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2년, 경기도 양주군에서 중학생 두 명이 주한미군 군인이 조종하던 미 육군 장갑차 M60 AVLM 공병장갑차에 깔려 숨진 사고 및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일컫는다.
피해 학생들의 이름을 따서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라고도 한다.
결론을 우선 말하자면, 주한미군의 과실치사 사고라고 할 수 있지만, 사고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사건" 으로 칭해지고 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라는 호칭은 윤민석이 작곡한 반미 노래인 'Fucking USA' 로 유명한 송앤라이프에서 자주 부르던 호칭.
해당 노래에서도 언급된다.
단, 많이 알려진 'Fucking USA' 1편은 만들어진 시점이 중학생 압사 사건 이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만 언급된다.
이 사건은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2편에서 언급된다.
이 사건의 명칭은 처음에 설명되었듯, 미 육군의 훈련 도중 군용 차량에 두 중학생이 압사당한 사고(혹은 사건)와 그에 대한 전국민적인 반미 시위를 포함한다.
후술하듯 사건의 고의성 여부를 놓고 매우 시끄러웠다.
2. 발단
2002년 6월 13일, 즉 2002 월드컵에 국민들이 환호하고 있던 시절로 조별리그 3차전인 포르투갈과의 경기 하루 전이었다.
경기도 양주군(現 양주시) 광적면 효촌리 56번 지방도 갓길에서 당시 조양중학교 2학년이던 신효순, 심미선 양이 국도를 따라 언덕을 넘어 덕도리 쪽으로 300m만 가면 있는, 효순양과 미선양의 친구가 사는 초가집이라는 이름의 식당에 모여 의정부에 놀러 가기로 하였다.
학생들은 졸업생이 10명(그중 남학생은 네 명)에 불과한 효촌초등학교를 나온 동창으로, 다음 날은 효순 양의 생일이기도 해서 여학생 다섯 명이 모이기로 약속했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경 두 학생은 마을을 나와 친구 집으로 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는 주한미군 미 보병 2사단 44 공병대대 소속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법원리 쪽에서 내려와 약간 왼쪽으로 틀어 막 언덕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차량 행렬은 선두 안내 차량 1대, 병력 수송 장갑차, 그 뒤로 사고 차량, 일반 공병 궤도 차량 3대, 후미 안내 차량 1대였다.
이때 맞은편에서 M2/M3 브래들리 기갑 전투 차량 5대가 덕도리에서 무건리 훈련장으로 오고 있었다.
사고가 난 도로의 폭은 3.3m 정도인 데 반해 사고 차량의 폭은 3.65m이다.
애초에 사고 차량이 갓길을 걷고 있던 학생을 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학생은 주한 미 육군 제2보병사단의 M60 AVLM에 깔려 현장에서 숨졌다.
이 차량은 M60 패튼 전차의 차대에 미클릭을 탑재한 지뢰 제거용 장갑 차량이다.
다시 말해, 전차를 개조해 만든 장갑차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갑차와 이 차량은 조금 다르다.
가해자인 두 미군을 처벌하라는 서명을 받는 장소에서 지하철 역이나 좀 큰 거리 같은 곳이라면 사고 현장의 사진들이 흔히 걸려 있었다.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사용해서 이후 참혹함 등의 이유로 항의가 들어와 모자이크 처리를 했지만, 이미 본 사람들이 많았다.
3. 전개
사고 당일 미 육군 제8군은 수습에 나섰다.
사건 당일인 6월 13일에는 8군사령관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였고, 다음날인 6월 14일에는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참모장 등이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문상하였다.
그리고 피해 유가족에게 각각 조의금 명목으로 100만 원씩을 전달하는 등 사고 수습에 나섰다.
보상금은 이후에 전달되었고, 미8군에서는 각각 2억 원 정도의 금액을 보냈다.
그러나 당시 조의금을 보상금으로 해석한 유가족들이 2사단장을 만나고자 항의를 계속하자, 미군 측은 15일 장례식부터 먼저 치르면 사단장과 면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미 육군 2사단 측의 한미 합동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 사건에 대한 합동 조사 결과는 '이번 사고는 고의적이거나 악의적인 것이 아닌 비극적인 사고' 였다.
즉 과실사고라는 것이다.
장갑차 조종수인 마크 워커 하사(Staff Sergeant)가 두 명의 학생을 확인하지 못하였고, 전차장이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의 통신 장애까지 겹쳐서 피치 못하게 사건이 발생했다고 했다.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중학생들을 보긴 봤지만 당황하여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사고 당일만 해도 속보 형식으로 짤막하게 '중학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 으로 보도되기만 했고, 거의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했다.
당시 2002 한일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이어서, 한국 국민들의 관심은 모두 사고 다음 날에 치러진 한국 대 포르투갈전에 쏠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한국이 승리하고 16강에 그것도 조 1위로 진출하면서 사고 자체가 완전히 묻혔다.
2002년 6월 하순부터 사고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였던 의정부시 일대에서는 모자이크를 하지 않은 사고 사진을 의정부역이나 시내 광장에서 볼 수 있었다.
일부 대학교의 벽보에 사진과 함께 내걸리거나, 의정부와 양주시의 중/고등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사고를 낸 이들이 소속된 부대인 미 육군 제2사단사령부가 위치한 의정부시 가능동 '캠프 레드클라우드' 에서 산발적으로 집회를 벌이는 데 그쳤다.
사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이 사고는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지는 못했다.
4. 판결 결과
주한미군 측과 유족들 간의 공방은 계속되었고, 검찰 측 수사도 시원치 못한 데다 비판 여론이 점점 확대되자, 법무부는 7월 10일에 미측에 재판권 포기 요청을 한다.
