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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할매의 속삭임

[사람]사코와 반제티 사건

작성자난파|작성시간24.06.05|조회수3,285 목록 댓글 4

 

출처 : https://namu.wiki/w/%EC%82%AC%EC%BD%94%EC%99%80%20%EB%B0%98%EC%A0%9C%ED%8B%B0%20%EC%82%AC%EA%B1%B4

사건의 주인공 니콜라 사코와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1. 개요

1920년대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벌어진 사법살인 사건.

미국판 드레퓌스 사건.

그리고 프랑스와 달리 이 사건의 누명을 쓴 사람들은 결국 재판 후 전기의자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2. 전개

2.1. 재판과정

1920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사우스브레인트리 구두공장에서 두 명의 남자가 침입하여 경리직원과 경비를 살해하고 16,000달러를 강탈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은 용의자로 구두수선공 니콜라 사코(Nicola Sacco, 1891년 4월 22일 ~ 1927년 8월 23일)와 생선장수 바르톨로메오 반제티(Bartolomeo Vanzetti, 1888년 6월 11일 ~ 1927년 8월 23일)를 체포했다.

이들은 이탈리아계 미국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시민 불복종 운동 차원에서 참전을 거부했던 아나키스트였다.

프레드릭 G. 캐츠먼 검사

검사 프레더릭 G. 캐츠먼은 이들을 사건의 범인으로 기소하였다.

이들에게서 현금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발견되었고 여권을 소지한 점으로 보아 범행 후 해외로 도주할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웹스터 세이어 판사

재판이 벌어지는 내내 자신들은 그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현장 근처를 우연히 지나갔을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다.

또한 검찰 측이 증거로 제시한 사코의 모자는 정작 사코에게 맞지 않는 크기였으며, 범행에 사용되었다는 총기 역시 조작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증인들의 진술 역시 모호하거나 번복되기 일쑤였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사코와 반제티는 당연히 무죄 석방되었겠지만 판사 웹스터 세이어는 노골적으로 배심원들에게 사건과 아무 관련 없는 애국주의와 이념을 호소하였고 유도신문을 자행해 일부러 피고인에게 불리한 재판을 진행했다.

셀레스티노 메데이로스

이와중에 1925년 11월 셀레스티노 메데이로스라는 죄수가 사코와 반제티 사건의 진짜 범인이 로드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조 모렐리 갱단이라고 밝혔다.

사건 당시 두목인 조 모렐리와 또 다른 범인이 강도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이에 변호인 프레드 H. 무어는 메데이로스의 증언을 증거로 제출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은 점점 불리하게 돌아갔다.

프레드 H. 무어 변호사

당시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앨번 터프츠 풀러는 하버드 대학교 총장 애벗 로런스 로웰,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학장 새뮤얼 웨슬리 스트래턴, 전직판사 로버트 그랜트로 구성된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풀러 주지사는 사면권 행사를 거부했고 독립조사위원회는 주지사의 결정을 지지하였다.

1927년 4월 9일, 대법원은 사코와 반제티에게 사형을 선고하였고 같은 해 8월 23일에 형이 집행되면서 사코와 반제티는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했다.

2.2. 재판 이후

이 사건은 미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다.

사형이 임박하자 사형에 반대하는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났다.

파리의 미국 대사관에 몰려든 시위군중들 때문에 전차가 동원되었으며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미국 상품을 파는 상점들이 공격받았으며 남아프리카 연방(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는 성조기가 불타 버리고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동맹파업이 일어났다.

시드니, 도쿄, 부쿠레슈티, 로마, 부에노스 아이레스, 아테네, 프라하의 거리에는 성난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때만 하더라도 아나키즘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히 강력한 위세를 자랑하는 이념이었고 미국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혁명 노조였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만 하더라도 십만의 정회원을 자랑하는 당대 최강의 노동자 조직일 정도로 파급력이 있었기에 사코와 반제티 사형에 대한 반응은 처음으로 국제적이고 의식적인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반미 운동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캘빈 쿨리지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며 아나톨 프랑스는 '유럽 노인의 호소' 를 발표하였고 작가 존 더스 패서스는 '두 개의 미국' 을 선언하였다.

사코와 반제티가 사형에 처해진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무정부주의 조직인 '그루포 아우토노모(Gruppo Autonomo)' 소속이었으며 '크로나카 소베르시바(Cronaca Sovversiva)' 라는 무정부 신문을 구독하고 글을 투고했기 때문이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에서는 물가상승과 빈부격차,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이런 와중에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테러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로서는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사코와 반제티가 걸려들었다.

사코는 감옥 안에서 단식투쟁을 벌였고 반제티는 '어느 프롤레타리아의 삶'이라는 책을 쓰며 자신들의 무죄를 항변하였지만 모두 허사였다.

사코는 자신의 아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반제티는 '뉴욕 월드' 와의 인터뷰에서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리고 처형 직전 마지막으로 제공된 식사인 스프와 고기, 토스트, 차 등으로 마지막 만찬을 즐긴 그들은 당당하게 죽었다.

처형 당시 니콜라 사코는 33세, 바르톨로메오 반제티는 36세였다.

3. 후대의 평가

그리고 50년이 지난 후 1970년대가 돼서야 매사추세츠 주지사 마이클 두카키스는 사코와 반제티를 신원(伸冤) 및 복권(復權)하였다.
(진범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듀카키스가 사코와 반제티를 재심하여 무죄라고 선고하지도 않았다.
듀카키스는 이 재판에서 일어난 여러 인종차별적인 문제점을 들어 이 재판이 잘못 치루어졌다는 점을 인정해(이미 사형이 집행되어 되돌릴 수도 없다) 둘을 복권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클 두카키스는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에 도전하나 공화당의 조지 H. W. 부시에게 패배하였다.

