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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국립김해박물관 히타이트 특별전시 후기+책 추천

작성자세차|작성시간24.11.14|조회수10,300 목록 댓글 28

출처 : https://www.fmkorea.com/7656212183

 


정성스럽게 설명 잘해놓은 글이라
방문할 여시들에게 더욱 재밌게 설명까지 같이 보았으면 해서 퍼온 글임!

 

 

 

드디어 국립김해박물관

히타이트 특별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각별히 애정하는 히타이트니까 엄격하게

또 자세하게 리뷰 한 번 드가보겠습니다.

 

(저는 전공자도 아닌 퍼킹 아마추어입니다. 

너무 신뢰하지는 마세요!)

 

 

사진 드럽게 못 찍습니다!

실물이 훨씬 보기 좋아요.

 

 





관람료는 무료

 

일정은 위 사진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 ÇORUM MUSEUM ⟫



이번 전시는 튀르키예 초룸 박물관의 소장품 전시구요.

초룸은 히타이트의 수도인 '하투사'의 유적이 있는

보아즈칼레가 속해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다 보니, 초룸 박물관에는 히타이트 

관련 유물이 다수 소장되어 있습니다.

 

 

 

 

 




 

기획 전시실 1층에 가면 이렇게 큼지막하게 안내해 줍니다.

 

보자마자 히타이트 위의 쐐기문자가 눈에 들어왔는데요.

 

 

 

 

 




 

이건 당시의 히타이트를 의미하는 

'하티'를 히타이트 쐐기문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히타이트라는 이름은 성경의 

헷 족속에서 유래된 이름이에요.

 

 

위의 필체는 울리쿠미 폰트라고

벨기에 학자 실비 반세버렌이

히타이트 쐐기문자를 유니코드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것입니다.

 

 

전시의 쐐기문자 표기에는 모두 이 폰트가 사용되었는데

대충 기본으로 사용 가능한 유니코드 쐐기문자가 있음에도

울리쿠미 폰트를 사용한 디테일이 좋네요.

 

 

 

 

 




 

전시실 초입,

위와 같이 뽕차는 설명과 함께 시작됩니다.

 

 

사실 당시 지중해 세계는 전 세계 강대국이

전부 포진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지라,

(애초에 국가 수준의 정치 체제가 많이 없었으니..)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군사력을 보유했던

전성기 히타이트는 정말 막강한 나라였죠.

 

 

그렇지만, 히타이트의 위상과 국력은 

오랫동안 불안정하고 들쭉날쭉했으며

상당 기간 중견국 내지는 지역 강국 

정도에 머물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청동기 제국'들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제국의 이미지에

걸맞은 사이즈는 아니었어요.

 

 

옛날에는 히타이트를 무조건 철과 엮어서 설명하고는 했는데

발달한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설명이 아주 좋네요.

 

 

 

 

 





바로 옆 벽면에는 이런 구절이 있는데

당연히 히타이트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위 구절은 아카드어입니다.

 

 

 

 

 






1. 아와트 타바르나 루갈갈 샤 안바르

=> 타바르나 대왕의 말씀은 철과 같다.

 

2. 샤 라 나데 샤 라 셰베림 샤 우쉬파후

=> 소홀히 할 수 없고 파괴될 수 없으며 이를 바꾸는 자는

 

3. 사그두수 이나키수

=> 머리를 베어버릴 것이다.



 단어

아와트: 말 / 타바르나: 히타이트 왕의 이칭 / 루갈.갈: 대왕, 수메로그램* 루갈(루(사람)+갈(관)=왕)+갈(관)

샤: 대충 관계대명사의 역할 / 안.바르: 철, 수메로그램 / 라: 부정의 의미

나두: 방치하다, 소홀히 하다. / 셰베룸: 부수다, 파괴하다. / 푸후: 대체하다, 바꾸다.

사그.두: 머리, 수메로그램 / 나키수: 베다, 도살하다.

 

* 수메로그램: 수메르어를 차용한 표어문자(Logogram) 표기.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상

 

 

 

사소한 트집 하나 잡자면

터키 알파벳 ı가 '으' 발음이기 때문에

예르카피(Yerkapi)가 아니라
예르카프(Yerkapı)가 맞습니다.