SOFA 규정상 주한미군들을 포함, 한국군은 물론이고 상호간 SOFA 규정을 맺고 있는 모든 국가들은 훈련 중 사고, 즉 공무 집행과 관련된 범죄는 자국측이 그 재판권을 가지는 일종의 치외법권의 형태를 보이는데, 이번 사건에서는 그 재판권을 한국 측이 가지겠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8월 7일 미군 당국은 그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며 재판권 포기를 거부했다.
이걸 가지고 살인이 맞으니 은폐 혹은 미군들을 보호하려고 그랬다는 주장도 있지만, 애초에 사고가 아닌 사건이라도 SOFA 협정상 자국이 재판권을 가지고 있다.
특히나 이 경우엔 미국 입장에선 훈련 중에 생긴 교통사고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재판권을 포기할 경우 이후 벌어지는 모든 단순 사고에도 재판권 포기가 가능한 전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미군 입장에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이후 11월 20일과 22일 동두천 미군 기지인 캠프 케이시 내 군사법정에서 열린 군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피고인 미 육군 부사관 2명의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에 대해 각각 무죄 평결을 내렸다.
다만 무죄 취지는 서로 달랐는데, 우선 페르난도 니노 하사가 당황했다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여중생들을 본 것이 맞은 만큼 사고를 막지 못한 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그러나 무전기 고장으로 그 사실을 조종수에게 알릴 방법이 없었으니 처벌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했고, 마크 워커 하사는 중학생들을 볼 수 없었고 관측병의 통보를 받아 움직이기에 사고가 났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으므로 처음부터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미 형법상 검찰이 무죄에 대해서는 항소할 수 없기 때문에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
이 판결을 근거로 미 육군 2사단의 해당 장갑차 정비 관련자들에 대해서 중징계가 내려졌다.
그리고 두 피고인은 5일 후 한국으로부터 일본을 경유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로 출국하였다.
그러나 유가족과 한국인들의 입장에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였다.
마크 워커 하사의 변호사인 가이 워맥조차 "중학생들을 보지 못한 마크 워커 하사야 무죄가 맞지만 막판에라도 중학생들을 보긴 봤었던 페르난도 니노 하사는 처벌을 받아 마땅했다" 고 판결을 비난했다.
이들은 출국과 동시에 '본의 아닌 사고' 에 유감이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조종수 워커 하사는 그때의 충격과 죄책감으로 PTSD를 앓다가 2004년 허리 통증을 이유로 육군을 떠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후술할 MBC <세계와 나 W> 인터뷰에서 밝혔다.
5. 재확산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 20일, 무죄 판결 소식이 알려진 이후였다.
6월과 7월의 월드컵 4강 열기가 이제 막 식고 있을 즈음, 이 사건의 가해자들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FIFA 월드컵의 열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번져나갔다.
11월 26일 드디어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다.
특정 단체 주도 없이 인터넷을 통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촛불집회의 양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메신저들이 자리 잡아가던 시절인 만큼 넷상에서도 이 문제가 뜨거웠고, 온 네티즌이 지못미의 전신격인 이모티콘 ▶◀을 자기 아이디 앞에 붙이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퍼져갔다.
일부에서는 리본이 서양의 문물인데 중학생들을 죽인 미군들은 양놈들이므로 우리 고유의 삼베 상복을 본따 ▶◀ 대신 ▦을 쓰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으나, 큰 반향을 일으키진 못했다.
그리고 당시 넥슨에서는 효순이와 미선이를 추모하자는 취지로 무료 이벤트 아이템을 배부하였다.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캐릭터 선택 창에서 효순이, 미선이의 빈소가 나오는 스킨과 추모 국화를 매달은 깃발을 무료 이벤트 아이템으로 배포했다.
바람의 나라는 채희네상점에서 추모망또, 추모깃발, 추모국화를 개당 100전에 판매했다.
어둠의 전설은 검은색 추모 풍선을 100 골드에 판매했다.
또한 플래시 애니메이션 제작팀인 오인용에서도 관련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등 다른 부문에서도 추모 열기가 확산되었다.
심지어 스타크래프트 버전으로도 나왔다.
11월 27일에는 주한미국대사가 조지 W.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의 사과를 간접적으로 전하고, 12월에는 직접 전화로 김대중 대통령에게 유감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미국 측의 사과는 '우리가 잘못했다' 라기보다는 '우리 잘못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희생돼서 유감이다' 라는 입장이었는데, 이런 표현을 받아들이지 못한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 반미 감정을 더 확산시켰다.
주둔 지역의 문화와 국민 감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일을 키운 셈이다.
한국이라서 쿨하지 못하게 어린애들 죽었다고 지나칠 정도로 격앙되었다고 쓴 것이라면 엄청난 착각이다.
서양의 경우 미성년자 사고에 대해 더욱 격앙된 반응을 보인다.
이와 비슷하게 아프가니스탄에서 주둔하던 미 육군이 실수로 쿠란을 소각해 분노한 군중에게 애꿎은 UN 직원 등이 죽는 사건이 있었다.
여기에 이전에 계속되던 주한미군의 문제점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더욱 더 확대되고,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있었던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이 다시 급부상함으로써 반미 감정은 극에 이르게 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안톤 오노 사건은 연관이 없었지만, 당시 금메달 하나에 나타난 반미 감정은 엄청났다.
그 당시 송앤라이프에서는 'Fucking USA' 와 '기특한 과자', '또라이 부시', '종이비행기' 등의 수많은 반미 노래를 만들어 인터넷에 반미 정서를 불어넣으며 인기몰이를 했다.
송앤라이프의 대표 윤민석 작곡가는 젊은 시절 '김일성 대원수는 인류의 태양', '수령님께 드리는 충성의 노래' 외 여러 NL 민중가요를 작곡한 인물인데, 사건 당시 이 사건을 주제로 노래를 만들며 월드컵에만 정신이 팔려 이 참극을 외면하는 국민 정서를 질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쯤에는 반미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은 데다 노골적인 NLPDR 성향을 보이는 게 너무 확연했기에 송앤라이프는 이미 대중의 관심에서 잊혀져 있었다.