여론조사에서 큰 차이로 줄곧 앞서가다가 아이러니하게도 생방송 TV토론에서 사형제도에 관한 답변이 치명타가 되어서 낙선하였다.
(당시 한 탈옥범이 강간,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듀카키스에게 "당신 부인이 그렇게 당한 후 살해되어도 범인에게 사형을 내려선 안된다고 주장할거냐?" 라는 질문에 담담하게 그렇다고 답한 것.
이에 상대 토론자인 부시가 감정도 없는 냉혈한, 어떻게 그런 일을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까, 가정도 모르는 냉정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 토론회 이후 듀카키스의 지지도는 7%나 하락했다.
"평소부터 저는 사형제를 반대했습니다." 라는 발언은 범죄자에 대한 분노에도 불구하고 사형제가 범죄 예방 효과가 없다는 그의 소신에서 나온 합리적인 답변이지만, 유권자들이 원하던 가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던 것이다.)

이 사건은 유가족의 분노, 사회적 인식, 범죄자의 교정 가능성, 오판 가능성 등 최대한 예측 가능한 변수 모두를 분석하여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결정되어야 할 형벌 집행 문제와 관련된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의 좋은 사례로도 언급되고 있다.

시인 임화는 이 사건을 토대로 <曇―一九二七: 작코·반젯틔의 命日에>라는 프로 시를 남기기도 했다.

소련에서는 일부 지명을 '사꼬 이 반쩨띠(Сакко и Ванцетти)', '사꼬 이 반쩨띠 거리(Улица Сакко и Ванцетти)' 로 개칭하기도 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로, 무정부주의 혁명가 네스토르 마흐노의 친구였던 무정부주의자 니콜라이 로그다예프Николай Рогдаев는 소련에서 무정부주의 활동 중 OGPU에 체포되었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로 추방되어 뇌출혈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그가 사망한 거리가 바로 사코와 반제티 거리였다.

3.1. 엔하위키의 역사학계 날조

엔하위키(리그베다 위키)는 이 문서와 동명의 문서를 통해 미국의 역사학자인 폴 애브리치를 2014년부터 근거 없는 허위사실로 모함했다.

폴 애브리치에 대한 허위 자료가 엔하위키를 통해 유포됐다.

위에 있는 뉴욕 타임즈와 더 가디언 기사에서 보는 것처럼 완전한 왜곡글로 역사학계나 아나키스트 운동 기준에서 매우 황당한 날조글이다.

폴 애브리치는 1952년 뉴욕 주 코넬 대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뉴욕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인물로 애브리치의 학술적 업적은 미국과 러시아 아나키스트들의 모습을 학술적으로 연구해 "부활" 시켰다는 점이다.

폴 애브리치 이전에는 미국에서 아나키스트는 무시당하거나 경멸당하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폴 애브리치는 그런 아나키스트의 인식과 다른 모습을 "부활" 시켰다.

대학원에서 폴 애브리치는 아나키스트들에 대해 "투쟁자가 아닌 사람으로의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애정과 감정" 을 교육하였으며, 교육 당시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아나키스트' 라는 이미지에 도전했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 역사학자였다.

에브리치 박사는 아나키스트 운동가들의 저명한 친구가 되었다.

다른 기사에서도 에브리치는 '아나키스트의 보편적인 이미지가 폭력적이고 부도덕적인 점' 이 문제라며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한 학자였다.

애브리치의 아내의 증언에 의하면 폴 애브리치는 자신을 '운동(아나키즘 운동)의 학자, 교사, 연대자로 여겼고 거대한 공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고 말했다.

"모든 선량한 사람은 마음 속에선 아나키스트" 라고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였다.

애브리치의 사망 당시 스튜어트 크리스티는 폴 애브리치에 대한 긍정적인 글을 더 가디언에 게재했는데 크리스티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폭사미수 사건과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 내 정치범 수감자들에 대한 석방운동으로 유명한 영국의 아나키스트였다.

사코와 반제티 사건에 대한 애브리치의 평가는 한국어로 어느정도 확인 가능하다.

바로 한국의 아나키스트 운동가인 하승우가 번역한 아나키스트의 초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 책을 읽어 보면 사코와 반제티가 과격 폭력운동에 가담했다는 건 두 사람의 동지들이 진술한 구술에 근거한 내용이며 폴 애브리치는 사코와 반제티에 대해 지극히 옹호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아예 비판하려는 내용조차 아니다.

폴 애브리치는 미국에서 무시당하고 경멸당하고 부도덕한 이미지였던 아나키스트에 대한 편견에 도전했으며 미국과 러시아의 아나키스트들에게 인간적이고 긍정적인 면을 재조명해 주도했던 학자였다.

그러나 엔하위키에선 없는 사실을 날조해 황당하게 왜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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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Segust | 작성시간 24.06.05 아니 재판을 7년했는데 걍 사형
    판사도 죽여야돼
  • 작성자레이몬드현식 | 작성시간 24.06.06 하ㅋㅋ 아니 이런 사법농단 보면 화나는게 억울하게 누명 쓰고 사형당하거나 종신형에 처해지는 사람들하고 유가족도 불쌍하지만 원인이 되는 범죄의 최초 피해자들의 억울함과 유가족들의 아픔은 누가 보듬어주는 거임? 얼탱없어 더러워
  • 작성자뭐래는거야 | 작성시간 24.06.06 진짜 범죄자는 유유히 살아갔겠네 개빡친다
  • 작성자크리스피치킨도넛 | 작성시간 24.06.11 엔하위키=나무위키 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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