 

뭐 발음이야, 저도 글 쓸 때마다

조때로 쓰기 때문에...

 

 

 

 

 

하투사의 구조

 * 램파트: 방어를 위한 성벽의 경사 구조물

 

 

히타이트의 수도 하투사는 약 180 헥타르* 정도의 크기로

* 1 헥타르는 약 3,025평(축구장 면적(FIFA 규정)이 약 2,160평)

당시 기준으로는 매우 큰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입니다.

 

약 6.6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지형적으로 방어에 용이한 구조였습니다.

또한, 샘들과 저수지가 있어서 

수자원 확보에 유리했습니다.

 

 

다만, 하투사가 수도로 기능하기에 

인력이나 효용이 높은 곳은 아니었는데

 

 

前하투사 발굴팀의 총책임자였던 위르겐 제어 같은 경우,

하투사의 인구가 5,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고 다른 학자들도 보통 10,000~20,000명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는 람세스 2세가 일군 수도인 피람세스가

많게는 30만 명이 넘는 인구를 수용했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것과 상당히 대조됩니다.

 

히타이트라는 국가의 체급을 생각하면

당시 비슷한 다른 강대국의 수도와 비교해도

상당히 적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형적으로도 교통이나 유통이

그다지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예전에 히타이트 철기와 관련해서 쓴 글에서

지적했다시피, 과거에는 이런 하투사가 수도로

기능한 이유가 바람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계곡의 자연풍을 풀무 대신 이용해서

철을 제련했다는 가설이 마치 정설처럼

한국에서 통용되고 있었죠.

 

현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가설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투사는 종교적인 측면이 강했습니다.

고대 도시가 모두 그랬지만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사원이자

신들의 집이기도 했는데 

 

 

왕권은 종교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이 있었고

하투사는 히타이트 종교의 중심지이자

그 자체로 왕권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무와탈리 2세가

수도를 타르훈타사로 천도한 것을

'하티의 신들과 조상의 영들을 데리고 갔다.'

라고 묘사하는 표현이 나오기도 합니다.

 

 

즉, 하투사가 수도로 기능한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방어의 유리함, 풍부한 수자원,

관습적인 수도, 종교와 왕권의 중심지 등

 

여러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아르자와 왕국과 카스카의 공격으로 몰락할 뻔한

히타이트를 당대 최강의 국가로 만든

수필룰리우마 1세 시절의 강역입니다.

 

 

수필룰리우마는 그야말로 '위대한 찬탈자'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리는 인물인데

원래 정당한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혹은 장인어른이었던 투드할리야 2세*

* 혹은 3세, 넘버링 논란이 있는데 저는 그냥 2세라고 하겠습니다.

휘하의 명장으로 맹활약한 구국의 영웅이었고

정당한 왕위 계승자인 '젊은 왕 투드할리야'를

죽이고 왕좌에 앉은 인물입니다.

 

 

주의할 점은 당시 고대 중근동 세계에도

영토나 국경이 명시된 기록은 많지만

이런 고대 지역의 지리적 파악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고

 

 

근대 이전 영토나 국경, 국가의 개념은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이하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고대에는 그 구분이 너무나 모호했어요.

 

 

지도에 표현된 넓은 강역이 주는 뽕맛이

아주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것은 맞지만

저는 이런 역사적인 지도를 볼 때,

항상 좀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느낌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죠.

 

 

 

 

 


히타이트와 주변 세계, 히타이트 학자 트레버 브라이스

 

히타이트 신왕국(제국 시기)의 구조가 어땠는지 살펴보면

조금 더 수월하게 당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먼저 수도인 하투사를 중심으로

왕국의 심장이자 핵심 지역인

본토, 하티 땅이 있습니다.

 

 

그 동쪽 사무하를 중심으로

북쪽의 하크피스, 네릭 등의 도시를

포함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부 땅이 있고

 

 

남서쪽 콘야 평원을 포함한 하부 땅이 있는데

이 두 지역은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본토를 수호하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주로 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상부 땅은 상당히 중요한 행정 구역으로

주로 왕족이 총독(EN.KUR 땅의 주인)으로 다스렸고

하부 땅은 비교적 독립적인 행정 체계를 갖추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와탈리 2세가 하부 땅의 타르훈타사로

천도하면서 그 중요도가 급격하게 올라갑니다.