이 외에도 엽기하우스 등 많은 엽기 사이트에서 이를 풍자하는 합성물도 크게 유행하였다.
6. 음모론과 반박
이 사건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근거없는 루머(누가 그랬다 더라~ 같은 식의)가 확산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확산된 유언비어들을 아직까지 진지하게 믿는 이들이 종종 나타나기도 한다.
미군 차량이 왜 중학생을 발견하지 못했나?
이런 주장을 하는 측에서는 우선 장갑차가 중학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한다.
상식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데 보고서도 피하지 않았으니, 사고가 아니라 의도적인 살인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M60 AVLM은 원본인 M60 AVLB보다는 낫다지만 조종수는 전방 확인이 가능할 것이라는 일반인의 생각과는 달리 생각보다 더 시야가 제한되는 차종이다.
당장 안전상의 문제로 부대 이동간 도로상 밀폐 조종을 하지 않는 대한민국 국군 궤도 차량들도 가끔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물체인 전봇대를 들이받거나, 갓길에 주차된 승용차를 깔아뭉개는 사고를 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차보다도 시야가 제한되는 AVLM이 도로변에서 걸어가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하는 상황 자체는 개연성이 있다.
AVLM의 경우 원 M60 조종석이 아닌 포탑을 제거한 위치의 왼쪽에 조종석이 있다.
조종석의 우측 전방엔 차체 전면부 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구조물때문에 오른편이 아예 보이질 않는다.
때문에 일반 전차 이상으로 전차장이 통제관으로서 시야 확보와 지시를 하는 것이 중요한데, 통신기가 고장이 났다는 게 비극의 원인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탑승자들에게 고의성을 주장하기보단 이를 미리 인지하고 교체하지 않았던 정비사들에게 더 강하게 책임을 물어야 했음이 옳은데 정작 정비사들에겐 단순히 중징계가 내려졌다는 언급외엔 없어서 그 중징계가 무슨 징계인지조차 모른다는게 문제다.
미군이 의도적으로 살인을 한 것인가?
중학생들이 속도가 느리고 소음을 발생시키는 장갑차를 미리 피하지 못하고 압사당한 것에도 의혹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미군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피하는 중학생들을 일부러 쫓아가서 죽였다' 는...
그러니까 '고의적인 살인의 증거' 라고 주장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뻥 뚫린 아우토반도 아니고 겨우 폭이 맞는 좁은 시골길을 지나던 중이었기 때문에 속도를 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군필자라면 알겠지만 애초에 장갑차는 오토바이마냥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여서 이리저리 피하는 중학생을 고의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물건도 아니다.
중학생들이 장갑차를 보고도 알아서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겠거니 생각하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보는게 당연히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다.
왜 중학생들은 피하지 못했는가?
위에 말했듯이 이 전차를 피하지 못할 구조여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전차가 알아서 멈추는 걸 기대하는 게 차라리 더 가능성 있는 단차선 도로거나 급경사에다 낭떠러지 구간이 아니고서는 피하지 않은 이유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군대 다녀온 사람은 다 알겠지만 전차는 움직일 때 매우 시끄럽다.
이는 중학생들이 몰라서 못 피한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박으로는 제한된 도로에서 쫓아가서 궤도로 찍을 정도로 순간적인 기동성이 좋지 않다는 점이 있으며, 위에서 어떻게 중학생들을 보지 못했는가에서 언급되었듯이 AVLM 조종수는 애초 보이지도 않는데 피하는 중학생을 쫓아서 일부러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통신 장치가 고장 난 전차장이 지시하기도 불가능했으며, 설령 고장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가만히 서있는 거면 몰라도 이를 피해서 도망가는 대상을 조종수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통신만으로 방향을 지정해서 일부러 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중학생들이 미처 피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는 AVLM이 자신들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학생들이 '알아서 비켜 가겠거니' 하고 생각했을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평소 군사 장비 이동이 대단히 잦은 지역에 살고 있어 장갑차에 대한 경계심이 낮아 그냥 지나가겠거니 하고 관심을 두지 않다가 사고가 발생했다는 의견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종의 안전불감증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동두천시나 포천시 등 미군이나 대한민국 육군 장갑차량이 흔히 지나다니는 곳 일대의 주민들을 살펴보면 군 궤도차량이 바로 옆에서 기동해도 그냥 무심한 듯 시크하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가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다.
기동훈련이 아니라 군부대 주위에서 사격 훈련을 할 때 경고 방송을 해도 주민들은 신경 쓰지 않고 산나물을 채취하러 산에 올라오는 경우가 자주 있다고 한다.
더구나 기동 훈련이 있을 때 도로에서의 일반 차량 및 인원의 통행을 제한해야 함에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건 관할 지역 공무원들의 실책이었는데, 당시 국민들의 모든 분노는 사고를 저지른 미 육군들에게 향해 있었기에 스리슬쩍 넘어가 버렸다.
이 사고 이후로는 주민들 자체적으로 꽤 신경을 썼다고 한다.
한편 유족인 미선양의 부친 심씨는 "미 육군이 매년 남겨두고 간 조화를 누군가 매번 짓밟고 간다." 고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다.
사건 이후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 행위라는 주장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떠돌았으나, 이는 억지에 불과하다.
"장갑차 조종수(운전병)가 중학생들을 못 봤다는 건 거짓말이다."
시야 장애가 없이 고개까지 50m 이상 쭉 뻗은 직선 도로가 사건 지점 이전부터 펼쳐져 있었고, 사건 당일 6월 13일 오전 10시경 맑은 날씨였기에 눈 밝은 조종수가 못 볼 이유가 없다는 의혹이다.
그것도 커브를 돌고 나서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시속 20km이하로 달리는 상황에서 15m 전방의 사람들을 못 봤다면 전차장이나 전방사수가 본다는 주장이다.
