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AWAKE
본문에 나오는 글은 모두 백영옥 작가의 소설 '애인의 애인에게'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애인의
애인에게
백영옥 장편소설
실패로 끝난 누군가의 사랑 이야기는 아무리 길어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작가의 말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생기는 외로움과
사람을 좋아해서 생기는 서러움 중
어느 것이 더 힘든 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 감정이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절망인지 슬픔인지, 구별할 수 없을 때
이혼 도장을 찍은 건 분명했다
P.18,19
어둠이 생기는 건 필연적인 빛 때문이다.
P.21
짝사랑은 '너는 누구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지만
그것은 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는다.
'너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렇다면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질문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소요되는 혼란이
이 적요로운 사랑 앞에선 어느덧 무의미해진다.
P. 35
나는 그 누구의 사랑도 이어지지 않는 저녁 속에 앉아 있었다.
그런 것들이 더 이상 서글프지 않았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기 때문에
나 이외의 누구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란 점에서
짝사랑은 선한 인간들이 선택하는 자학이며 자책이니까.
P.36
1월에 내리는 눈을 첫 눈이라 말하는 여자와
11월의 눈을 첫 눈이라고 기억하는 남자가 기적처럼 만나 연애란 걸 한다 해도,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정체성을 만들기는 힘들다는 것.
그러므로 그것은 헤어지기 직전이거나,
헤어지는 중인 연애가 되리란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P.55
생각보다 일찍 찾아오는 깨달음 같은 건 없다고,
생각보다 늦게 찾아오는 이별이 없듯이.
누군가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농담으로 들린다면, 그건 잘못된 삶이라고.
그러므로 나의 삶은 완벽한 실패라고.
P.58
나는 버림받을 뻔한 아이가 보냈을 어떤 시간을 짐작했다.
자기 안의 많은 것들을 버려야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외로움.
그 시간을 견디고 나면, 삶의 어느 순간도 지금보다는 덜 외로운 거란 생각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을 시간을 말이다.
버림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므로 먼저 버리는 것밖에 없다는 걸 그 역시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P.84
고통은 내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고통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통은 일부를 쪼개어 누군가에게 쥐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손목을 세 번이나 그어야 하는 고통은,
정맥이 차가운 면도날에 눌리고 끊기는 그 고통은,
성주의 말 한마디로 의부증이란 흔한 병명으로 추락했다.
나의 고통이 그의 절망일 수는 있어도,
나의 고통이 의부증일 순 없었다.
P.157
한 순간도 외롭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이전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외롭지 않았단 걸 알 것 같았다.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외로웠던 시절의 내가 꿈꾸던 미래였기 때문에
나는 더 외로워졌다.
P.160
성주는 나를 몰랐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사랑이 얼마나, 어디까지 다를 수 있는지
그는 상상하지 못했다.
P.169
결혼을 결정하고, 이혼 서류를 작성하고, 이혼을 선언한 건 나였다.
사랑의 진짜 권력은 무엇을 하는 게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날의 성주처럼.
P.179
인간은 각자의 사랑을 할 뿐이다.
나는 나의 사랑을 한다.
그는 그의 사랑을 한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그가 나를 사랑할 뿐, 우리 두 사람이 같은 사랑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너무나 외로워 내 그림자라도 안고 싶어졌다.
P.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