 

 

심장인 하티 땅, 그걸 둘러싼 상부와 하부 땅이

이제 히타이트의 몸통이라고 보시면 되고

거기서 뻗어나가는 각지의 제후국이

히타이트의 팔다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수필룰리우마가 왕자인 피야실리와 텔리피누를

각각 시리아의 카레케미쉬와 알레포의 왕으로 세운 이후,

왕족이 직접 통치하는 일종의 아파나쥬(왕자령) 왕국이

형성되었는데 그 권한이 상당히 독립적이고 막강했습니다.

 

 

나중에 하투실리 3세가 통치한 상부 땅의 하크피스, 

무와탈리 2세 사후 그의 후손들이 통치했던 

하부 땅의 타르훈타사 등

 

 

신왕국 말기에는 이런 독립적인 권력 중심지가

히타이트 내부 안에 점점 더 많아지는데

현대 학자들은 이것이 '히타이트 붕괴'의

대표적인 요인 중 하나라고 여깁니다.

 

이 부분은 기회가 있으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드디어 첫 유물 소개네요.

 

하나하나 다 소개하면 끝도 없을 것 같아서

덩어리 덩어리로 살펴보겠습니다.

 

왼쪽은 청동으로 만들어진 병기들입니다.

창촉, 화살촉, 청동검날, 도끼, 미늘 갑옷 조각 등이 있네요.

 

 

오른쪽은 톱인데 사진으로 봤던 유물을

실제로 보니까 상당히 신기했습니다.

상당히 정교하게 잘 만들어졌죠?

 

 

정말 아쉬운 거는

 

 

 

 

 




 

투드할리야가 풍우신에게 바친 개간지 청동검이

초룸 박물관에 있는 것으로 아는데 아무래도 

스타 유물이다 보니까 허가가 안 났나 봅니다.

 

까비..

 

 

 

 




 

 

이 녀석들은 주조와 관련된 유물들입니다.

친절한 그림 설명이 같이 있어요.

 

 

맨 왼쪽에 있는 유물은 냄비 풀무라고 하는데

원시적인 풀무의 형태 중 하나입니다.

 

 

기원전 18세기부터 퀼테페(카네쉬) 및

고대 근동 전역에서 출토되고

이집트 벽화에서도 그 모습이 묘사됩니다.

 

 

 

 


냄비 풀무 유물들, 크리스토퍼 데이비

 

저 7번이 정확히 저 유물이랑 같습니다.

논문에서 그림으로 보던 걸 

실제로 보니까 정말 신기하네요.

 

 

이집트 벽화는 신왕국 시대 18왕조의

재상이었던 레크미레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레크미레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다가

모종의 이유로 해임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무덤에서 키프로스 사람들이

소가죽 주괴를 바치는 묘사라던가

 

 

막강했던 18왕조 시기 이집트의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병기 나왔으니까 전쟁 이야기도 나와야죠.

 

당대 최대 규모로 꼽히는 카데시 전투를

멋진 영상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이어서 '카데시 조약', '은 조약', '영원 조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집트-히타이트 조약'의

내용이 위와 같이 나옵니다.

 

 

 


 




 

 

람세스 2세의 출생명과 즉위명이 있는 카르투슈입니다.

보시는 것처럼 신성문자(이집트 상형문자)는 

순서가 정말 난해합니다.

 

 

저렇게 신이나 파라오와 관련된 문자는
존칭 전치(honorific transposition)라고

앞으로 가고 또 보시면 공간에

딱 맞게 문자가 들어가 있는데

균형미를 중시해서 그렇습니다.

 

이런 높은 유동성이 해석을 난해하게 만들지만

대신 착착 들어간 모습이 좀 예쁘죠?

 

 

 

이집트-평화 협정에 대해서 짧게 이야기해 보자면,

기록상 최초의 평화 협정이라는 이야기가 많은데

 

사실 좀 애매합니다.

 

일단 기록상으로도 히타이트랑 이집트가

이전에도 이미 조약을 했었다는 근거는 

명백하게 남아있어요.