M60 AVLM는 전방 시야가 나쁘다는 것은 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되었다.
전차장(정확히는 차장) 역시 사람인지라 항상 100% 주변 상황을 인지하리란 보장도 없다.
"전방 사수" 라는 보직은 M60 AVLM에 없다.
"장갑차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을 하느라 신경을 쓰다가 중학생들을 못 봤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장갑차 조종수는 오로지 전방 관찰과 운전에만 신경 쓰는 것이 주 임무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은 조종수의 책무가 아니며, 중대장이나 대대장 등과의 교신은 당연히 전차장(지휘관)의 임무고 그의 권한이다.
조종수는 전차장의 명령을 따르면 되는 것이다.
단 하나 예외라면 전차장이 죽었거나 의식불명일 때 조종수가 중대장 등과의 교신을 하며 지시를 받을 수 있다.
따라서 조종수가 중대장과의 교신에 신경을 쓰다가 두 중학생을 못 봤다는 말은 것은 거짓말이라는 주장이다.
설사 중대장과 교신을 했다고 해도 조종수는 늘상 무전 교신을 하며 조종을 하고 다니기 때문에,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종수가 늘 상 무전교신을 하면서 조종을 하고 다닌다고 해서 장갑차 조종에 별 영향 주지 않는다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면 운전 중 자주 통화하는 사람은 운전 중에 사고 안 날 수 있는 건가?
물론 조종수는 무전 교신을 하면서도 장갑차 조종에 우선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교신에 신경 쓰느라 중학생을 못 봤다고 하는 것은 조종수 잘못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조종수가 일부러 중학생을 치었다는 것도 아니다.
"충돌이나 추돌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급히 조종간을 오른쪽으로 틀다가 사고가 났다는 것 역시 거짓말이다."
장갑차가 오르막 10m를 남겨두고 앞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앞에서 어떤 차량이 중앙선 지점을 먹은 채 달려와 충돌 위험이 있었다면, 장갑차 조종수는 5m 정도의 짧은 거리에서 상대 차량과 마주쳤기에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조종간(운전대)을 우로 당겼어야 한다.
그랬다면 사건 현장 도로에 오른쪽 궤도의 찍어 물린 자욱이 선명하게 남아있어야 하고, 또한 두 중학생들의 시신이 일렬종대로 누워있을 수가 없다.
횡으로 흩어져 쓰러져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앞서가는 차량과의 추돌 위험이 있었다면 앞서의 충돌 현상 시 발생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전혀 아니다.
따라서 충돌과 추돌의 위험이 있어 사고가 났다는 말은 거짓이라는 주장이다.
시속 20km인 저속으로 움직인다고 위에서 말했으면서, 궤도 자국이 항상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상황에 따라서 궤도 자국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저속 상태 + 포장도로에서는.
"미군이 폭주족마냥 과속해서 사고가 났다."
장갑차는 차량 자체가 무거운 데다, 일반 차량과는 달리 엔진에서 나오는 동력이 스프라겟트라는 쇠톱 같은 톱니바퀴에 전달되어, 그 톱니바퀴에 1톤이나 되는 쇠바퀴가 씌워져 굴러가는 것이기에 일반적인 승용차마냥 고속으로는 달릴 수 없다.
심지어 일반적인 장갑차가 아닌 M60패튼 전차의 차체를 사용한 전차형 장갑차다.
당연히 750마력의 고마력 엔진을 사용하기는 하나 그렇더라도 최고 한계 속도는 48km/h 정도다.
더군다나 이 속도는 말 그대로 최고속도일 뿐 일반 차량들 처럼 한계속도로 계속해서 주행하는 경우는 드물며 심지어 전시 상황이 아닌 훈련 상황의 일반 도로에서 과속을 했을 가능성은 낮다.
게다가 사건 지점 오르막길에서는 커브를 돌고 난 직후 바로 오르막이라서 아무리 빨라도 20km/h 혹은 그 이하로 달렸을 것이다.
따라서 과속으로 인해 사고가 났을 가능성은 낮다.
"도로 폭이 좁으니 사고가 났다는 건 거짓말이다."
도로는 대형 버스 두 대가 비켜지나갈 정도의 폭이고, 큰 도로에 비해 폭이 좁은 만큼 조심하게 된다.
오르막길에서 장갑차가 거의 속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속이나 도로 폭이 어쩌고 하는 얘기는 헛소리라는 주장.
도로 폭이 좁으니까 조심하게 되므로 사고가 날수 없다는 주장인데...
그런 식으로 하면 골목도로에서도 교통사고가 일어나면 안 된다.
운전자가 도로가 좁으니까 알아서 조심할 것이므로.
미군 조종수가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 대신 일부러 살인했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훨씬 더 많고 일리 있는 근거들이 필요하다.
"사건 현장에 남겨진 살해 증거들이 고의성을 뒷받침하고 있다."
현장에서 떨어진 위치에서 발견된 신발과 궤도 자국 등을 근거로 미군이 고의적으로 학생들을 죽이고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는 주장.
전문가의 견해나 수사관들의 의견 없이 그저 사진만으로 추측하고 부풀려진 내용으로, 신빙성 따윈 없다.
"재판정에 참여한 미군들이 희생자와 한국 법정을 조롱하며 반성의 뜻을 보이지 않았으니 고의적 살인범이 분명하다."
미군들이 한국은 좋은 나라라고 주장하며 깐족거리며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아 살인범이라는 게 주장인데 당연히 근거 따윈 없다.
음모론자들은 PD수첩에서 해당 내용이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런 내용이 방영된 적은 없다.
7. 사건이 남긴 것들
사건 자체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미국과 미군 당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의 후폭풍을 제대로 겪고 엄청나게 데인 미국은 이후 미군 관련 사건, 사고에 있어 '대체적으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게 되었고, 미국 정계에서도 한국의 반미 감정을 재인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이다.
