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여시문화생활]]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빈자리를 돈으로라도 벌충하고 싶은 거다.

작성자버지니아풍년화|작성시간22.10.02|조회수2,802 목록 댓글 1

출처 : 여성시대 버지니아풍년화


... 그러니까 아빠를 만나서 돈을 받으라고. 안 만나는데 어떻게 돈을 주냐고 했다고. 그러니 한번 만나서 얘기라도 해보고 돈을 받아내라고. 주는 돈은 무조건 받으라고. 지긋지긋한 말을 듣던 나는 뭐라 쏘아붙이고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

오빠가 돈 얘기 그만하라고, 자기 전세방을 빼서 나한테 돈을 주든지 할 테니까 그만하라고 했다는 게 생각이 났다. 불행을 비교하자는 건 아니지만 오빠는 참 참을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순간 웃음이 났다. 나는 엄마의 그런 억지와 하소연을 20년도 넘게 들었다. 오빠는 아빠가 바람을 피운 사실도 최근 들어 내가 말해줘서야 알았다. 아빠는 이미 그 여자와 내 나이만큼은 알고 지낸 사이였다.

속이 답답해서 전화를 끊어버렸지만 바로 후회했다. 엄마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며 소리 없이 우는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늘 엄마의 눈물에 약했다. 가끔은 엄마가 이런 내 마음을 알고, 불리할 때마다 일부러 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나는 18살 이후로 엄마 앞에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었다. 내가 통곡을 하면서 내 마음을 말했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규하면서 소리쳤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엄마는 그저 냉담히 서 있었다.

그렇지만 엄마가 울면 나는 그냥 내가 잘못한 것만 같고 내가 너무 싸가지 없고 이기적이고 못돼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긴 했다.

.

엄마는 언젠가부터 아빠 재산 파먹기에 몰두했다. 어떻게든 나를 이용해서 아빠 돈을 뜯어내고 싶어 했다. 아빠한테 돈을 받아내라고 윽박질렀다. 내가 그딴 돈 필요 없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어릴 적의 나와 같았다. 어릴 때의 나도, 엄마에게 돈을 뜯어내려고 안달이었다. 기저 심리도 같겠지. 상대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빈자리를 돈으로라도 벌충하고 싶은 거다. 뭐라도 그에게서 가치 있는 것을 받아내고 싶은 거다.

엄마의 심리상태는 청소년기의 내 수준과 비슷했다. 아마 영원히 이런 상태를 유지할 것이다. 나는 이미 엄마의 온전한 사랑을 받는 것을 포기하고, 마음속 어딘가가 늘 공허한 채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을 테니. 엄마는 이미 자신의 생각에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

.

이틀 뒤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를 만나보겠다고 했다. 내 안에는 엄마를 사랑하는 자아와 미워하는 자아와 엄마에게 냉담한 자아가 있는데, 이번에도 엄마를 사랑하는 자아가 이겨버린 것이다.

아빠를 보는 건 1년 만이었다. 아빠가 우리 모녀를 위협하고 집을 나가 그 여자와 본격적으로 동거한 후로 처음 보는 거였다. 나는 독립한 후로 본가에 자주 가지 않았다. 갑자기 아빠가 문을 열고 들어와 나를 때릴 거라는, 혹은 죽음에 이르게 할 거라는 망상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사실 나를 물리적으로 때리지 않는다고 해도 아빠를 대면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나는 아빠를 평생 보지 못한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다. 아빠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후회를 할 수도 있겠지만, 후회를 해도 좋을 만큼 아쉽지 않았다.

아빠에게 그렇게 속고도 아빠가 순순히 돈을 줄 거라고 생각하는 엄마도, 그 등쌀에 못 이겨 나가기 싫은 자리에 나가는 나도 참 우스웠다. 바람을 피워서 나갔으면서 부모 자식 간이라는 고리를 끊기 싫어서 어떻게든 나를 만나려고 하는 아빠도 우습긴 마찬가지였다.

촌극이 따로 없다. 세상에는 이런 일이 널려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적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평범한 일에 그렇게 마음을 써야만 하는 내가 더욱 작게만 느껴졌다. 나는 너무 보잘것없는 사람이고, 때로는 그 사실이 사무치게 싫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고기압 | 작성시간 22.10.03 사랑이 떠나간 자리에 돈으로라도 채워야지..난 너무 이해해..나라도 그럴거야 백퍼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