 

무르실리 2세의 기록에도 소위 쿠루스탐마 조약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의 이전 조약이 언급되는데

 

히타이트 역병이 창궐한 이유 중 하나를

자신의 아버지인 수필룰리우마 1세가

이를 어기고 이집트를 공격했기 때문에

신벌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또한 카데시 조약 자체에도 이전에 맺어진

전통적인 조약에 관한 언급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남아있지 않아서 평화 조약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히타이트는 키주와트나와

평화 협정에 가까운 조약을 이미 했었고

이런 사례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훨씬 이전부터 몇 차례나 확인됩니다.

 

 

라가쉬-움마 조약, 아카드-엘람 조약,

평화 조약 및 무역 협정이라 볼 수 있는

이르캅-다무 왕의 에블라-아바르살 조약 등

 

 

이 중에는 평화 협정으로 볼 수 없다는

견해가 나오는 것들도 있지만

어찌 됐든 이집트-히타이트 조약이

기록상 최초의 평화 협정은 아니라는

의견이 조금 더 타당해 보입니다.

 

 

다만, 이집트-히타이트 평화 조약에는

양국의 '평화를 향한 의지'가 분명하게 명시되며, 

 

구체적인 내용과 양쪽의 사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평화 조약이기 때문에

 

그 특별함은 단연 돋보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히타이트의 융화 정책이나 

종교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내용도 있고

 

마치 부조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멋진 영상도 틀어줍니다.

 

 

 



돌도끼와 청동 낫

 

 

오르타쾨이(사피누와) 종교 건물에서

출토된 것으로 청동 낫에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저렇게 문자가 새겨진 무구(武具)는

대부분 상징적·의례적 용도였습니다.

 

 

제가 예전에 오해하고 헛소리한 적이 있는데

의례용이라고 반드시 '의례용 가검'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가검/진검 여부보다는 '그 유물이 어떤 용도였나'를

구분하는 것이라, 진검인 경우도 매우 많습니다.

 

중근동 지역 청동기 유물에서는 의례용 진검이

너무 많이 나와서 이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 무구=대부분 의례용(가검)'

이라는 인식이 있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회원님이 의례용(가검)이

아니었다고 설명하시는데 제대로 안 보고

헛소리한 적이 있어서... 매우 반성합니다.

 

 

 

 

 

 




전시 관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연표도 있습니다.

 

 

잘 보시면 이상한 부분이 있습니다.

 

무와탈리 2세의 재위가 기원전 1310~1282년인데

1274년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에 참여했죠.

 

 

오류는 아닙니다.

 

3,000년이 넘은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해당 연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연대법', '동시성 연대법'과 관련된 문제인데

이거는 정말 너무 복잡하고

아직도 계속해서 논쟁이 오가는 주제라

간단하게 중요한 포인트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대의 사건이나 왕들의 재위 기간을 추정하기 위해

당시의 천문학적 기록이나 연대기 같은 사료를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이 '연대법'입니다.

 

또 동시대에 존재했던 다른 왕들과

사건들을 서로 일치시키면서

연대를 추정하는 것이 '동시성 연대법'입니다.

 

 

카데시 전투가 기원전 1274년에 배치된 것은

람세스 2세의 즉위를 기원전 1279년으로 가정하는 것이

학계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많이 거론되는 연도가 기원전 1290년인데 람세스 2세의 즉위가

이르면 더 자연스러운 부분이 좀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쪽을 더 선호합니다.)

 

 

카데시 전투는 정확히 람세스 2세 재위 5년에

발발했고 평화 협정은 재위 21년에 맺어졌습니다.

이거는 당대 기록이 확실하게 남아있어서

이를 토대로 카데시 전투와 평화 협정의

추정 연도가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히타이트 왕들의 재위 기간은

얼마나 정확할까요?

 

매우 불확실합니다.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이집트는

연대 추정에 도움이 되는 사료들이

확실히 있어요.

 

 

물론, 그럼에도 이 사료의 정확성이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많은 정보를 제공해 줍니다. 

 

 

히타이트는 그런 사료가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무르실리 2세가 남긴 기록이

재위 기간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이지만

이마저도 후반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몇 년을 통치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히타이트 왕들의 재위 기간은

많은 부분이 '동시성 연대법'에 의존합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학자들이 선호하는 배치는

무르실리 2세의 즉위년을 기원전 1321년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르실리 2세의 10년 차 기록에서

언급된 '태양의 징조'를 일식으로 해석한 결과에요.