7.1. 한국의 반미 감정
한국의 반미 감정은 이전에도 계속 존재해왔는데 특히 역사적인 문제를 고려하면 이같은 사태가 늦게 일어난게 이상할 정도이다.
20세기만 해도 가쓰라-태프트 밀약, 한반도 분단등 미국이 저지른 잘못에 의해 피해를 많이 입은 측면이 강했다.
특히 주한미군에 대한 감정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기본적으로 미군이라는 집단이 우수 인력도 있지만 낮은 계급의 사병들, 특히 육군의 경우 '할 일 없는 잉여' 가 적지 않다.
또한 범죄 경력 등이 많은 사람이 사법거래로 어지간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줄줄이 피해갔으나, 범죄에 연루된 기록은 남아 갈 데가 없게 되면서 군대라도 가자는 생각으로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사고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이 문제는 이라크 전쟁 이후 인력 부족으로 인한 육군 모병 기준의 완화로 인해 더욱 심해지고 있다.
그나마 강력 범죄나 반복적으로 사고를 치는 인원들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으로 보내버리는 조치를 취한 이후에 완화된 게 이 정도다.
또한 기소율도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낮아지는 추세인데, 미군이 한국에 넘겨줘야 하는 범죄자라 해도 살인, 강도강간, 연쇄강도 등의 중범죄자가 아니면 검찰 기소를 갖가지 사법제도를 이용해서 최대한 늦추는 한편 미군 당국이 가해자를 뒤로 빼고 직접 피해자에게 배상한 뒤 재빨리 가해자를 미국으로 보내버리는 방식으로 실질적인 처벌은 면하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7.2. 한미간 SOFA 규정에 대한 비판에 대한 반박
이 사건 이후 SOFA 규정 개정 논의가 빈번히 진행되었지만 크게 바뀐 것은 없었다.
앞서 말했듯 이 규정은 파병 국가인 미군 측에 상당히 유리하게 쓰여 있는데, 그중 가장 치명적으로 한국 측에 불리한 조항이 바로 이 치외법권이다.
국내에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국내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건 매우 불평등한 일이지만, 문제는 동시에 대한민국도 파병 국가에 이 치외법권을 미국처럼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SOFA에 대해 한국과 관련된 예를 들자면 이라크 아르빌 지역에 파병된 국군 부대인 자이툰 부대에서 한국 육군 상병 1명이 경계 근무 중 장난하다 실수로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를 코 앞에서 죽여 버리는 사건이 있었다.
서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장난을 치던 중 발생한 오발사고였다.
현장에서 총에 맞은 쿠르드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병원으로 실려간 지 4일 만에 죽었다.
피해자인 헤멘 바카르는 죽기 전에도 실수로 자신을 쏜 병사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견을 피력했고, 그의 친형도 처벌하지 말라고 탄원서를 냈다고 한다.
이 쿠르드인의 유족은 고작 $10,000의 보상금만을 받았다.
사고를 낸 상병은 한국으로 재빨리 송환되어 일단 구속되는 것부터 시작했다.
실제로 SOFA라든가 이와 비슷한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건을 일으킨 상병의 미래는 암울했을지도 모른다.
이 병사는 1년 6개월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민병대원 헤멘 바카르는 이렇게 사고사로 죽으면 천국으로 간다는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단순히 카더라이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이라는 보장은 없고, 아마 같이 생활하던 전우애와 상대가 고의로 자신을 쏜 게 아니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용서를 한 것일 확률이 높다.
이 일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가정을 해보건대, SOFA 따위의 규약이 없었다면 해당 사고를 낸 한국군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은 최소한 몇 년 뒤로 계산해야 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해당 지역이 중동이었다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법정에 끌려가서 고의 살인이 아니라는 게 명백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으로 재판을 받고 형벌을 받았을지 모른다.
행여나 정부에서 떼를 써서 데려오려고 해도 그건 전적으로 해당 국가 마음대로다.
국가에서 파병한 군대 소속 인간이 사고를 낸 경우 데려오려고 규정을 만들어 노력을 하려는 것도 자국민 보호라는 차원에서 사실 가능한 논리이다.
민간인이 다른 나라에 관광 가서 사고치는 거랑 다른 나라에 파병된 군인이 사고치는 거랑은 문제가 같지 않다.
민간인이면 몰라도 군인이 낸 사고라면 자칫하다간 '그 나라 군대가 시킨 일' 로 와전될 수 있으며, 이는 곧바로 외교 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낸 장본인이 된 그 피의자의 신분은 당연히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처럼 국민 감정으로 번질 경우는 더욱 그렇다.
문제는 이게 의도적으로 저지른 살인이라거나, 죄가 심각한 경우에 본국 송환을 안 하겠다는 케이스를 고려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죄가 엄청나게 크다고 본국 송환을 포기하는 경우를 용인하겠다고 하면 송환에 대한 변별력이 엷어진다는 문제가 생긴다.
애초에 군대를 파병한 나라가 무엇하러 본국 송환에 있어 자국민을 외국의 법정에서 빼올 기회가 있음에도 그 기회를 쓰지 않는 경우와 같은 예외 케이스를 앞장서서 주장하겠는가?
이 사건과 관련한 SOFA 규정이 불평등조약인가에 대한 단락의 결론은 '파병한 국가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혹은 유리한 조약' 이라고 하겠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다 적용하고 있고 (타 파병 국가들도) 거절할 이유가 없는 사항이다.
덧붙여 SOFA 규정이 미국에 유리하고 대한민국에 악랄하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어떻게 해결해달라고 호소하는 국민들의 의견을 들어줄 수가 없다.
사실 이런 종류의 불행한 사건 사고는 종종 일어난다.
이 사건과 함께 자주 언급되곤 하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미 해군 전투기 조종사가 A-6을 조종하다가 실수로 스키장의 케이블카 와이어를 날개로 잘라버린 사건이다.
