은 산 속에 있는 내 고향을
고등학교 친구들이 버스를 타고 함께 가준 적이 있었고
그곳은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곳이라
그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했지
친구들은 네가 아니면 오지 않았을 거라며 고마워 했고
나는 오히려 친구들과 아니면
그곳에서의 기억을 감당할 수 없었을거야
그래서 나는 친구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고마웠고
그건 비로소 네 감정을 이해해보는 계기가 되었지
J
사랑이 꼭 말로 확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순간 우리는 진짜 연인같았는데
고양이에게 눈을 떼지 못하는 나를 보고 네가 바보라고 말하고
어느덧 막차 시간이 다가와 내가 떠나야만 했을 때
네가 끝까지 내 옆을 기다리다 내가 가는 것을 보고나서야 집에 돌아간 것들
그런건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도 맞지?
사랑이었던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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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1년 만에 첫사랑을 다시 만났어. 그 사람이 자기 고향을 소개 시켜주겠다고 말해서 우리는 하루종일 그 곳을 쏘다니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지. 날이 아주 더운 날이었는데도 많이 힘들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에게 집중하는 감정이 더 컸기 때문일까. 우리는 재즈바를 갔다가 투박한 포장마차로 옮겨 술을 마셨고 결국 취한 채로 막차를 타야만 했는데. 그는 나를 데려다 주겠다고 말하며 막차가 떠날 때까지 정류장을 지키고 있었어. 어떤 스킨십도 없고, 사랑한다는 말도 없었지만. 사실은 그날 그 모든 일들이 말로 정립되지 않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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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수정란 작성시간 22.07.14 글 너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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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환경운동가타노스 작성시간 22.07.14 여여 관계라고 읽으니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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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햅삐데이 작성시간 22.07.14 나는 너도 사랑하지만 사실은 그보다 나를 사랑하고 싶었거든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모르겠는 안개 속에서 다만 그것만이 내가 택할 수 있는 본능적인 생존의 길이었어. 이구절 참 와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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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개복치양 작성시간 22.07.15 문장이 너무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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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진지하게똥마려움 작성시간 22.07.15 열고 싶지만 용기내어 열 수 없는 일기장
사실은 가장 아끼는 색이지만 마음껏 쓸 수 없는 유화 물감
하..이 부분 너무 좋아서 곱씹고 있어 글 너무 예쁘다 잘 읽었어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