 

 

여기서 이게 또 얼마나 정확하냐?

일식은 맞냐? 맞으면 저 때가 확실하냐?

 

이거저거 따지면

끝이 없으므로 충돌이 없는 선에서

정리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연표는 작정하고 공부할 거 아니면

그냥 '아 이 만큼 오래되었구나~'

하고 넘어가야 마음이 편해요.

 

 

 




 

이런 토기 유물도 많구요.

 

 

 

 

 




부럴 항아리 밑

 

사자와 염소 토기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로 여겨지는

쥐트부르크(독일어 남쪽 성) 금석문이 새겨진

채임버 2의 수필룰리우마 2세 부조입니다.

 

 

여기서 왜 '신이 된'이라는 표현을 썼냐면

저 황소 뿔 모자가 고대 근동에서

원래 신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히타이트에서는 왕의 죽음을

'신이 되었다.'라고 표현하고

조상의 영을 신처럼 모셨는데

그래서 부조의 인물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왔습니다.

 

 

또 부조의 수필룰리우마가 히타이트

마지막 왕인 2세가 아니라

위대한 선조였던 수필룰리우마 1세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됩니다.

 

 

대다수의 학자는 신격화된 수필룰리우마 2세를

표현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담이지만, 이집트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는데

파라오의 죽음을 '매가 하늘로 비상했다.'라고

간지나게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 그림은 채임버 2 중앙 안쪽 벽면의

부조를 묘사한 것인데요.

 

앙크를 쥔 태양신이라고 여겨집니다.

머리 위에는 태양신이나 왕의 상징인 

날개 달린 태양이 있습니다.

 

보통 이걸 베흐데티 양식이라고 부르는데

고대 이집트에서 보호와 권위의 상징이었고

메소포타미아에서도 비슷한 양식이 나타납니다.

 

 

위의 태양신은 하늘의 태양신으로 여겨집니다.

히타이트에서 주로 숭배되는 태양신은

최고신 부부 중 아린나의 태양 여신입니다.

 

이 하늘의 태양신은 원래

그다음 가는 태양신이었지만

히타이트 말기에는 왕권을 수호하는 신으로

그 지위가 매우 높아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휴 복잡하죠?

 

원래 다신교가 대부분 그렇지만

히타이트는 워낙 많은 집단의 종교를

흡수해서 체계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풍우신만 해도 각 지역에 다양하게

있어서 어느 신이 어느 신인지 정말 복잡해요.

 

하투실리 3세 시절부터 종교의 통합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후르리 종교의 신들과 합쳐지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하티의 풍우신은 테슈프, 아린나의 태양 여신은 헤파트

위의 하늘의 태양신은 후르의 태양신 시미게와 동일시됩니다.

 

 

또 하나 말씀드릴 것이 히타이트 종교에도 

의전 서열처럼 신들의 숭배 순서가 있긴 했지만

그게 확고부동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보통 하티의 풍우신, 아린나의 태양 여신을

히타이트의 최고신으로 여기는데

 

이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진 것이

각 군주의 수호신 내지는 후원신입니다.

 

예를 들어, 무르실리 2세는 자신의 수호신인

아린나의 태양 여신의 열렬한 신도였고

 

무와탈리 2세는 (아마도 하티의 풍우신의

새로운 위격이었던) 번개신 피하사사를

최고신으로 숭배했습니다.

 

하투실리 3세는 이슈타르와 동일시되는

후르리 신앙의 샤우쉬카를 어린 시절부터

숭배하며 그 어떤 신보다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서열은 엄청 엄격하게

고정된 것은 아니었어요.

 

한국에서는 바람의 신(바람의 신 아님)만을

최고신으로 섬겼다는 잘못된 이야기가

많이 알려져 있었죠.

 

지금도 히타이트 관련 유튜브 영상 보니까

다 그 얘기 하더라구요..

 

 

 

꺾인 지팡이는 히타이트어로 '칼무쉬'라고

부르며 '목자(牧者)의 지팡이'를 상징합니다.