매우 높은 산에 위치한 스키장이었으므로 당연히 승객들은 전원 사망했고, 미국은 막대한 보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물론 이탈리아에서 재판을 받지는 않고 소파 조약에 의거해 미국에서 처벌받았다.
두 사건의 가해자들에 대한 평결은 각기 다르긴 했어도 G7 국가이자 나토 가입국인 이탈리아도 이런 식인데, 한국에'만' 편파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본 사건과는 별개로 한미행정협정은 한국의 SOFA와는 한 차원 다른 문제도 갖고 있다.
그것은 미군뿐만 아니라 미군에 관계되는 대부분의 민간인들도 치외법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해당 글을 보면 알겠지만, 군속과 미군 가족은 군인이 아니다.
본 사건은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졌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라도 있지만, 만약 민간인인 군속이나 미군 가족이 그랬다면 어땠을까?
이들이 범죄를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점이 보장되지 않는 이상, 문제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물론 이 부분은 이 사고와 큰 연관은 없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일련의 사건들로 SOFA 조항이 재조명되었고, 이로 인해 이 부분도 문제 제기가 된 것.
7.3. 인터넷의 역할
이 사건을 통해 인터넷의 엄청난 사회적 힘을 확인하게 된다.
특히 인터넷은 스타크래프트 배틀넷을 할 수 있는 재미있는 도구라고만 생각했던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거기에 2002년 6월 27일부로 전기통신사업법 제53조(불온통신)가 위헌 판정을 받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것도 한 몫 했다.
이로 인해 인터넷이 더 이상 단순한 오락/정보 도구가 아니라 정치적 이슈를 나눌 수 있는 공간으로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주목되게 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비판적인 해석도 존재하는데, 인터넷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진 집단이 자신들의 이해 관계에 맞게 여론을 특정 방향으로 몰아가거나 조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인터넷을 통한 정치적 활동이 크게 부각되었다는 것이며, 기존의 매스미디어만큼 광역적이면서도 오프라인 정치 활동만큼이나 상호교류적인 점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 활동보다 장단점이 부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사건 모두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난 사건이라, 처음 터졌을 때에는 뉴스에 보도가 되어도 여론이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미선이 효순이 사건의 경우 월드컵이 끝난 뒤 온갖 커뮤니티, 포털 및 뉴스 게시판에서 (아직 미군의 고의적인 살인인지, 과실치사인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중학생들을 살해한 미군에 대해 많이 퍼뜨려주세요." 라는 식으로 여론의 관심을 호소하는 글이 많이 올라왔다.
이 사건이 조명 받으면서 시사 고발 프로에서도 방송되고,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사건이 확대된 것은 2002년 11월이었다.
11월 26일 국민들이 촛불을 들고 추모를 시작했고 열기는 2003년까지 이어졌으며, 그 뒤로부터 10여 년간 매년 1주기, 2주기 식으로 추모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서울에서는 2002년 정도만 돼도 이미 지금과 다름 없을 정도로 인터넷이 깔린 상태였다.
당장 인터넷 패러디 언론으로 주목 받았던 딴지일보의 전성기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02년 말까지였다.
지금도 전설로 회자되는 김구라 일행의 안톤 오노 테러 기행 동영상(안톤 오노 버르장머리 고쳐주겠다며 미국까지 찾아감) 역시 딴지일보에서 당시 제작하여 인터넷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2002년 초 아폴로 안톤 오노 사건 당시 폭발적으로 유행했던 노래가 'Fucking USA' 였는데, 당연히 이 노래는 딴지일보에서 밀어주며 인터넷으로 MP3 파일로 퍼져나간 것이다.
헌데 2002년을 일부 지방에 인터넷이 덜 깔린 걸 근거로 국민들이 TV나 보며 일방적으로 정보를 받아들이던 시대로 호도하면 안 된다.
2001년만 해도 서울에 상당히 인터넷이 보급되었고, 그래서 매향리 사태를 비롯해 미국의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책임론 제기나, 9.11 테러 때만 해도 여러 언론사의 자유 게시판이나 기자들의 칼럼 게시판에선 논쟁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이 때도 일부 정치 세력들이 9. 11 테러 세력을 독립군에 비유하여 논쟁이 되기도 했었다.
당시 인터넷 일간 스포츠 기자 칼럼에서 어느 기자가 이에 대해 독립군에 비유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비판하는 칼럼을 실었는데, 이 칼럼의 댓글로 많은 논쟁이 오갔었다.
다만 노골적인 반미 여론은 적었는데, 이듬해 안톤 오노 사건으로 반미 여론이 폭발하게 된다.
그리고 2002년 당시 서울의 어느 대학가에든 이 사건의 충격적인 사진이 모자이크 없이 걸려 있었다.
대학가는 물론 역세권 같은 데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중학생의 시신이 찍힌 사진을 모자이크없이 버젓이 걸어놓고 미군을 악으로 묘사하는 글을 붙여놓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미군 주둔지에 찾아가서 성조기 불태우기 등 미군 철수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당시 짤방이 떠돌아다니는데, 미군의 성조기를 빼앗으려는 대학생 무리 중 한 대학생이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있어서 '나이키 신고 반미한다' 라는 게 다음 카페에서 조롱 받기도 했었다.
물론 나이키 신는 것과 반미는 상관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다음에서는 심지어 '맥도날드도 미국 것이니 가면 안 된다' 라는 얘기마저 돌았었고, 어떤 다음 카페 회원은 '맥도날드에 출입하는 한국인들 사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려서 인민 재판하자' 는 글을 올려 논쟁이 되기도 했을 정도로 극단적인 반미 열풍이 인터넷을 뒤덮던 시절이었다.
2003년만 해도 인터넷과 디카의 보급이 어느 정도 대중화된 상태라서 특히 다음 카페에는 각종 사진들도 많이 올라오고 엽기 사진들도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는 한국인들도 매국노라고 욕하며 사진 찍어 올리자는 네티즌들이 있었을 정도로 반미 열풍에 휩싸여있었다.
