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조울증
미친 계절의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 뜨겁게 끓어올랐던 지난 여름은 내게 몇 도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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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네 잔을 주문하신 고객님이 오픈 카운터에 놓여있는 시집을 보고 말을 붙이셨다.
‘요즘 시집 읽는 사람을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배달 오토바이를 뒤에 세운 채였다.
‘시를 읽는다는게, 타인의 감정을 소화시켜야 하는 거니까. 시집 보는 사람이 잘 없더라고. 자기 들여다 볼 시간도 없는 세상이니.’
그러게요. 시란 그런 거였죠. 소설과는 다른,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을 뭉쳐 횟감처럼 늘어 놓은 것.
‘국어국문과에요?’
저는 경영학과를 중퇴한 낙오자랍니다. 커피 네 잔을 만들 시간으로는 하지 못 할 이야기가 될 것 같아 대충 경영을 전공했다고 대답했다.
새삼 책이란 누구에게나 공평한 것이구나, 생각해본다.
배달대행사 사장과 카페 알바생이 주말 아침부터 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웃긴 풍경.
어떻게, 커피를 딱 네 잔 시키신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게 적당히 마무리 되었다. 그라인더 소리에 묻혀 서로 듣지 못한 채 생략된 단어들도 많았지만 또 그 덕분에 대화는 적당히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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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길.
말라붙은 매미의 시체가 차도의 한복판을 굴러다녔다. 횡단보도를 건너다 잠시 멈추어 들여다봤다. 박제된 듯, 모형인 듯 온전한 형태. 나무에 붙어 울고 있었을 녀석이 어쩌다 여기에.
아주 지난 여름, 나도 이 비슷한 모습이길 바란 적이 있었다.
지독한 여름 태양에 말라붙어 자살도, 타살도 아니게 죽은 상태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모든 것들에게 성장을 재촉하듯 타오르는 햇살을 배신하고 그 누구의 책임도 없는 곳으로 도망을 치고 싶다고.
걸음을 떼어 신호등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마저 건넌다.
양산을 고쳐들어 따가운 햇빛을 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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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과 친절은 어디서 나오는가. 누군가 그 원천은 ‘마음의 여유’ 라고 주장했고,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마음의 여유는 또다시 체력의 여유에서 비롯되니 결국 신체건강한 사람이 성실하고 친절하기에 더 유리하다는 거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런데이 성우가 지겹도록 외쳐댔던, 너무 뻔한거 아냐, 싶었던 말.
그래서 요즘 성실과 친절을 매일 실천하려고 노력 중.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이겠지만 내겐 조금 많이, 힘들었던 것들이라.
나의 기질이라 여기고 변명거리로 삼았던 예민함이, 오히려 매일 운동을 해 지친 몸상태에서 더욱 흐려진다.
나는 잡생각이
너무
많았다.
근육을 써. 뇌도 근육이니 뇌 대신 다른 근육을, 매일, 열심히, 많이 쓴다.
몸의 근육은 뭉치고 뇌는 헤실헤실 풀어진다.
내일은 간만에 운동을 빠지고 늦잠을 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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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요즘 산다는 게 뭔지,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고 근본적인 고민을 다시 해보고 있어. 그러다 책에서 발견한 구절이 참 맘에 들더라. 스스로의 비틀린 부분을 수정하고, 죽음으로부터 도망쳐 살아있는 예술가가 되는 것이 예술하는 사람들이 해야할 일이라고.
오랫동안 내 비틀린 부분에 매몰되어 집착하고 더 빠져들었던 기억이 난다. 우울하지 않다면 글도 그림도 할 수 없다고 여겼어. 하지만 요즘 매일 운동을 하고 햇빛을 보고 돈을 벌면서, 우울하지 않아도 충만한 것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곤 해. 그리고 잠들기 전 누워서 생각하지. 오늘도 참 열심히 도망쳤다고. 죽음을 가만히 넋놓고 기다리고 있지 않았다고. 이번 여름은 내게 가장 찬란한 도피로 기억될 것 같다.
군대 간 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발췌.
음악한다고 입대를 미루다 하필 한여름에 입대한 녀석, 군악대 지원을 실패하고 강원도로 날라가버리고, 그럼에도 좋은게 좋은거라며 거기 밥이 그렇게 맛있다더라, 우스갯소리를 했지만.
글자로는 표정을 읽을 수가 없어서. 그저 드러난대로 잘 지내고 있다고 믿어야지.
정말로 잘 지내고 있을 놈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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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적이지 않은 것에 자주 몰두할 것.
달 사진을 찍고, 가끔 일출을 보러 가고, 비오는 날 나뭇잎을 쓸어보고, 그림자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바닷가에서 예쁜 돌을 찾아 헤매고.
쓸데없는 일상이 결국 내 인생을 구할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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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계절의 끝자락이다.
늘 그렇듯 뜨겁게 끓어올랐던 지난 여름은 내게 몇 도였나.
8월 말 썼던 문장, 그 미친 계절이 좀처럼 끝나질 않아 지금까지 묵혀두다 꺼냈다.
그때 썼던 뒤따라오는 단어들은 싱싱함이 가버려 그냥 메모장에나 묻어두기로 한다.
여름이 좋다. 더운 가을은 싫다. 이미 잃어버린 사계절을 온전히 되돌려받기는 그른 것 같지만 더이상 빼앗기지 않기를 바람이다.
(사실 빼앗은 쪽이 인간들이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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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가온 여름의 끝자락, 지난 계절 동안 썼던 일기의 일부 .
예전에는 그저 내 감정의 밑바닥을 긁어내는데 바빴는데 요즘은 조금 담백하고 일상스러운 글을 쓰게 된 게 신기해서 살짝 꺼내놓고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