 

고대 중근동에서 널리 사용된 왕권의 상징이었는데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백성을 양, 군주를 목자로

비유하는 기록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양(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이 목자(왕)의 의무'

 

 

 






국립김해박물관 학예사분들이 직접

튀르키예까지 가서 탁본을 떠온

쥐트부르크(남쪽 성) 금석문입니다.

 

 

설명을 기가 막히게 잘해놓으셨네요.

위 문자는 '루위아 상형문자*'인데

* 사실 루위아어에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아나톨리아 상형 문자라는 말을 더 선호하기도 합니다.

설명대로 부스트로페돈 방식으로

읽어야 합니다.

 

부스(소)+스트로페(돌다)

즉, 소가 도는 모양.

소가 밭을 가는 모습을 위에서 보는 것처럼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편해요.

 

 

루위아 상형문자 해석에 지대한 기여를 한

영국의 학자 데이비드 호킨스가 처음으로

위 금석문을 해석하여 발표했습니다.

 

 

사소한 지적을 하자면,

카파 아담[족장]은 조금 부자연스럽습니다.

 

루위아 상형문자 전자 규칙에 따라 족장을

라틴어로 CAPUT(머리).VIR(남자)라고 표기하는데

이걸 그냥 현대 터키어로 옮기면 카파 아담이에요.

 

그러니까 사실 카파 아담은

빼는 게 더 자연스러운 번역이죠.

 

 

전자(轉字, transliteration) 규칙에 관한 설명을 해드리자면,

 

1. 히타이트 쐐기문자 DUTUŠI-wa ŠU-an A-NA DUMU.NITA pa-a-i

 

  • 위 첨자 D는 뒤에 나오는 것이 신(여기서는 히타이트 왕의 존칭)이라는 걸 알려주는 결정문자입니다.
  • UTU, DUMU, NITA 같은 대문자 표기는 뜻을 나타내는 수메르어 표기(수메로그램)를 의미합니다.
  • A-NA 같은 대문자 이탤릭체는 아카드어 차용어(아카도그램)를 의미합니다.
  • pa-a-i 같은 소문자는 히타이트 음절 표기입니다.

 

" 폐하(태양)께서 아들에게 도움(손)을 주셔야 합니다. " 

 


2. 루위아 상형문자 (DEUS)TONITRUS-hu-na

 

  • DEUS(신), TONITRUS(우뢰)처럼 뜻을 나타내는 문자에는 라틴어로 대문자 표기를 합니다.
  • hu, na는 여기서 음성 보완을 하는데, 소리를 나타내는 문자는 음가를소문자로 적어요.
  • 음가가 확인되지 않는 경우에는 숫자를 붙입니다.

 

" 풍우신 타르훈나 "

 

 

 

 

 

 




인류 역사상 최초의 기록 체계였던

수메르문자는 수메르어 표기를 위해

발전되었습니다.

 

이후 아카드->고바빌로니아, 고아시리아 

등에서 차용하면서 고대 근동 전역에서

가장 지배적인 문자로 거듭나게 됩니다.

 

점토판에 갈대 등을 이용한 도구로

찍어서 나타내기 때문에 쐐기 모양을

하게 되었구요.

 

수메르어를 시작으로 매우 다양한

언어를 표기하게 되었으므로

이들을 모두 쐐기문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히타이트 쐐기문자는 고아시리아 쐐기문자를

도입해서 표기한 것이라는 설명이 많습니다.

저는 위와 같은 설명을 정말 많이 접했고

외국 자료에서도 많이 봤습니다.

 

 

최근의 설명은 좀 다릅니다.  

 

 

 

  • 쐐기문자의 가계는 많은 가지를 지닌 채 풍부한 계보를 자랑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변형이 존재했으며, 각각 고유한 발달 과정을 거쳤고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화했다. 이러한 변화는 역사적 상황, 실용성, 유행 등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기원전 17세기 중반부터 사용된 히타이트 쐐기문자의 계통을 추적해 보면, 고아시리아 쐐기문자는 그 기원에 포함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시리아인들이 떠난 이후 두세 세대가 흐르면서 그들의 언어와 독특한 쐐기문자 사용이 종결된 것으로 추정된다.