이 시위에서 인터넷의 역할을 강조하는 건 사건이 처음 보도되고 묻힌 지 약 6개월이 지나서야 본격적인 시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건 발생 이후 당시 언론에선 단신 뉴스 정도로만 보도하고 더 이상 후속 기사도 없었다.
월드컵 때문에 묻힌 감도 있으나, 월드컵 열기도 길어야 한두 달인 걸 감안해보자.
보통 뒤늦게 화제가 되는 경우는 가족들이 인터넷을 통해 피해를 호소하거나 그런 경우인데, 이건 가족들이 아닌 사람들이 이 기사를 발굴하여 게시물을 여기저기 퍼날랐고, 인터넷의 특성상 삽시간에 여기저기로 퍼졌다.
게다가 당시는 인터넷 초창기 시장이라 주요 포털도 다음 등 극히 제한적이라 인터넷 유저들은 다음을 많이 했으니(당시 한메일이 국민 이메일이었다), 인터넷이 무한대로 광활해진 지금보다는 훨씬 여론을 퍼트리기가 용이했던 상황도 한 몫 했다.
흔히 드라마에서 상대에게 '이 바닥 작은 거 알지? 금방 다 퍼져 나가' 이러는데, 당시 인터넷 바닥은 작아서 여론 퍼뜨리기가 훨씬 용이했던 상황이었다.
또한 지금은 하도 낚시를 많이 당해봐서 학습 효과가 생겨 누군가 글을 올린다고 해서 바로 믿거나 퍼트리지 않고 의심하는 여론도 있으나, 당시엔 초창기라 그냥 올려진 글을 액면 그대로 다 믿는 게 당시 상황이었으니, 인터넷 바닥이 작은 것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해버렸던 것이다.
시사 방송 때문에 국민들이 관심을 갖게 됐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인터넷 여론 때문에 시사 방송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알다시피 원래 언론 자체적으로는 사건 초기 단신 뉴스로 보도되고 그대로 묻혔고, 후속 기사도 없었으며, 매일같이 기사가 쏟아지는 언론의 특성상 잊혀진 사건이었다.
헌데 특정 정치 세력들이 기사를 발굴하여 각색하여 '살인마 미군' 프레임으로 퍼트리기 시작했고, 당시 바닥이
작은 인터넷 특성상 삽시간에 여론을 장악하였다.
당연히 네티즌들은 방송사 게시판 여기저기에 효순, 미선 사건 다뤄달라는 게시물로 도배를 하게 되었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방송을 통해 처음 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방이라면 몰라도, 서울에서는 대학가는 물론 번화가 거리에 끔찍한 피해 사진과 글이 붙어있는 게 흔했기에 인터넷을 하지 않는 일반인들도 대충은 알았을 것이다.
당시 과열된 시위를 보면 어느새 효순이와 미선이는 뒷전으로 밀려나있고 반미 시위가 주가 되었는데, 특히 서울의 대학생들은 훨씬 과격하여 아예 미군 부대에 직접 찾아가 깽판 치는 일도 발생했다.
미군 부대 무단 침입을 시도하거나, 경계를 서고 있는 미군의 무기를 빼앗으려다가 몸싸움이 발생되는 등 난장판이었다.
8. 기타
사건이 일어난 지 10년 후 미선 양의 아버지는 "사고를 낸 미군도 이젠 편히 지내길 바란다." 고 말했다.
당시 사고를 '미군의 살인' 이라고 규정하는 반미 단체와 다른 견해도 밝혔다.
미선 양의 아버지 심 씨는 "단순한 사고라고 생각하는데 (미군이) 애들이 미워서 낸 게 아니지 않나." 라며 "얼굴도 모르지만 그 미군들도 이젠 마음의 짐을 덜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효순 양의 부친 신현수(58)도 마찬가지 생각일 것이라고 전했다.
2005년 4월 29일 MBC 시사프로 <세계와 나 W>에서 퇴역한 마크 워커 하사를 찾아가 인터뷰한 바가 있는데, 중학생들을 치여 죽였단 죄책감에 끔찍한 PTSD에 시달리고 있었다.
매일 잠을 이루지 못하고 허리 통증과 설사에 시달리고 있어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었다고 한다.
사고 일주일 전(6월 6일)에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미군 고압선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전동록이 투병 11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월드컵 때문에 묻혔다.
매년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으로 인해 유족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한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관련자였던 문부식이 2003년 2월 4일 조선일보 '폭력의 세기를 넘어: 문부식의 시간여행' 1화에서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사실을 과장하고 자가 발전적인 분노로 단순성에 매몰된 자들' 이라 비판해 파문이 일었다.
정치인 김문수는 경기도지사 시절, "미선·효순양 사고는 길이 좁은 게 원인" 이라 했다.
2014년 56번 지방도의 해당 구간은 왕복 4차로로 확장 이설했고, 기존 도로는 마을길로 사용 중이다.
사건 발생 이듬해인 2003년 4월 북한 평양의 모란봉 제1중학교에서는 두 학생을 6학년 9반 명예학생으로 제 멋대로 등록시킨 후 2005년 3월에는 졸업장을 줬다.
한 술 더 떠 이걸 주제로 "다시 보는 졸업증" 이라는 선전 영상까지 만들었다.
한 마디로 반미 감정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이득을 취하기 위한 조선로동당의 썩어빠진 프로파간다이다.
카투사로 복무 중인 한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사고를 낸 해당 장갑차는 여전히 부대에서 사용 중이라고 했다.
사고가 난 이듬해에 주한미군에 이상하게 안전 사고가 많이 발생해서 사망자가 여럿 나오자, 억울하게 죽은 두 원혼 때문이라는 카더라가 돌았고, 주한미군 측에서 찜찜했는지 위령제까지 지냈다고 한다.