    - 히타이트학자, 테오 반 덴 후트

 

 

현재 전문가들의 중론은

 

히타이트 '이전 시대'에 고아시리아 쐐기문자를

차용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용이 점차 감소했고

 

히타이트 성립 이후, 이들이 북시리아로

영향력을 확장하면서 도입된 현지 쐐기문자가

히타이트 쐐기문자의 기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쐐기문자의 차이 예시

 

 




위와 같이 텍스트 연구를 위해 선으로 

따는 작업을 선화(Line Art)라고 합니다.

 

선화된 각 스타일을 보면

차이가 어느 정도 보여요.

 

대중적으로 가장 익숙한 형태는

수메르-아카드 쐐기문자일텐데

고바빌로니아 기념비체에서는

비슷한 모양이 확실히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쐐기문자도 갈수록

간소화되는 변화를 겪는데

필기체나 고아시리아, 히타이트

쐐기문자도 같은 맥락이에요.

 

한참 이후, 신아시리아나 신바빌로니아,

페르시아 쐐기문자는 간소화된

모습이 극에 달합니다.

 

빨간 원을 친 문자는 (안/딘기르)인데

차이를 쉽게 보여주려고 표시해 봤습니다.

 

 

히타이트 언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위의 설명에 8개 이상의 언어가 확인된다는

말처럼 정확히 식별된 언어는 9개

그 외 미식별된 언어가 2개 있습니다.

 

 

 

 

 

칼라스마어는 작년에 새롭게 발견된 언어이고

미해독 언어와 타구르쿰닐리는 정확히 언어인지

확실하지 않은 미식별 언어입니다.

 

 

 

 




아주 탐나게 생긴 인장 유물입니다.

제가 사진을 드럽게 못 찍어서

국립김해박물관 유튜브의 힘을 빌렸습니다.

 

 

 

 






 

아주 멋진 연꽃 브로치입니다.

사실 연꽃이 아니고 '푸른 수련(세셴)'인데

고대 이집트의 대표적인 상징 중 하나로

현재까지도 이집트의 국화(國花)입니다.

 

보통 '이집트 연꽃'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치유, 아름다움의 신 네페르템의 상징이다.

 

 

 

 

 




 

히타이트 법의 유동성과

관대함을 보여주는 그런 대목이죠.

 

하지만, 오류가 있습니다.

 

 

텔리피누 선언문은 상속과 왕권 보호에

대한 명시가 있는 문서이지,

법 문서가 아닙니다.

 

 

위 기록은 정확히 Kbo 6.3 IV 31~32줄에

기록되어 있으며 고왕국 시대의 히타이트 법 문서 

'사람이라면(타쿠 안투사산)'에 속하는 기록입니다.

 

해당 기록의 작성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어요.

 

 

 



손상이 있는 부분은 식별을 돕기 위해

빨간색으로 문자를 넣었습니다.

당연히 제 마음대로 한 것은 아니고

학자들의 복원을 토대로 한 내용입니다.

 

 

위와 내용은 같고 여기서 에님랄이

수메로그램으로 벌집을 의미하는데

 

에=집

님=파리

랄=꿀

 

'에님랄=집+파리+꿀=벌집'입니다.

아주 직관적인 게 좋습니다.

 

 

 




이렇게 각종 토기를 멋있게 잘 전시해 놓았습니다.

개중에는 제가 사진으로만 봤던 것들이 있네요.

 

 

자, 히타이트 특별전 소개 끝!

 

 

 

 

 

+ 책 추천 하나 드갑니다.

 

 

 





이번에 히타이트 관련 새로운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한국어로 번역/출간된 히타이트 책은 전부 소장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나오는 족족 다 사는데

(그래봐야 몇 권 안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번역된 책 중에서는 최고의 퀄리티입니다.

히타이트의 역사, 사회, 발굴사 등 포괄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개론서에 가까우며, 저자는 일본의 고고학

전문가입니다.

 

 

내용이 그리 어렵지도 않고 시각 자료도 

많아서 지루하지 않습니다.

철기 관련 이야기는 제가 예전에 언급했던

내용도 많이 거론되어서 좀 신기했습니다.

 

 

더 디테일 하고 정갈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아마추어인 제 글보다 훨씬 깔끔합니다.