2006년에는 한 경향신문 기자가 미군 중학생 압사 사고 희생자인 신효순 양의 아버지 신현수 씨를 찾았는데, 당시 미군들이 농사일을 돕기 위해 신현수 씨에게 직접 밭일을 배우고 있었다고 한다.
미군 장병들은 2003년부터 자발적으로 모여 농사일을 돕고 있었으며 신효순 양의 어머니가 아이의 모습이 생각나 미군 부대 측에 오지 말라고 했는데도 매년 봄, 가을에 찾아와 일손을 도왔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주한미군은 자신들 예하 군인 및 군무원 등에 의해 벌어지는 범죄 및 사건/사고에 대해 보다 한국인들이 납득할 만한 방식으로 사과 및 재발 방지 제스처를 취하는 등 예전보다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10년 뒤에 평택에서 미 공군 군사경찰들이 엄연히 미군 부지 밖에 있었음에도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었다는 이유로 한국인 3명을 권한도 없는데 체포해 기지 안으로 끌고 들어가려 했고, 한국 경찰과도 시비가 붙은 바 있는데, 이때는 제7공군사령관이 정복을 입고 직접 한국식으로 기자들 앞에서 고개 숙여 사과하는 등 보다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이며 성의 있게 사건을 수습했다.
그리고 이는 2020년에 와서도 변하지 않아 2020년 8월 30일 SUV 승용차가 음주운전한 상태에서 과속하다 주한미군 장갑차를 들이받아 4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도 주한 미 대사인 해리 해리스가 트위터에 추모글을 남기고, 주한미군 역시 훈련을 중단하고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신속히 밝혀오는 등 발 빠르게 조치를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사건 이후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던 맥도날드가 사라졌는데, 좀 미묘한 시기에 없어져서 항간에는 해당 사건에 항의하는 지역 주민들의 시위로 사라졌다고 주장하지만, 증거는 없다.
그런데 이때 경상남도 김해시 장유에 있던 맥도날드는 정말로 미국 상품 불매 운동으로 인해 없어졌다.
2000년에 발매된 서태지 6집 2번 트랙의 '탱크' 라는 곡이 이 사건으로 인해 뒤늦게 주목받았으며, 가수 이안도 2004년 1집 수록곡 <美.人.> 을 통해 이 사건을 이야기했다.
디자이너 정철연이 웹툰 마린블루스 시즌 1에서 니노 병장 무죄 선고 당일부터 촛불 집회까지 해당 사건을 언급했다.
2002년 12월 당시 노무현 당선자가 이낙연 당시 대변인을 통해 촛불시위 자제 요청을 했다.
2008년경 사고 현장 근처 지역인 파주시에 있는 무건리 훈련장이 확장하면서 국방부가 인근 오현리의 토지를 수용하는 중에 주민들의 반발이 일었는데, 이때 운동권에서는 이 사건과 엮으려는 시도가 나왔다.
이들 논리는 당시 사고를 낸 미군 장갑차의 목적지가 무건리 훈련장이었으니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이런 논리는 상당한 무리수였고, 제도권 언론에서도 이 논리를 수용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 문제는 2011년에 인근 가야리에 상가용지를 포함한 이주단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합의되면서 일단락되고, 2012년 말 이주단지 조성이 완료되었다.
2017년 6월 10일 미 육군 제2보병사단 창설 100주년 기념 행사를 하려 했으나 반미 단체가 시위에 나서고 팬사이트에 악플을 달면서 많은 가수들이 참여를 취소했다.
이건 행사 주최측인 의정부시가 가장 문제인데,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창설일은 10월 26일로, 기념 행사를 하려 한 6월 10일은 창설일과 전혀 관련 없는 날이다.
의정부시에서 벌이는 다른 행사와 묶어서 진행하기 위해 탁상행정식으로 무리하게 진행한 것이 문제.
2017년 6월 13일 추모 행사에서 14년 만에 유족이 참석했다.
유족은 "그래도 15년 동안 한결같이 미선이, 효순이를 잊지 않은 게 시민단체더라" 며 "이제는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그분들 뜻에 따르기로 했다" 고.
다만 유가족이 딸의 죽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지 않길 바란다고 못을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유가족의 발언을 무시하고 '사드 가라', '소파 전면 개정', '자주 평화', '평화협정체결' 등이 적힌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등 상관도 없는 의제를 들먹이며 정치적인 퍼포먼스를 벌였다.
일본 우익층 사이에선 원래 이 사건 때문에 소녀상을 만들려다가 위안부로 바꿨다는 혐한성 루머가 퍼져있다.
국내에는 사다모토 요시유키의 혐한 논란 당시에 사카모토가 이를 기반으로 한 답변을 하면서 약간이나마 알려진 편이다.
2020년 12월 19일, 스티브 유가 자신의 입국을 막으려는 문재인 정부를 비난하는 가운데 이 사고를 '효진이, 미진이를 가지고 반미 감정을 부추겨왔다.' 라면서 피해자의 이름도 모른 채 자신의 피해를 호소하는 용도로 써먹기도 했다.
해당 사건 사고 때문에 생긴 반미 감정도 한국에서의 월마트 성장의 방해요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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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골져쓰한 골골송 작성시간 23.04.05 나 초딩때 버스정류장마다 이거 사진 그대로 붙어있어서 기억 정확하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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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냥한들소 작성시간 23.04.26 아 나도 이사건보면 사진부터 떠올라... 트라우마로 남아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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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하이어하이어 작성시간 23.05.17 진짜 나도 사진 보고나서 트라우마임 근데 너무 안타까운 사건이다. 고의는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지만 학생들 너무 ㅠㅠ 에휴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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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18214 작성시간 23.06.27 충격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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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내노래에화음넣지마라 작성시간 23.10.28 사고도 끔직하지만 진짜 계속 이용해먹던 정치권이 제일 끔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