 

 

다만 (특히, 문헌 관련)부정확한 내용이 

없지는 않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무르실리는 자신에게 언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으며, 나중에 언급할 계모의 저주를 그 원인으로 꼽았다. "

  • CTH 486번으로 분류되는 기록인데, 해당 기록에 타와난나(무르실리의 계모, 타와난나는 지위였지만 이름처럼 사용함)에 관한 언급은 일절 존재하지 않습니다.

 

" '제 1급 왕녀(massanauzi 또는 massana-IR-i)에게 사위를 들여 왕으로 삼는다'라고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 마사나우지는 무르실리 2세의 딸 이름입니다. 제 1급 왕녀는 '두무.무누스 한테지스(DUMU.MUNUS hantezzis)'가 맞습니다.

 

" 피야마라두라는 인물이 서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지원 세력이 아히야와 왕의 형제인 타와갈라와였다. "

  • 타와갈라와가 피야마라두를 도왔다는 언급은 없습니다. 피야마라두가 아히야와의 지원을 받은 것은 맞아 보이지만, 타와갈라와는 아히야와왕의 대리인이자, 오히려 히타이트 사이의 중재자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타와갈라와의 행적에 대한 기록 자체가 매우 적어서 얘가 뭘 했는지 알 수 없어요.

 

 

 

 

제가 일본어를 할 줄 몰라,

원문이 틀린 것인지 번역/감수 과정에서

오류가 생긴 것인지 확인은 못 했지만

아마 원문의 오류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넓은 범위를 다루는 책에서

사소한 오류 하나 없기는 힘들죠.

너무 칭찬만 하기 그러니까

트집도 한 번 잡아봤습니다.

 

 

저자가 고고학 전문가이다 보니까

발굴사 쪽은 아주 훌륭합니다.

 

 

 

 

 

총 리뷰

 

 

 일단 개인적으로는 히타이트를 너무 좋아하니까 굉장히 만족스러웠습니다. 논문이나 사진으로 보던 유물을 실제로 보니까 감회가 새로웠구요. 사실 특별 전시의 한계상 유물이 엄청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훌륭한 전시를 위해 디자인이나 배치를 열심히 고안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여서 관계자분들이 정말 고생 많이 하셨겠구나 싶었습니다.

 

저처럼 고대 중근동사에 환장하신 분이라면 꼭 가보시라고 추천하겠지만... 근처 사시는 분이 아니면 이거 하나 보려고 김해까지 가는 것은 비추천합니다. 혹시 들릴 일이 있거나 근처에 놀러 갔다가 가시는 거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가야 전시가 정말 멋있습니다. 또 저는 시간이 없어서 못 갔는데 근처 대성동 고분 박물관에서 히타이트의 대표적인 유적지인 야즐르카야 기획 전시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제가 오늘 지적을 좀 하긴 했지만, 솔직히 맘 잡고 까내리면 세상에 안 까이는 게 더 드믈지 않겠습니까. 

제 글만 해도 위의 전시나 책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허접하다는 걸 스스로 많이 느낍니다. 정답에 다가가기 위해 오답을 반복하는 게 공부라고 생각하기에 왜곡이 아닌 이상, 틀렸다고 그것을 꼭 비난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학문의 진보는 옳음에 대한 집착보다도 틀릴 줄 아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 역사학자 테오 반 덴 후트

 

 

 

 

 

 

이미지 출처: 본인, 국립김해박물관 유튜브, 교보문고, Çorum Muzesi, Trevor Bryce, J. Davey,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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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쵸 | 작성시간 24.11.17 글써줘서 고마워 가봐야겠다!!!
  • 작성자무상 | 작성시간 24.11.19 아 너무 신기해 재밌다!!!! 하늘은 붉은강가 본 뒤로 히타이트 문명보면 가슴이 뛰어
  • 작성자같수오 당첨자 | 작성시간 24.11.22 와 존잼 너무재밌게읽었어!!
  • 작성자룰루15 | 작성시간 24.11.28 와 고마어
  • 작성자열두시가 되면 | 작성시간 24.12.02 하붉강 써치하다가 이 글 발견.. 대박
    나도 가보고싶다 글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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